이문열의 사부곡, 끝나지 않은 노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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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의 보헤미안 랩소디 이 글을 읽기 전에 해두셔야할 일.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를 틀으십시오. 자동 되감기를 선택해서 되풀이 듣고 또 들으며 이문열의 아슬아슬한 정신세계를 함께 돌아보시죠. 선택이 아니라 필수 옵션입니다. 이문열이 누구인가. 역작 <사람의 아들>에서 절대 존재에 대한 진지한 문학적 논구와 세련된 문체로 국내 문단에 혜성처럼 등장한 이후 지금까지 물경 천만권 이상의 책을 팔아치운 이 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소설가이다. 문단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그는 사재를 털어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소설가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었)다(국가에서도 하지 못하는 가난한 문인 구제를 그가 하고 있(었)다). 그 금액은 여러분의 상상을 가볍게 넘어선다. 사숙을 만들어 싹이 파릇한 예비작가를 모아놓고 지도하는데 힘을 쏟기도 한다. 수 많은 독자와 추종자, 문하생을 거느린 언필칭 이문열 사단의 지도자, 각종 문학상의 심사위원으로, 신문문예의 위원장으로, 한국문단의 지도자로 활동하고 행세하며, 문학적 성취에 있어서도 결코 녹록치 않은 위상에 있는 이문열은 "한국문단 최고의 권력"이다. 그런 그가 힘들게 지켜온 금연의지를 꺽으면서까지 격앙된 어조로 조선일보를 옹호하고 나왔다. 이씨의 말 : <조선일보>를 ‘권력’이라고들 하는데, 그 권력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나. 발행부수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조선일보>를 국민들이 선택했기 때문에 <조선일보>가 최고의 발행부수를 누린 것으로 안다. 군사정부가 <조선일보>를 키웠다고 하는데, 군사정부가 언제 국민들에게 <조선일보> 구독하라고 강요한 적이 있는가? 군사정부가 <조선일보>의 부수를 늘리기 위해 무슨 조처를 취한 적이 있는가? 내 정보가 정확한지 모르겠는데, 난 그런 일은 없는 걸로 안다. <조선일보>가 권력을 누리게 됐다면 그건 독자들의 선택이었다. 이문열은 작가이다. 그것도 문호의 칭호를 받는 작가이다. 본질적으로 작가들은 미문을 사랑한다. 구토를 유발시키는 문체를 선택하는 하일지 같은 작가들은 작품을 전달하기 위한 한 장치로 고의로 그럴 뿐이다. 대문호 이문열이 미문은 고사하고 논리구성 자체가 안되는 궤변으로 조선을 옹호했다. 이게 이문열이 한 말이라니. 나는 경악(하는 척)한다. 이 말은 단 한마디로 줄일 수 있다. 조선일보는 많은 국민이 본다. 그래서 옳다. 이것은 무엇인가. 다수에 대한 열광, 나도 다수에 속하고 싶다는 무의식의 발로, 소수의 불온함(다수에게 대항하는 소수는 필연적으로 불온하다)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다. 도대체 왜? 무엇에 대해? 이문열은 두려워하고 있는가? 이문열은 이렇게 말한다. 나.. 떨고 있니? 이문열은 분명히 이 사회에서 다수에 속한다. 아니 다수를 이끄는 영도자 중 일인이다. 다수를 대변하는 신문(또는 일부에서 주장하는대로 찌라시) 조선일보를 공박하는 존재들에(한 줌도 안되는 정치권력의 홍위병) 대한 불쾌감이야 당연한 일일 게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부정하려는 움직임에게 그가 느끼는 언짢음이야 이해함직도 하다. 그러나 보라, 이상하지 않은가? 다시 이씨의 말 : <조선일보>의 논조가 극우적이고 수구적이라 치자. 그게 싫은 사람들도 있겠지. 그러나 그걸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신문이 팔리는 것 아니겠는가? 그걸 왜 간섭하는가? 극우라고 해서 무조건 나쁘다고 하여 사회적 공적(公敵)으로 몰아 제거의 대상으로 삼는 게 과연 정당한 일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이씨는 과연 극우 수구들의 특징인 무식함 때문에 이런 천박한 상소리를 내뱉는 것인가? 극우를 제거의 대상으로 삼는 게 정당하지 않다는 이씨의 주장을 히틀러와 도조 히데끼가 들었다면 저승에서 얼마나 기뻐할 것인가. 또는 얼마나 통분해 할 것인가. 이렇게 유능한 변호인이 당시에는 없었던 것에 대해... 그렇지 않다. 이문열은 무식하지 않다. 오히려 그는 유식하다. 그의 논리와 세계관은 그렇게 허술하지 않다. 이런 식으로 이문열이 자신의 파편화된 자의식과 몰역사성과 반진리성을 극명하게 드러낸 것은 그가 <초조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의 실수다!!! 나중에 이 인터뷰 기사를 들여다 보면서 이문열은 얼마나 낯 뜨거워할 것인가(자기의 무분별함에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자기의 실수에 대해 어이없어함으로 해서). 안쓰럽기 그지 없다. 언필칭 먹물들은 자신의 의도에 따라 행동한 뒤에 드러난 스스로의 정신적 도덕적 파탄보다, '실수로' 그런 자기를 들켜버렸을 때 더욱 수치스러워 하는 법이다. 무엇때문에 이문열이 초조한가? 그것을 찾아내는데 필요한 노래, 그것이 바로 보헤미안 랩소디이다. 이 노래가 오랫동안 금지곡에서 풀려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이문열의 초조함을 설명하는 열쇠가 된다. 살부충동 또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 부르는 이 강박관념은 결국 빼어난 한 소설가를 극우로 수구로 만들어 버렸다. 오 광기여, 네가 이겼다. 그리스 이후로 비극은 되풀이 된다... 잘 알려져 있는대로 이문열의 아버지는 이원철이다. "생사(生死) 여부를 둘러싸고 아직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이문열씨의 부친 이원철씨(84). 이문열씨의 장편소설 <영웅시대>에서 주인공 ‘이동영’으로, 12권 분량의 대하소설 <변경>에서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원철씨는 경북 영양이 고향으로 일본 경도제대를 나온 인텔리였다. 남로당 간부였던 그는 6·25가 발발하자 50년 7월부터 9월까지 2개월동안 서울대농대 관리자로 있다가 9·28 서울수복 당시 북한으로 넘어갔다. 당시 남한에는 만삭의 아내(조남현, 95년 작고)와 어린 4남매(묵·연·렬·정옥), 그리고 늙은 어머니가 있었다. 월북한 이씨는 육종학자로 북한의 농업연구소에서 근무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까지 함경북도 어랑군 부호리에 거주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슬하에 아들 만경을 비롯해 옥경·애경·충경 4남매를 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일요시사 189호>" 이원철은 당대의 인텔리였다. 좌익사상에 심취했던 그는 수원농대 학장이란 사회적 지위와 그의 처자식을 "버리고" 월북했다. "버려진" 이문열과 그의 가족은 이후 처절한 고난을 겪어야 했다. 그의 소설에 간간히 등장하는 그와 가족들의 수난은 참으로 가긍한 것이다. 도피와 구핍 가운데서도 서울대 사대에 입학할 정도로 우수했던 이문열은 그러나 연좌제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대한민국에서 신분상승의 어떤 방법도 찾을 수 없었고(당연히 교사가 될 수 없음을 알았을 그가 왜 사대를 갔는지 모를 일이다) 그는 절망한다. 그 절망의 집약은 역작 <사람의 아들>을 만든다. <사람의 아들>의 주인공 민요섭과 그를 추종하다 결국 살해하는 조동팔은 동일인이다. 아니 민요섭은 월북함으로써 자기와 가족을 버린 아버지를 찾아 헤매는 이문열의 분신이며 동시에 그를 구원할 이원철이고, 민요섭을 살해하는 조동팔은 살부의 충동을 억제하지 못한 민요섭 그 자신이다. 민요섭이 기독교의 신에 절망하고 찾아 헤맨 끝에 만난 신은 인간에게 간섭도 하지 않고 인간의 삶을 좌지우지 하지도 않지만 너무나 조용하기만 하다. 월북한 아버지를 둔 그 한가지 이유만으로 갖은 핍박과 절망을 요구받은 이문열에게 그런 신은 가치가 없다. 자기의 설움과 피해를 보상해주는 적극적인 신이어야만 한다. 그 신에 절망하여 기독교의 신에게로 돌아가려는 민요섭을 그의 또다른 분신인 조동팔은 살해하고 만다(그가 하산하려는 민요섭을 살해하는 주요한 이유는 또다시 버려지기 싫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동팔은 자기의 신념을 버리지 않은 채 자살한다. 월북한 아버지에 대한 애증과 자기를 핍박하는 현세의 권력에 대한 구애와 증오가 이중으로 교직되어 있는 이 소설의 닫힌 구조는 결국 이문열이 극우에게 투항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엄마.. 나는 지금 한 남자를 죽였어요...로 시작되는(원곡은 이 부분 앞에 한 파트가 더 있다) 프레디 머큐리의 보헤미안 랩소디가 살부충동을 노래한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나는 살부충동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를 밝히는 것은 더 길고 복잡한 정신분석을 요하므로 생략하기로 하자. 일단 그렇게 가정한다면(실제로 그 이유로 인해 이 노래는 우리 나라에서 오랜 동안 금지곡으로 묶여 있었다) 우리는 이 노래가 지난 천 년 동안 가장 큰 영향을 준 노래라는 어떤 조사(영국 HMV 뮤직 스토어 체인, 채널 4 텔레비전, 클래식 FM 라디오가 연중내내 60만명의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것) 결과는 어쩌면 충격적이고 경악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살부충동은 패륜이나 끔찍스럽고 저주스러운 범죄인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정신분석 또는 의학의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이미 일반인도 모두 알고 있는 오이디프스 컴플랙스를 여기서 재론한다는 것은 지겨운 일이다. 하지만 프레이져경의 '황금가지'-금세기 최고의 학문적 업적으로 추앙받는-가 늙은 왕(아버지) 살해를 통해 새 왕(아들)의 생명을 이어가는 전통에 대한 논구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사실 부친 살해의 충동 또는 실행(정신세계에서의 일이다. 실제로 하는 놈은 교도소가 아니라 정신병동으로 끌려간다)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임을 심리학자들은 말해준다. (머리는 생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자를 쓰기 위해서 있다고 믿는 극우파들이 '부친살해'란 말만 가지고 난리를 떨 게 걱정스러워 한마디 하자면, 여기서 '살해'는 '극복'이란 말로 대체되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 즉, 같은 말이다. 어이구 지겨워, 이런 토 좀 안달게 해주라. 극우님들아... -_-;;;) 이문열로 다시 돌아간다. 이문열이 월북한 아버지를 어떻게 느끼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일반적인 경험칙상 그가 아버지란 존재에 대해 애증이 엇갈렸을 거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부재는 '버려진' 가족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었다. 그가 월북하지 않았다면, 아버지가 계셨다면...이라고 이문열은 얼마나 간절히 염원했을까. 옆에 없는 아버지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이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또한 그에게 고통을 준 아버지란 존재에 대한 미움은 그와 '버려진' 가족이 받는 고통의 크기에 비례하여 커져갔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갑자기 부친이 사망했다거나 실종되어서 혼자가 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의지에 따라 '버려졌'다. 그는 아버지에게 '거부당한' 것이다. 거세공포보다도 더 무서운 존재에 대한 부정을 다른 이도 아닌 아버지가 저질러버린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렇게 사랑하며 동시에 증오하는 마음 상태를 '양가감정'이라고 부른다. 오랜 질병으로 신음하는 부모를 간호하는 자식들이 "빨리 완쾌되셨으면"하고 바라면서 동시에 "당신 괴로운 것 보기도 힘들고 나도 힘겨우니 빨리 돌아가셨으면"하고 바라는 그런 감정을 말한다. 그리고 이 양가감정은 인간이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매우 인간적인 감정에 속한다. 다시 말해서 아프면 울고 배부르면 즐거운 등의 동물적 감정이 아니라는 말이다. 버림받은 이문열이 신의 존재에 대해 그토록 열심히 논구한 이유를 이제는 짐작할 수 있다. 이문열이 찾아나선 신은 아버지의 또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대한민국이란 특수상황에서 그가 만난 아버지는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버려야만 하는 첫번째 조건이었다. <사람의 아들>의 초반, 중반에서 이문열은 치열하게 예수와 아하츠 페르츠의 논쟁을 전개하고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데 정열을 바친다.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민요섭이 절망하고 다시 기독교의 신으로 돌아가다 조동팔에 의해 죽는 부분은 소설적 긴장도나 문학적 밀도가 현격하게 떨어진다. 그러나 조동팔의 자살과 그가 죽어가면서 남기는 몇마디는 다시 또 강렬한 리얼리티로 다가온다(나만의 생각일 수도 있다). 이문열이 얼마나 많이 현실에서 좌절하였는지를 짐작케하는 초,중반에 비해 그 결말이 허술한 이유는 늘 내 궁금증의 대상이었다. 이번에 한겨레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가 던진 말을 보면서 내 궁금증은 풀렸다. 이문열은 <사람의 아들>을 쓸 때부터 전향자였다. 그의 정신세계에서 언제나 갈급하게 절실했던 것은 그라는 존재에 대한 알리바이(그에게만은 현장존재증명이라 불러야 한다), 남한에서 출세하기 위해서는 해야만 하는 '아버지라는 붉은줄 지우기'였다. 그는 마법에 걸린 듯 충직하게 그 임무를 수행했으며, 더러는 마취에서 깨어나 소설가의 본분을 기억하고 <황제를 위하여>와 같은 걸작을 만들기도 했지만, 대개는 <변경>, <선택>, <아가> 등과 같은 쓰레기들을 만드는데 정진했다. 그의 재능은 그의 글에 리듬과 생명력을 불어넣었지만 그의 생존본능은 그의 글에서 정신을 앗아갔다. 그 결과는 천만부가 넘게 팔려 인세만으로도 충분한 부가 보장되는 그의 풍족한 삶과, 일그러진 그의 정신세계이다. 보라, 이것이 정말로 "이 세상의 아픔을 맨 먼저 감지하는 안테나"인 작가의 입에서 나온 소리인가? 이씨의 말 : 첫째, 다 양보해서 <조선일보>가 과거 군사정권과 결탁했다고 치자. 지금은 안티조선쪽이 현재의 집권세력과 결탁해 있지 않은가. 안티조선쪽의 면면들을 보면 현 집권세력의 모태가 된 운동과 투쟁에 관여했던 사람들이다. 적어도 대부분이 현 정권과 우군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군사정권 시절 이런 운동(‘안티조선운동’을 말함)이 일어났다면 그건 얘기가 된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는 과거의 일을 뒤집어놓은 것처럼 보여 마뜩찮다. <조선일보>가 DJ와 사이가 좋지 않으며 싸우기까지 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지 않느냐. 그 때문에 안티조선운동은 일종의 정치적 보복으로까지 보인다. 이제 <조선일보>는 힘을 잃고 DJ는 힘을 다 가졌으니 보복을 벌이되 현행법으로는 어쩔 수 없으니까 안티조선운동이라는 일종의 ‘문화적 위장’을 통해 보복을 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로, 과문해서 잘 모르긴 하지만, 세상 어느 나라에서든 특정 신문의 존폐를 두고 운동을 벌인 예는 없지 않을까 싶다. 어떤 신문의 그릇된 태도를 공격하는 것은 있을 수 있으나, 존폐까지 논하는 건 지나친 것 같다. 그건 일종의 테러리즘의 변형이며, 우리나라밖에 예가 없는 줄로 안다. 가령 영국의 <더 타임스>가 역사상 그릇된 논조를 펼 때도 있었을 텐데, 그렇다고 해서 그 신문을 없애자, 그 신문에 글을 쓰지 말자는 운동이 영국 지식인 사회에서 벌어졌다는 얘긴 들어보지 못했다. 신문에 대한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신문에 대해 얼마든지 비판은 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신문의 존폐 여부에 대해 압박을 가하는 일은 참으로 별스런 일로 보인다. 신분상승에 성공한 자는 모름지기 원조보다 더 과격해진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시이저의 갈리아 정복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뛰어난 용병술보다는 정복당한 갈리아 족장과 그 일족에게 로마인과 같은 권리를 인정한 것이란 분석은 타당하다. 달콤한 로마의 권력과 문화에 취해 갈리아는 해체되고 독립의 정신은 사라진다. 오... 신참자여, 갈리아 족장 이문열이어... 당신이 쓴 전향서는 한 장이 아니다. 여러번 거듭해서 되풀이 된다. 소설의 탈을 쓰기도 하고, 수상이유서의 이름을 빌기도 하며, 좌담회에서의 발언을 가장하기도 하고, 이번처럼 인터뷰의 형식을 차용하기도 하지만 당신의 글과 말은 단 한마디로 족하다. 전 향 서. 그렇다. 당신의 부끄러운 말들-더 이상 내 글에 인용하기도 더러운-은 당신에게 부와 명예와 세속적 성공을 보장한 가짜 아버지를 사모하는 사부곡(思父曲)인 동시에, 당신의 진짜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가짜 아버지에게 보내는 사부곡(死父曲)이다. 아... 이제야 알겠다. 왜 당신의 데뷰작 제목이 "새하곡(塞下曲)" 인지를... 노래 부르라. 이 시대 최고의 가객 이문열이여. 그대의 미성과 교태를 모두 동원하여 노래부르라. 충성의 노래를, 다시는 나의 불온한 친부처럼 월북하지 않겠다는 충성의 노래를 부르라... 낡은의자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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