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은 여기 입니다. 


현재 한국사회를 세밀하게 분석한 정말 좋은글... 방송과 음반시장의 가치사슬 분석에서부터 시작해서 봉건적 특권을 기반으로 돌아가는 경제체계를 갖춘 한국사회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가슴 서늘해 지는 이야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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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X 끊는 사회를 만들어 놓고 나 몰라라 하는 피 끓던 당신에게-


지난 3월7일 자정께 방영된 MBC의 ‘뉴스 후’를 두 번이나 봤다. 본방으로 한번, 인터넷으로 한번. 오랜 궁금증을 풀어주었기 때문이다. ‘뉴스 후’는 한류의 원천인 TV드라마 시장 생태계와 음악 시장 생태계의 현 주소를 잘 보여주었다.


시청률이 매우 높은 TV드라마를 제작한 유명한 외주 제작사는 거의 적자였다.


‘아내의 유혹’ 제작사인 스타맥스는 2008년 38억 적자, ‘주몽’의 제작사인 ‘올리브9’은 2007년 43억 적자, 2008년 48억 적자였다. ‘태왕사신기’ ‘하얀거탑’의  제작사인 김종학 프로덕션은 2007년 381억 적자, 2008년 74억 적자였다. ‘로비스트’ ‘떼루아’ 제작사인 예당엔터테인먼트는 2007년 220억 적자, 2008년 209억 적자를 보았다. 적자의 핵심은 지나치게 높은 배우 출연료였다. ‘올리브9’이 금융감독원에 제출한 ‘드라마 매출원가 및 매출구조 분석’ 자료에 따르면 총 드라마 제작비 중 배우 출연료가 55~60%, 작가/연출/스텝급여가 10~15%, 외주용역비가 10~15%, 일반관리비가 15~20% 이었다.(한국방송영상산업 진흥원 자료) 어떤 드라마는 배우 출연료가 70~80%에 달하는 것도 있다 한다. 배우들의 출연료는 지난 몇 년 간 한류 붐을 타고 급상승 하였다. 2001년 ‘여인천하’에 출연한 당시 최고의 스타였던 강수연의 편당 출연료는  4백만 원~5백만 원이었다. 2003년 ‘대장금’의 슈퍼스타 이영애는 편당 6백만 원이었다. 그러나  2007~8년 현재, 태왕사신기에 출연한 배용준은 (자신의 투자 분까지 반영되어) 편당 2억5천만 원이었다. ‘에덴의 동쪽’의 송승헌은 편당 7천만 원, ‘에어시티’의 이정재는 5천만 원, 여성 배우는 최지우가 4천8백만 원으로 최고, 고현정은 3천5백만 원. 명목 국민소득이 우리의 2배에 육박하는 일본의 울트라 슈퍼스타 기무라 타쿠야는 편당 출연료가 4천7백만 원이었다. 톱스타의 출연료가 올라가면 스타 작가들의 원고료도 자동으로 올라간다. 이렇게 하여 드라마 제작비가 급증한 것이다. 그래서 2007년 9월 한국 드라마제작사협회는 출연료 상한제(최고 1,500만원)를 발표했으나, 이미 아시아 한류의 상징이 된 유명 배우 13명은 예외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가 위에서 적은 높은 출연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 산업에 종사하는 다른 사람들의 인건비는 올라가지 않는다. 올릴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 드라마 산업은 다른 많은 산업들과 마찬가지로 얼굴 하나는 반반한데, 팔, 다리, 허리, 자궁, 혈관은 지극히 부실한 기형이 되었다.


TV드라마 시장 생태계가 지속가능성 위기를 맞은 것은 기본적으로 시장에서 흔히 일어나는 과열 경쟁 탓이다. 한류 붐이 일어나는 아시아권에다가 드라마 판권을 팔기 위해서는 제작사들이 거액을 주고서라도 간판스타를 기용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상당한 진통을 겪겠지만 결국 시간이 흐르면 시장에 의해 조정되게 되어있다. 게다가 한류 붐 초기에는 한국 톱스타의 출연 여부가 흥행을 결정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콘텐츠(스토리)의 영향력이 커진다. 일본의 경우는 이것이 좀 더 빨리 나타난다. 따라서 조정의 방향은 기획, 투자, 콘텐츠(기획, 스토리 전개, 감독)와 관련된 가치생산 사슬에 보다 많은 이익이 갈 것이다.


이렇게 애써 태연하려 해도 여전히 씁쓸한 의문은 남는다. 왜 우리나라 산업들은 우월적 지위에 있는 가치생산 사슬(간판스타)이 이익을 독식해서 나머지 사슬들을 극도로 피폐하게 만들어 버리는 지, 왜 그렇게 위험한 모험 투자(엄청난 비용을 지불하는 톱스타 캐스팅)를 경쟁적으로 하고, 끝내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회사 몇 개가 도산하고, 수많은 투자자들이 쪽박을 차고 나서야 비로소 시장 생태계가 정상화의 길로 들어서는지!! 사실 나는 이런 모습이 처음이 아니다. 대우자동차에 근무하던 1990년대 중반에도 경험하였다. 당시 자동차 산업에는 대우, 기아, 쌍용, 삼성 그룹이 일개 말단 ‘대리’의 눈에도 도저히 이해 못할 낙관적인 전망에 기초하여, 그룹의 명운을 건 위험한 투자를 경쟁적으로 하는 것이 확연했다. 지극히 낙관적인 전망에 기초한 과잉 중복 투자는 자동차 산업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1998년 빅딜 대상이 된, 석유화학, 항공, 철도차량, 발전설비, 선박엔진, 정유, 반도체 산업에서 다 그랬다. 한보그룹의 무모한 철강 산업 투자는 이미 1997년 초에 비극적 종말을 고하였다. 이 모든 것은 금융 산업이 뒷받침했기에 가능했던 만큼 은행들과 종금사들도 위험한 차입(단기외채 차입)과 대출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90년대 중후반의 비극을 겪고, 한국은 금융 산업 구조조정, 부채비율 축소, 기업 지배구조 개혁, 인력사업 구조조정 등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드라마 산업에서 일어나는 한류 스타 잡기 러시(rush)와 엄청난 고액출연료와 그 후유증을 보면 금융 개혁이나 기업지배구조 개혁만으로는 제어하기 힘든 어떤 심리 내지 DNA가 한국 기업가들에게는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드라마 제작에 소요되는 투자금은 은행 대출이 아니라 주식시장 등 다른 금융시장에서 조달했다고 알려져 있다. MBC, KBS, SBS가 자체 제작을 했다면 교섭력 우위 때문에 한류 스타들의 출연료가 그렇게 높이 치솟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외주제작사를 구성하고 있는 기획자, 감독, 투자자들의 창의와 열정이 분출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자유로운 생산자와 시장이 없으면 공황도 없겠지만, 동시에 창의와 열정의 분출도 없고, ‘한류’도 없을 것이기에 어떤 시스템을 구축해야 안정적이고 생산력 높은  생태계가 만들어질지 모르겠다.


문제는 음악시장 생태계

TV드라마 시장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는 음악 시장 생태계에 있었다. 한국 음악시장 생태계의 위기는 콘텐츠 유통망을 장악한 이동통신 3사의 합법적 약탈의 문제였다. 그로 인해 창의, 열정, 오랜 몰입과 훈련이 필요한 콘텐츠 생산자(가수, 연주자, 음반 제작사)들이 말라 죽어가는 문제였다.


지금 한국의 대부분의 연예기획사는 적자다. 가수 ‘비’, GOD, ‘원더걸스’를 키워낸, 박진영이 만든 JYP 엔터테인먼트는 작년에 적자를 보았다. 원더걸스의 음반 5만장을 팔아 2억5천만 원 매출을 올렸고, 광고로 15억, 휴대전화 벨소리 다운로드 등으로 총 75억 원의 매출을 올렸지만, JYP 전체적으로는 10억 원의 적자를 보았다. H.O.T, 보아, 동방신기, 슈퍼주니어를 키워낸, 이수만이 만든 SM 엔터테인먼트도, 서태지와 아이들의 양현석이 만든 YG 엔터테인먼트도 다 적자였다. 이들의 경영사정이 ‘외화내빈’이 되어 버린 것은, 겉으로 보면 음악 유통 방식의 급변 때문이다.  2001년까지만 해도 음반시장의 매출 규모는 총 4000억이었으나 2007년에는 848억으로 줄었다. 반면에 MP3나 핸드폰으로 듣는 디지털 음악시장은 2001년 당시만 해도 극히 미미했으나 2007년 들어 3700억 원으로 급팽창하였다. 음악을 음반(11,000원짜리 CD)으로 팔면 음반 제작자(가수, 작사. 작곡가, 제작사)가 수익의 63%, 음반매장이 26%를 가져간다. 그런대로 제작자에게 유리한 구조다. 그러나 음반 시장이 죽어버리고, 매출의 대부분이 디지털 음악 시장에서 일어나면서 분배 구조는 유통망을 장악한 이동통신사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되었다. 단적으로 소비자가 휴대전화 벨소리를 다운을 받으면 회당 1,200원을 지불하는데, 콘텐츠 생산자들은 38%(460원), 이동통신사 및 가공업체가 62%(740원)을 가져간다.(문화콘텐츠 진흥원(2008)) 콘텐츠 생산자에서도 가수, 작사. 작곡자의 몫은 작고, 제작사 몫은 크다. 한국 1위, 2위의 음반사인 서울음반은 SKT에, 도레미레코드는 KTF에 인수되었는데, 이로써 이동통신사는 가수, 작사. 작곡자에게는 울트라 갑이 되었다. 음원요율 분배구조를 보면, 벨소리와 통화연결음의 경우 가수에게 약 4.5%, 작사. 작곡자에게 각각 4.5%(도합 9%), 음반제작자에게 25%, 이동통신사에 32%, 콘텐츠 제공업체에 19%, ASP(Application Service Provider)업체에 10%가 분배된다. 그래서 음반과 음원을 팔아 월 100만 원 이상을 버는 가수가 별로 없다고 한다. 싸이월드 배경음악의 경우는 가수에게 돌아가는 요율은 더 낮아서 벨소리와 통화연결음의 절반 수준인 2.5%다.

요컨대 오랜 훈련, 몰입과 타고난 끼와 창의성이 필요하며, 다른 사람에 의해 결코 대체될 수 없는 기능을 가진 가수, 작사. 작곡자에게 너무 적은 몫이 분배되는 것이다.


이동통신사들은 기존 망에다가 새로운 서비스 하나를 얹혔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디지털 음원을 유통시켜 얻은 수익이 2006년 1,128억 원, 2007년 1,031억 원이다. 2007년 당시 전체 음반 시장의 규모가 848억 원인 것을 감안하면 이 이익이 얼마나 짭짤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이런 일은 휴대전화 망이 깔린 다른 나라에서도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MP3 파일, 벨소리, 통화연결음, 배경음악 등으로 유통되는 디지털 음악 시장에서 권리자(제작자)가 가져가는 몫은 한국은 대략 34~39%(제작자는 25% 내외), 일본은  40~65%(제작자는 50%내외), 미국은 50~55%(제작자는 45%내외)이다. 일본은 전체 디지털 음악시장 매출 중 이동통신사가 가져가는 몫은 10~15%에 불과하다고 한다. 우리나라 이동통신사들이 동남아 등지에 인프라를 깔아주고, 디지털 음원 서비스를 실시할 때, 한국과 같은 요율(이동통사가 50%)을 제시하면, 동남아의 콘텐츠 생산자들은 ‘당신들이 왜 50%를 가져가야 하는지 모르겠다’면서 납득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비록 음원 요율은 낮을 지라도 음악 창작자들은 이동통신 망을 잘 탈 수 있는 음원을 만들어 팔아야 허기를 면할 수 있다. 요즈음 음악들이 벨소리와 통화연결음에 적합한 30초 내외의 후렴구가 많이 들어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또 새로운 음악을 생산해봤자 생산비도 못 건지기 때문에 과거 히트했던 곡의 리메이크도 활발하게 일어난다. 이동통신 망을 탈 수 있는 음악을 만드는데 죽기 살기로 매달려도 배가 고픈데, 자신이 만들고 싶은 음악을 만드는 쪽으로 에너지가 올 수가 없다. ‘한류’를 만들었던 토양이 피폐해 지고 있는 것이다. 


현재 한국의 음악 시장 생태계는 한국 사회를 짓누르는 핵심적인 모순과 부조리가 무엇인지, 물질적 문화적 생산력 발전의 질곡이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음악 시장 생태계의 문제는 유료 도로를 건설한 사업자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여 통행료를 엄청나게 높게 책정하여, 도로를 이용하는 나머지 생태계(소비자, 생산자, 운송업자 등)를 피폐하게 만들어 버리는 꼴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유료도로 사업자가 통행료를 과다하게 징수하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기존의 공짜 도로를 이용하면 된다. 하지만 디지털 음악 시장에서는 공짜 도로(밤무대 라이브쇼)나 값싼 도로(CD 판매)는 별로 없다. 디지털 음원을 생산하는 음반사도 이동통신사 소유고, 벨소리나 통화연결음은 당연히 이동통신사 관할 구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디지털 음악 시장에서 일어나는 과도한 착취는 과거 지주가 토지를 떠나 살 길이 없는 소작인에게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여 고율의 소작료를 징수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중세 유럽에서 봉건 영주가 주민들이나 상인들이 도저히 지나다니지 않을 수 없는 도로, 강, 다리에다가 검문소를 만들어 놓고 고율의 통행세를 물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매우 전근대적인 착취이긴 하지만, 솔직히 요즘 유행하는 말인 ‘비즈니스 모델’로 따지면 최고의 비즈니스 모델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왜 재벌. 대기업이 방송 사업에 진출하려고 하는지 명백하다. 이들은 콘텐츠 사업의 국제 경쟁력 강화를 위한 대기업의 참여를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실제는 이동통신사처럼 수많은 가치생산 사슬을 한 손에 움켜쥐고, 가만히 앉아서 통행료나 소작료를 두둑이 챙길 수 있는 절대 ‘갑’적 존재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콘텐츠 생산 사업에는 진입장벽이 거의 없고, 이미 CJ 등 재벌 그룹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다)  완성차 회사의 매력도 바로 이것이다. 수많은 부품업체를 '구매권(Sourcing)’을 지렛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쁘게 말하면 납품단가 등을 통해 필요한 만큼 빨아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1990년대 중반 대우자동차에서 협력업체 담당자를 몇 년 하고, 몇 년 전까지 자동차 부품업체 경영컨설팅을 해봤는데 협력업체에 대한 약탈성은 일본과 한국이 달랐다. 한국이 훨씬 가혹했고, 당연히 협력업체는 피골이 상접했고, 이익을 (장부상으로는) 절대로 많이 내려고 하지 않았다. 일본 도요타, 혼다, 니산 자동차조차도 협력업체에 대해서는 가혹한 원가절감을 밀어붙였지만 한국 같은 수준은 아니었다. 이런 것을 보니 한국에서는 세계적인 부품업체나 중간재 업체가 나올 수 없을 것 같았다)


분명한 것은 유료도로(망) 사업자가 자신의 단기적인 이익을 극단적으로 추구하게 되면 그 도로에 의존하는 공장과 도시가 피폐해지면서, 결국에는 도로를 이용할 차량 자체가 없어지게 된다. 실제 이 조짐은 있다. (민주화의 산물인) 세계 최고 수준의 표현의 자유를 바탕으로 ‘한류’를 만든 끼와 열정이 넘치는 연예인, 작가, 기획자들이 이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지주(이동통신사)로 인해 팍팍한 현실에 고통스러워하고, 암울한 미래에 절망하며, 자신이 들어선 길을 후회하고 있다. 다시 태어나면 절대로 이 짓을 하지 않으리라 맹세하고, 자식이 그 길로 가려고 하면 극력 만류할 태세다. 그 어떤 나라도 갖지 못한, 가히 사우디아라비아의 유전 같은 존재인 재기발랄한 젊은 연예인들이 더 이상 유전이기를 거부하는 격이다. 이들이 노래와 춤을 멈추고, 작사. 작곡을 멈추면 유전이 없어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결국은 계급사회 문제

전근대사회는 길, 강, 다리, 토지가 통행세나 소작료 형태로 상인과 농민의 부를 왕창 빨아가는 사회이다. 또한 왕이 내려준 독점권(전매권), 세습 신분, 유력자들과의 사적 연고, 벼슬 여부-비록 과거 시험을 통해서 선발되었다 하더라도-에 따라 부, 권력, 명예가 천양지차가 나는 사회이다. 천민자본주의 사회는 기업과 노블레스들이 자본주의적으로 변형된 통행세나 소작료나 독점권을 추구하는 사회이다. 한번 깔아만 놓으면 가만히 있어도 끊임없이 통행량과 통행세가 증가하는 ‘망’을 사적으로 소유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사회이다. 더 심하면 19세기 말 미국의 ‘스탠더드 오일’처럼 깔아놓은 ‘망(철도)’을 지렛대로 다른 생산자(석유사업자)들을 모조리 먹어 치워 버리는 사회이다. 기업과 노블레스들이 수많은 농노나 소작인을 거느린 봉건 영주나 지주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회이다. 한마디로 우월적 지위를 갖고 있는 일부 가치생산 사슬이 전후방 가치생산사슬을 악랄하게 착취하는 사회이다. 


당연히 이런 사회에서는 알박기(가치생산 흐름 교란해서 이익 챙기기), 부동산 불로소득 추구, 도장만 찍으면서 돈 벌기, 높은 진입장벽 및 경쟁제한 장벽 쌓기, 관료가 되어 규제권과 처벌권을 갖기(민간 전체를 ‘을’로 만들기)가 횡행하는 사회이다. 따라서 도심요지 부동산 소유 여부, 자격증 소유 여부, 학벌, 학연, 연고, 가치생산 사슬에서의 위치 등이 곧 계급이 되기에, 높은 계급(소속)에 들어가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한다. 한국의 부동산 투기 열풍,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진학률과 사교육 열풍, 고시, 공시, 유학열풍, 대기업. 공기업 현장직의 고령화, 외주화, 대기업 고용감소, 살인적인 대기업. 공기업 입사 경쟁률, 대기업에서 주로 벌어지는 몇 년에 걸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투쟁의 근원은 바로 계급 사회적 요소 때문이다. 계급사회는 세습 신분이 있어야만 계급사회가 아니다. 자신의 노력, 실력이 아니라 소속, 연고, 자격증, 도심요지 부동산 소유 여부가 운명을 결정하면 계급사회이다. 한국 사회가 선진 사회로 가지 못하는 결정적인 장애는 진보와 보수를 초월하여 노블레스들과 사회적 강자들이 전근대사회와 천민자본주의 유산을 적극적으로 향유하고 옹호하기 때문이다.


선진사회는 자신의 창의, 열정, 오랜 몰입을 통해 창조한 성과 -히트 곡, 스타쉽, 특허권, 브랜드 가치- 등을 통해 부, 권력, 명예를 누리는 것을 권장하는 사회이다. 당연히 자신의 노력, 능력, 실력에 기반을 두지 않는 각종 프리미엄, 진입장벽, 자릿세(경제적, 정치적 지대)가 낮은 사회이다. 놀고먹는 자, 적게 기여하고 많이 누리는 자를 철저히 배격하는 사회이다. 가치 생산 생태계가 기여, 부담, 책임과 이익, 혜택, 권능의 균형이 잘 잡힌 사회이다. 한마디로 경쟁과 거래는 자유롭고 공정하며, 무엇보다도 가치의 분배가 공평하여 억울함이 덜 한 사회이다. 높은 물질적 문화적 생산력은 바로 이 토양위에 핀 꽃이다.


유럽이나 일본 사회는 독과점이나 기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전후방 가치생산사슬 약탈을 법과 제도로 막고, 또 사회 구성원들이 공평 감각을 체화하여 스스로 자제하는 사회라고 알려져 있다. 반면에 미국 사회는 사회 구성원들의 공평 감각이 체화된 사회는 아니다. 그렇기에 CEO 연봉과 금융 전문가들의 연봉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공정거래를 규제하고 엄벌하는 법, 제도가 잘 갖춰져 있다. 시장이 큰 만큼 시장 참여자가 많아서 독과점이 발생하기도 어렵지만, 용케 독과점에 도달한 거대한 공룡 기업(20세기 초 스탠더드 오일, 아메리칸 타바코, 최근의 AT&T, 마이크로소프트 등)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기업분할명령을 통해서 쪼개 버린다. 단적으로 철도업체와 결합하여 석유수송망을 장악한 스탠더드 오일은 미 석유 시장의 90%를 점유했으나 1890년 제정된 셔먼 반트러스트 법에 의해 1911년 30개 회사로 분할되었다.


그런데 한국은 이도 저도 아니다. 모든 사회적 강자들이 적게 기여하고 많이 누리려는 도적의 심리를 가지고 있다. 가치생산 생태계를 불태워 잠깐의 높은 소출을 바라는 화전민의 심리를 가지고 있다. 더군다나 불공정거래에 대한 감시, 감독은 허술하고, 징벌은 솜방망이다.


이대로 가면 한국 사회는 모든 영역에서 ‘대’가 끊기는 사회가 된다.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과 청년고용률, 그리고 OECD최고의 자살율과 자동차, 조선, 철강 등 주력산업의 현장직(노조원)의 급속한 고령화(신규채용 부재)는 그 징표이다.

 

 

新애절양(哀絶陽)사회

다산 정약용 (丁若鏞 )은 1803년 哀絶陽(애절양)-男根을 자른 것을 슬퍼함-이라는 제목의 시를 지어 목민심서에 실었다.


蘆田少婦哭聲長(노전소부곡성장) 갈밭마을 젊은 아낙 길게길게 우는 소리. 

哭向縣門號穹蒼(곡향현문호궁창) 관문 앞 달려가 통곡하다 하늘 보고 울부짖네.

夫征不復尙可有(부정불복상가유) 출정나간 지아비 돌아오지 못하는 일 있다해도

自古未聞男絶陽(자고미문남절양) 사내가 제 양물 잘랐단 소리 들어본 적 없네

舅喪已縞兒未澡(구상이호아미조)  시아버지 삼년상 벌써 지났고,갓난아인 배냇물도 안말랐는데

三代名簽在軍保(삼대명첨재군보)  이 집 삼대 이름 군적에 모두 실렸네.

薄言往愬虎守閽(박언왕소호수혼)  억울한 하소연 하려해도 관가 문지기는 호랑이같고,

里正咆哮牛去早(이정포효우거조)  이정은 으르렁대며 외양간 소마저 끌고 갔다네.

磨刀入房血滿席(마도입방혈만석)  남편이 칼 들고 들어가더니 피가 방에 흥건하네

自恨生兒遭窘厄(자한생아조군액)  스스로 부르짖길, "아이 낳은 죄로구나!".  

蠶室淫刑豈有辜 (잠실음형기유고)    누에치던 방에서 불알까는 형벌도 억울한데

閩囝去勢良亦慽(민건거세양역척)     민나라 자식의 거세도 진실로 또한 슬픈 것이거늘

生生之理天所予 (생생지리천소여)    자식을 낳고 사는 이치는 하늘이 준 것이요

乾道成男坤道女 (건도성남곤도여)    하늘의 도는 남자 되고 땅의 도는 여자 되는 것이라

騸馬豶豕猶云悲(선마분시유운비))    거세한 말과 거세한 돼지도 오히려 슬프다 할만한데

況乃生民思繼序 (황내생민사계서)   하물며 백성이 후손 이을 것을 생각함에 있어서랴!

豪家終世奏管弦(호가종세주관현) 부자집들 일년 내내 풍악 울리고 흥청망청  

粒米寸帛無所損(립미촌백무소손) 이네들 한톨 쌀 한치 베 내다바치는 일 없네.

均吾赤子何厚薄(균오적자하후박) 다 같은 백성인데 이다지 불공평하다니, 

客窓重誦鳲鳩篇(객창중송시구편) 객창에 우두커니 앉아 시구편을 거듭 ?슁遺?

(손경자 번역)


정다산은 목민심서에 이 시를 짓게 된 연유까지 써 놓았다. ‘이 시는 가경(嘉慶) 계해(癸亥·1803년) 가을에 강진에서 지었다. 노전(갈대밭)에 사는 한 백성이 아이를 낳은 지 3일 만에 군보(軍保)에 올랐다. 그러자 이정(里正)-세금 징수 관리-이 군포(軍布) 대신 그 집의 소를 빼앗아 갔다. 남편은 칼을 뽑아 자신의 남근을 잘라버리면서 “나는 이 물건 때문에 이런 곤욕을 받는구나” 하였다. 아내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남근을 가지고 관가에 가 울면서 호소하였으나 문지기가 막았다. 내가 이를 듣고 이 시를 지었다'는 것이다.


다산 선생이 살았던 시대에는 중앙과 지방의 모든 관아에서 기록이나 문서, 전곡(錢穀)을 관장하는 말단행정에 종사하는 이속(吏屬)들이 조세를 가혹하게 거두어들여, 백성을 못살게 들볶는 가렴주구(苛斂誅求)가 극에 달해 있었다고 한다. 갓난아이나 죽은 자에까지 군포(군 복무 대신에 내는 세금)를 물리는 실태-백골징포(白骨徵布), 황구첨정(黃口簽丁)- 가 허다했다고 한다. 물론 이 때 양반들은 세금이 면제되거나 담세 능력에 비해 매우 적은 세금을 부과 받았다. (법에는 16살부터 60살까지 평민 남자에게만 군역을 부과하여 역을 담당하거나 군포를 내도록 했고, 한 집에 두 사람을 한꺼번에 군역을 부과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나 법이 지켜지지 않았다)

  

양반이 되면 병역의무도 군포 납부의무도 없어지는 등 각종 특권이 생기니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양반이 되려고 하였다. 역사학자 이덕일의 조사에 따르면 족보가 비교적 잘 남아있는 대구 지역의 경우 1690년(숙종)에는 양반이 9.2%, 양민이 53.7%, 노비가 37.1%였다. 약 100년 뒤인 1783년(정조)에는 양반이 37.5%, 양민은 57.5%, 노비는 5.0%로 되었다. 그 70년 뒤인 1858년(철종)에는 양반이 70.3%, 양민이 28.2%, 노비는 1.5%로 줄었다. (이덕일, 성공한 개혁 실패한 개혁, 마리서사,2005) 조선 말기에는 양반이 80~90%이상이 되었다고 한다. 조선의 양반과 일본의 영주, 사무라이, 유럽의 귀족들의 두드러진 차이는 조선의 양반계급은 병역, 납세 의무도 없고 특권만 있었는데 반해, 일본과 유럽은 최소한 공동체를 지키는 의무는 있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조선은 재산권(소유권)이 뚜렷하지 않아 양민이 힘써 얻은 재화를 지방 관리와 유력 양반 집안이 약탈해 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이러니 문전옥답을 팔든, 딸자식을 팔든 기를 쓰고 양반 족보를 사서 양반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안 되면 자신과 처와 자식 등 한 가족을 양반가에 통째로 팔아서-기록에 따르면 18세기 말 4~6인 가족의 몸값이 소 한 마리 값이었다고 한다- 병역, 납세의 의무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한다.


조선의 지배층은 양반이 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회구조를 혁파하지 않고, 다시 말해 양반의 특권과 특혜를 폐지하지도, 권리와 혜택에 상응하는 의무와 부담도 지우지도 않고 양반을 변칙적으로 보편화시키는 방식을 취했다. 그것이 양반 증명서를 갖고 있거나 발급하는 기존 양반들과 왕실에 일시적 이익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남아있는 양인(평민)들의 부담은 점점 가중될 수밖에 없다. 이 악순환의 끝에서 터져 나온 단말마가 바로 哀絶陽(애절양)이며, 그 최종적인 귀결은 조선왕조의 멸망이다. 왕조가 망한지 10년이 안되어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입헌군주국도 아닌 ‘민주공화국’을 헌법 제1조에 명시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독립운동 시기에 근왕주의 세력이 거의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제는 조선이 양반 문제를 해결한 방식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는데 있다. 대기업. 공기업, 전문직(자격증), 공무원(고시, 공시합격자), 좋은 대학, 해외 학위 등의 과도한 특권, 특혜를 조정하지 않으니, 아니 그런 것을 확보하지 않으면 사람대접 받으며 살기가 힘드니, 소득의 증가, 대학 입학 정원의 확충, 해외 유학(송금) 자율화 등에 따라 양반되기 경쟁(地代=rent 추구 경쟁)이 널리 확산되어 버린 것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진학률과 고시, 공시, 유학열풍, 정규직화 투쟁 등은 본질적으로 문전옥답 팔고, 딸자식 팔아서 양반이 되려는 시도의 재판이라고 보아야 한다. 

 

 

나는 한국의 자칭 자유주의자, 시장주의자들이 반미. 친북. 좌파를 욕하는 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재벌. 대기업, 조중동의 불공정거래를 욕하는 소리는 듣지 못하였다. MB정부의 반시장적 반자유주의적 행보를 욕하는 소리도 듣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는 뉴라이트는 뉴반공주의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한국의 자칭 진보주의자, 좌파들이 부동산 투기와 고용 불안을 탓하고, 국가의 무책임성과 공동체의 붕괴를 한탄하는 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좌우 이익집단에 의해, 또 이들에게 포섭된 무능한 국가에 의해 황폐화된 가치생산 생태계를 한탄하는 소리는 듣지 못하였다. 과잉시장(경쟁)을 성토하는 소리는 귀가 아프게 들었지만 자신의 기득권을 보장하는 과소시장(경쟁)을 성토하는 소리는 듣지 못하였다. 보수와 진보를 초월하여, 정부 발주 용역 사업 수주 조건에 들어있는 정교수, 부교수, 조교수 몇 명이라는 철지난 규정으로 인해, 실력은 있지만 곤궁한 시간강사, 박사들이 소작인처럼 착취당하는 현실을 시정하려는 움직임도 보지 못하였다. 지식인 사회의 계급 사회적 요소 내지 철지난 경제적 지대를 혁파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지식인들도 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X 끊는 사회를 만든 책임은 약간 적을 지라도, X 끊는 사회의 마지막 수혜자이자, X 끊는 사회를 혁파할 역사적 책임이 있는 386세대의 자기반성의 목소리도 듣지 못하였다. 대선, 총선, 보궐선거 같은 장이 서면, 어디서 뭐하다 나왔는지, 공천이 곧 당선인 지역에 공천을 받겠다고 길게 늘어선 참신한(?) 애국(?) 지사들은 넘치지만, 정치적 독과점 체제를 뚫고 제대로 된 정치를 하려고 정도를 걷는 정치인은 거의 보지 못하였다. 자유, 시장, 민주, 진보, 공화, 공동체, 복지를 얘기하는 사람들은 넘치지만 모든 것의 기초인 공정과 공평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얘기하는 사람도 보지 못하였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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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사회디자인연구소가 운영하는 홈페이지 좋은정치포럼(http://www.goodpol.net)에서매주연재되고 있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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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표는 한국, 미국, 일본의 제조업 부문의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영업이익률을 비교한 표이다. 대기업만 보면, 2002년 이후부터는 한국이 대략 8%대로 가장 높고, 미국이 6%대로 그 다음, 일본은 4~5% 대로 가장 낮다.


<표 1>한국, 미국, 일본의 제조업 대기업 영업이익률 추이


그러나 중소기업만 놓고 보면 2005년 현재 미국이 6%로 가장 높고, 그 다음이 한국(4.3%), 일본(2.7%) 순이다. 문제는 한국은 이익률이 경향적으로 하락하고 있다는데 심각성이 있다.


<표 2>한국, 미국, 일본의 제조업 중소기업 영업이익률 추이


문제는 한국의 경우, 미국, 일본과 달리 이 격차가 경향적으로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양극화 현상은 여기서도 일어나고 있다.


<표 3>한국, 미국, 일본의 제조업 대기업과 중소기업 영업이익률 격차 추이 단위( %p)


** 이 통계는 산업연구원이 발간하는 ‘e-kiet 제331호’(2007. 3. 13)로부터 재인용하였다. 중소기업 분류 기준은 나라 별로 상이한데, 한국은 상시종업원 300인 미만 사업체를, 일본 은 자본금 1억엔 이하 업체를, 미국은 총자산 2,500만 달러 이하 업체를 지칭한다. 한국의 중소기업 관련 자료는 중소기업중앙회의 ‘중소기업경영지표’(중소기업)를, 대기업 관련 자료는 한국은행의 ‘기업경영분석’자료를 이용하였고, 일본은 ‘법인기업통계’를, 미국은 ‘Census Bureau’를 이용하였다.


매출액 대비 영업이익률만 놓고 보면 한국의 (300인 이상) 대기업은 종업원에 대한 처우 개선 여력이 더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과연 이것은 정당한가? 전체 노동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2006 년 8월 현재, 300인 이상 사업체 정규직은 총 147만 명으로 전체 근로자수 1,535만 명의 9.6%이며 총 취업자 2,343만 명의 6.3%이다. 300인 이상 사업체에 종사하는 비정규직(임시, 일용직)은 37만4천명인데 이들의 처우는 기업 경영 성과와도, 노조의 투쟁 성과와도 그리 긴밀하게 연동되어 있지 않다.


2006 년 현재 한국의 노동조합원 수는 대략 156만 명으로전체 임금근로자의 10%수준이다. 이는 1987년 이래 조직률이 가장 높았던 1989년의 20%의 절반 수준으로총취업자 기준으로 보면 (임금근로자 비중이 총 취업자의 66.4%이기에) 6 ~ 7%에 불과하다. 이는 노동조합 조직률이 매우 낮다고 알려진 미국(조직률 13%, 임노동자 비율 92.5%)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다. 단체 협약도 한국과 미국은 조직률만큼만 적용되기에 조직노동의 처우는 높고, 미조직 노동의 처우는 낮은 편이다. 미국은 한국만큼 개인주의가 강하고 사회적 연대성이 취약하지만, 한국과 달리 고용, 임금 수준은 시장원리를 상당 정도 따르는 편이다. 따라서 미국은 기업 규모나 수익성에 따른 고용, 임금 수준의 격차가 다른 선진국 보다는 크지만, 한국 보다는 작은 편이다. 하지만 한국은 사회적 연대성도 취약한데다가, 조직 노동에게는 시장원리가 별로 작동하지 않는다. 프랑스의 경우 노조 조직률은 한국과 비슷한 수준이지만 협약적용률은 90%가 된다. 이는 프랑스의 힘 있는 조직노동이 전체 노동자와 기업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의 협약을 주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 프랑스의 전반적인 임금격차는 한국 노동의 입장에서 보면 놀라울 정도로 작다. 노동시간도 짧고,1인당 평균 소득을 감안하면괜찮은 직장, 직업(대기업, 공공부문, 전문직 등)의 임금 수준 자체가 한국보다 많이낮다.거의 북유럽 사민주의 국가 수준이다. 하지만 한국은 대기업, 공기업 중심의 조직노동은 기업의 수익성이 허용하는 자신의 노동의 양, 질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격)수준에 상관없이 끝없이 처우를 올린다. 노동시간 단축은 바라지만 임금 저하는 결사 반대한다. 고용 유연성이나 성과 직무급은 결사 반대한다. 당연히 조직노동의 관심사및 요구 수준과대다수 미조직 노동, (청년)실업자, 영세자영업자의그것은 너무나 다른다.한국 조직노동은 그들 만의 이해와 요구를 쫒아서 그들 만의 길을갈뿐이다. 한국의 노사분규 원인별 상세내역을 보아도 노동자 입장에서는 공세적인 투쟁인 단체협약 관련 분규가 1999년에 44.9%, 2001년에 63.4%, 2003년에 77.8%, 2005년에 82.2%로 늘어났다.




그 결과 한국의 임금 수준을 좌우하는 가장 큰 변수는 사업체 규모와 노조의 힘이 되었다.

단 적으로 2008년 5월 27일 발표된 노동부 ‘사업체 근로실태 조사’(43만 9천명 대상 표본 조사) 결과에 따르면, (같은 사업장의 나이, 학력, 근속년수 등이 같은 조건인 노동자 집단을 비교했을 때) 300인 이상 대기업에서 정규직은 비정규직에 비해 시간당 임금총액이 31.8%가 높았고, 300인 미만에서는 12.2%가 높았다. 노조가 있는 기업에서는 정규직이 비정규직에 비해 32.6%가 높았고, 무노조 기업에서는 9.5%가 높았다. 규모 효과와 노조 효과는 거의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임 금을 포함한 직간접적 노동비용을 집계한, 월간 총 노동비용 조사에 따르면 10~29인 규모의 제조업의 월평균 노동비용은 263만 6천원이었으나, 300인 이상은 378만 3천원, 1,000인 이상은 541만 1천원으로 10~29인 규모의 205%이다. 1~9인 사업체 종사자(이들은 566만 명으로 임금근로자 1,535만 명의 37%이다)를 기준으로 하면 제조업에서 기업 규모별 격차는 이보다 훨씬 클 것이다.


일본은 동일한 통계는 없으나 학력별, 기업 규모별 초임을 조사한 통계는 있다. 日本經團聯이 2007年 9月 3日 발표한 “新規學卒者決定初任給調査” 에 따르면, 일본의 경우 전반적으로 기업규모별 초임 차이가 거의 없지만, 다소나마 100인 미만 기업의 초임이 높게 나타난다. 이는 소기업의 태생적 불안정성에 대한 보상이기에 보다 합리적인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은 기업 규모에 따른 격차가 크게 나타난다.

선 진국의 경우, 특히 북유럽 사민주의 국가의 경우는 ‘동일노동-동일임금’에 대한 암묵적 합의가 있어서 노동의 양, 질이 비슷하면 임금 수준이 그렇게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 노동자들이 보기에는 놀라울 정도로 연공, 직무, 업종, 기업수익성에 따른 임금 격차가 적다. OECD 교육지표가 보여준 교사들의 임금 수준이 단적인 예다. 그러나 한국은 자본의 이익이 허용하고, 노조의 힘이 허용하는 한 끝없이 올라간다. 그것도 성과, 직무와 상관없이 올라간다.


사 실 마르크스주의에서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력을 재생산하는데 들어가는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이다. 따라서 애초부터 개별 기업의 이익이나 노동의 소속과 관련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의 양, 질이 같으면 원칙적으로 같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북유럽 사민주의의 임금관은 마르크스주의의 임금관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임금 체계는 마르크스주의적 사고방식과도 무관하고, 한계생산력설을 채택한 주류 경제학의 임금관과도 무관하다. 1990년을 전후한 시기만 하더라도 한국 노동운동계에서는 자본의 적자타령=지불능력설에 대한 유력한 대항논리가 바로 마르크스주의적 임금관이었다. 임금 교섭현장에서는 ‘회사가 적자라서 임금을 충분히 올려줄 수 없다’는 논리를 피는 자본가에게, ‘당신은 돈이 없다고 1000원짜리 쌀을 500원에 달라고 하는 사람’으로 몰아붙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 한국 대기업, 공기업 노조는 오히려 지불능력설에 기대어 끊임없는 처우개선을 요구한다. 이들에게는 마르크스주의의 합리적 핵심 중의 하나인 노동의 연대성이 무엇인지, 지속가능한 고용 창출과 안정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은 온데 간데없다. 무엇보다도 대기업, 공기업의 높은 이익 자체가 허술한 공정거래법을 활용하여, 분업과 협업의 발달에 따라 형성된 전후방 가치생산 사슬=하청, 협력업체에 대한 약탈의 산물인 측면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는다. (이는 다음 기회에 상세하게 말할 것이다)


어 쨌든 현재 한국과 같은 고용, 임금 체계에서는 작고 누추한 곳에서 열심히 창의적으로 일해서 크고 넉넉한 회사로, 임시. 일용 허드레 일꾼에서 정규 핵심(지식)노동자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없다. 따라서 자회사 정규직 취업 약속을 거부하고, 신자유주의 반대의 기치를 내걸고 몇 년에 걸쳐 ‘직접 고용 요구 투쟁’을 하는 KTX 여승무원들이 모범이다. 몇 년째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여 한방에 팔자를 고치려는 청년들이 모범이다.


한 국과 같은 고용, 임금 체계에서는 한번 좋은 ‘소속’을 획득하여 팔자를 고친 사람들은 이제 그곳의 귀신이 되어야 한다. 그 곳을 나오면 자신의 노력, 능력으로 비슷한 처우를 받을 곳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그 많은 대우자동차 정리해고자(1,752명) 중에서 몇 년의 해고기간 동안 대우자동차 보다 더 좋은 직장을 구한 사람은 거의 없다. 대기업, 공기업의 조직노동이 누리는 근로조건과 그 밖의 노동의 근로조건의 격차가 클수록, 한마디로 안과 밖의 격차가 클수록 안과 밖의 순환은 어렵다. 안은 귀족 아닌 귀족이 되고, 밖은 천민 아닌 천민이 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유사시 구조조정도 어렵다. 대기업, 공기업에서 구조조정 당하는 노동자는 몇 년에 걸쳐 정문 앞 농성을 할 이유가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우자동차, 현대자동차, KTX 같은 '좋은 곳'의 고용확대는 어렵다. 꼭 필요하면 임시. 일용직을 뽑거나 외주화 시켜야 한다. 선진국에 비해 한국의 대기업 종사자 비율이 유달리 낮고, 대기업 생산직 평균연령은 높고, 외주하청 공정이 많고,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비정규직 비중이 유달리 높은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한 국의 대기업, 공기업의 조직노동은 그 처우, 행태, 이념이 대단히 특이한 존재이다.한마디로 세계적인 기형이다. 한국 조직노동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는 ‘고용안정’과 ‘공공부문 유지=민영화반대’이다. 이것이 기득권을 지키는 확실한 방안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최대의 적은 ‘고용임금 유연화, 성과/직무(실력) 중심 임금체계, 민영화, 공급자 간의 경쟁 강화(소비자의 선택권, 심판권 강화)’ 등으로 상징되는 자유주의/시장주의 정책이다. 이들은 이를 신자유주의라며 극력 반대한다. 한편 대기업, 공기업 조직노동과 공공부문은 안정된 고용과 높은 임금, 퇴직금(퇴직금 누진제 포함), 자녀학비 지원, 주택 관련 저리 융자, 각종 재해보험 등을 통해 각종 ‘생애 위험’을 사업체 내에서 해소해 버리기에 국가차원의 보편적 복지제도 확충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사실 한국에서는 국가차원의 보편적 복지제도는 설사 구축한다고 해도 이들 고임금 노동자들에게는 ‘코끼리 비스킷’이나 다름없다. 뿐만 아니라 국민건강보험과 국민연금에서 보듯이 대체로 불입한 돈에 비해 혜택이 적을 수밖에 없다. 사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 조직노동의 처우가 이렇게 까지 월등하지 않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국가차원의 보편적 복지제도 확충에 소극적일 정도로 처우가 월등해져 버렸다. 전통적으로 한국 진보의 주력 부대인 조직노동의 거대한 에너지가 국가차원의 보편적 복지제도 구축으로 향하기보다는, 고용안정, 유연화 반대, 민영화 반대, (공급자간)경쟁 반대, 신자유주의 반대로 향하게 된 것은 한국 특유의 조직노동의 물질적 이해관계와 사상이념적 영향력을 빼놓고서 설명할 수가 없다.


길 게 조직노동을 비판한 것은, 한국의 다른 정치사회 세력들은 괜찮은데 유독 대기업, 공기업 조직노동만이 문제라서가 아니다. 대기업, 공기업 조직노동도 재정 약탈에 앞 다투어 나서는 지방토호들과 토건족만큼 문제라는 것이다. 허술한 공정거래법과 상법을 활용하여 하청 중소기업과 소액주주 약탈에 나서는 재벌, 대기업들처럼, 학생과 학부모의 선택권과 심판권을 제약하여 결과적으로 후진 품질의 교육서비스로 소비자를 약탈하는 사학재단과 교육기득권자처럼, 이를 방관하거나 대변하거나 결탁하는 무능하고 사악한 정치인과 관료처럼 조직노동도 심각한 중병에 걸려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수 국민들로부터 집권가능한 진보 정치세력으로인정받으려면 이들 보수와 진보의 기득권자들의 이해와 요구를 단호하게 뿌리치고, 총 취업자의 90%와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을 원하는 청년세대, 미래세대, 지식근로자, 벤처중소기업의 이해와 요구를 확고한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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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중년하플링 :
아고라에 'SDE' 님의 글입니다. 제목이 글 내용을 말해주는..  요즘 아고라 경제방을 자주 보고 있는데.. 처음에는 '미네르바'님의 글에 반해서 자주 들리기 시작했는데, 정작 'SDE' 님 같은 분이 계시군요. 거의 경제학 쪽 학위자 같은데.. 최근의 위기를 풀어 설명하는 능력이 '미네르바'님에 비해서 훨씬 낫네요. 

'미네르바' 님의 글은 화끈하고.. 정확한 예측을 하기는 했지만, 그 뒤로에서 돌아가는 메카니즘을 옅보기에는 좀 설명이 부족했던 부분이 있죠. 이에반해 'SDE'님의 글은 정말로 내공이 높은 고수의 풀어 쓴 글이랄까.. 그런데도 아고라에서 인기는 높지 않은듯 싶은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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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동 가치설

 - 노동 가치설 그 자체는 아담 스미스에 의해 탄생되어 리카르도에 의해 거의 완성된 것으로서 실은 고전 경제학 사상 최고/최대의 업적이며 이로서,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탄생 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한 것임.

 

- 마르크스의 노동 가치설은 고전 경제학에서 논하는 노동 가치설을 거의 그대로 승계한 것임.

 

-아담스미스/리카르도의 노동 가치설과 마르크스의 노동 가치설의 차이는 똑 같은 노동 가치설을 통해 고전 경제학은 어떻게 한 국가의부가 창조 되는 가를 논한 것이며(자본가적 시각), 마르크스는 노동자의 노동이 어떻게 자본가에게 착취 되는 가를 논한것(노동자적 시각)

 

-마르크스나 고전 경제학이나 "가치" 는 오직 "인간의 창조적인 사회적 노동" 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밝힌 점에서 노동가치설을 중심으로 고전경제학과 마르크스 경제학을 구분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

 

- 가치는 오직 인간의 노동에 의해서만 창조된다는 것이 "경제학 적 시각" 임.

- 노동가치설을 부정하는 것은 경제학 자체에 대한 부정이며 실은 경제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논하는 것임. (예를 들어 반공사상 자체...)

 

2. 공황론

- 마르크스의 최대 업적은 "이윤율 경향적 저하"로 알려진 자본주의의 공황 메카니즘을 밝힌 것.

- 간단히 말하면 자본가는 노동자의 임금을 줄이려 하고 새로운 기계를 사들여 자동화율을 높임으로서 이익을 극대화 하려 하나 이것은 결국 가치를 만드는 노동의 양을 줄이기 때문에 이윤율이 떨어져 공황이 온다는  이론.

 

- 얼핏 보아 말이 안된다고 생각되지만, 실제로 자본주의 역사상 거의 모든 형태의 산업 공황은 마르크스의 공황론과 같은 과잉생산 공황으로 발생함.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만일, 궁극의 생산기계가 만들어져 노동자 한 명도 쓰지 않고 상품을 만들 수 있다면 과연 자본가는 엄청난 수익을 얻을 수 있을까?

 답) 똑같은 상품만 생산했기 때문에 아무리 가격이 싸도 소비자들은 궁극의 생산기계에서 만들어진 상품을 외면하여 나중에는 하나도 팔리지 않게 되어 자본가는 망하게 됨.

   --- 반례) 그렇다면 궁극의 생산기계에 다른 디자인이나 다른 기능을 가진 제품을 만들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바꾸면 될 것 아닌가?

         답) 맞음, 소비자들의 기호를 맞추기 위해 다른 디자인, 다른 기능을 가진 제품을 만들기 위한 프로그램을 계속 바꾸어 주어야함. 그런데 디자인과 기능을 생각하고 프로그램을 짜는 사람들은 노동자 아닌가?  고로, 기존의 단순 노동자 보다 훨씬 지식집약적인 노동자를 사용해야 하므로 실은 임금이 더 올라가고 더 많이 들어가게 됨.

               즉, 자본가가 이익을 더욱 취하기 위해서는 기계화 보다 창조적인 인간의 노동을 더 많이 이용해야 함. 이것이 노동 가치론임.

 

 - 마르크스 공황론이 실제로 일어났던 실례

   --- 거의 완벽하게 들어 맞은  경우가 대구의 섬유산업임. 대구는 중국의 섬유산업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에서 워터제트라는 최첨단방직기를 앞다투어 도입했음.  1 Km의 섬유를 생산하는데 단 3명의 노동자만 있으면 되었음. 워터제트 도입으로 한국은 중국보다노동생산성 면에서 중국을 압도할 정도 였음.

        --- 결과) 워터제트 도입한 기업들은 전부 망했음.중국보다 싸게 섬유를 생산할 수는 있는데, 문제는 패션산업의 특성상, 워터제트를 돌릴 수 있을 만큼 섬유를 대량 주문 하는경우가 없었음. 전부 소량 다품종을 요구하다 보니 한국 섬유 업계는 손해 감수하고 워터제트를 돌렸음. 결국 다 망했음 (워터제트도입할 돈 없는 영세기업만 살아남았음)

 

  --- 한국의 IMF 금융공황도 마르크스 이론에 완전히 정합한 실례임.

  --- 미국의 1929년 대공황도 과잉생산공황이라는 점에서 마르크스 이론이 정확히 들어 맞은 경우

 

3. 마르크스 주의 경제학의 한계

- 실은 마르크스 주의자도 마르크스 주의 경제학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다는 것이 한계임

 -- 쉽게 말해 너무 많은 사람들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오해하고 있음

 -- 대표적으로 좌파 경제학자들 중에 공황의 원인을 과소소비공황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실은 마르크스 경제학과는 관계가 없으며 실은 마르크스 주의 경제학을 부정하는 것임.

 

-마르크스주의 공황론은 매우 긴 장기 평균을 가정하여야 하며 (최소 25년 이상), 중간 정도의 자본 발전 (즉, 지식 집약적자본이 채 발전되지 않은 정도), 중간 정도의 자본 규모 (대규모 집적된 자본의 경우가 아님 -> 이 경우는 후에금융자본론(힐퍼딩), 제국주의론(레닌) 등에 의해 논해졌음)에서 "산업 부분의 공황" 설명에 정합성을 가진 이론임.

 

- 즉, 국가 경제의 기술 경쟁력이 선진국 보다 떨어지며

   국가 경제의 규모가 선진국 보다 떨어지며

   경제 발전의 역사가 채 50년이 되지 않는 국가에 아주 잘 정합하는 이론임.

   (즉, 한국의 IMF 금융공황, 남미의 공황 등을 설명하기에 좋은 이론임)

 

- 고로, 산업혁명이 늦은 러시아에서 먼저 사회주의 혁명이 발생한 것도 실은 당연한 것임.

 

 

Posted by 중년하플링 :
16-18세기 유럽경제의 발전과 세계체제

1. 16-18세기의 유럽경제와 자본주의

유럽 경제발전의 흐름


16세기는 유럽 경제가 오랜 침체를 겪고 나서 다시 활기를 되찾은 시기이다. 1340년대에 유럽을 휩쓴 흑사병은 유럽사회에 치명적인타격을 가했다. 남유럽에서 시작되어 이탈리아, 스페인, 잉글랜드, 프랑스, 독일, 스캔디나비아, 러시아로 번져 나가며 유럽인구의 약 1/3 정도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흑사병이 이렇게 무서운 결과를 낳은 것은 당시로서는 병을치료할 적절한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인들의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도 하나의 이유이다. 인구가 급증함에 따라식량이 부족해졌고 따라서 병에 대한 저항력이 약해졌던 것이다.

유럽경제는 중세의 오랜 침체 끝에 11세기부터 되살아난다. 그래서 인구가 증가하고 광범한 개간 사업이 이루어지며 농업도 발전한다. 또 원거리를 잇는 상업이나 수공업도 발달한다.

그래서 13세기까지 중세 후기의 번영을 이루나 14세기에 들어서며 사정이 달라졌다. 1000년경에 약 3000만이었던 유럽인구가 1340년경에 약 7,400만이 될 정도로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당시의 농업 생산성이라는 것이 밀 한 알을 심으면겨우 3-4알을 수확할 정도로 낮았으니 급격히 늘어난 인구를 충분히 먹여 살리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페스트가퍼지자 막대한 피해를 낸 것이다.
▲ 흑사병의 확산

▲ 11세기 이전에는 밀 한 알을 심으면 2알 밖에 수확하지 못할 정도로 농업생산력이 낮았다. 11세기 이후에야 3-4알 정도로 늘어났다.

인구가 줄어들자 많은 농경지가 버려져 다시 숲으로 되돌아갔고 상업이나 수공업도 쇠퇴했으며 도시도 위축되었다. 결과적으로 유럽경제는 거의 파멸적 상태에 빠졌다.

큰 전쟁이나 전염병이 돌아 인구가 많이 줄어든 다음 그것이 다시 원상태로 회복되는 데는 보통 약 200년의 기간이 소요된다.그러니 16세기에 들어서서야 유럽경제가 겨우 다시 회복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인구가 늘어나며 식량 증산을 위해 다시 숲이나늪지의 개간이 널리 이루어졌다. 또 수공업이나 상업도 점차 활기를 띠게 되었다.

나라마다 다르기는 하지만유럽경제는 대체로 17세기에 잠시 침체기를 겪었다가 18세기에 와서 다시 성장을 계속하게 된다. 특히 18세기 말 이후의산업혁명을 겪으며 경제발전의 속도가 더 빨라졌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된다.

유럽 문명의 산물인 근대 자본주의

서양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발전을 서양 근대문명의 본질적인 하나의 구성요소로 생각한다. 자본주의를 유럽문명이 만들어낸 독특한산물로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기초가 마련된 16세기 이후의 유럽경제 발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맑스나 베버 같은 19세기 대학자들의 전 생애에 걸친 지적 노력은 자본주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토인비(A.Toynbee)나 폴라니(K.Polani), 브로델(F.Braudel) 같은 20세기 서양의 유명한 역사가들의 경우도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자본주의가 정신적이건 물질적이건 여러 이유로 오직 근대 유럽에서만 발전할 수 있었고 그것이 전 세계로 확산되며 오늘날 전 지구가 하나의 경제체제 안에 포섭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지구상의 모든 지역이 하나의 경제적 틀(체제)에 묶여 있다는 생각은 19세기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보다정교한 이론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1970년대 이후이다. 미국학자인 이매뉴얼 월러스틴(I.Wallerstein)이 16세기 이후세계 경제의 발전을 '세계체제' 라는 개념을 가지고 설명한 데서 비롯했다.
▲ 이매뉴얼 월러스틴 (Immanuel Maurice Wallerstein, 1930~ )

이 개념은 만들어진 지 오래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역사학이나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많은 연구자들이 사용할 정도로일반화되었다. 월러스틴이 그것을 갖고 오늘날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에서 나타나는 경제적인 지배-예속 관계를 역사 과정 속에서 잘설명하고 있으며 또 그것이 상당한 설득력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을 통해 16-18세기의 유럽과비유럽 경제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다.

2.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

세계체제론이란 무엇인가

월러스틴이 유명해진 것은 1974년에 제1권이 나왔고 그 후 80년대까지 모두 3권이 출간된 <근대 세계-체제(Modern World-System)>라는 책 때문이다. 이 책은 16-18세기 사이 세계 경제의 발전을 다루고 있는데나오자마자 근대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새로운 틀을 제공했다는 높은 평가와 함께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 월러스틴이 쓴 근대 세계-체제 제 2권 (1980)

그는 원래 아프리카를 연구한 사회학자로 종속이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종속이론이란 50, 60년대에 맑시즘의 영향을 받아라틴아메리카에서 발전한 이론으로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의 구조적인 지배-예속 관계를 밝히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길을 모색하려 한이론이다.

그러므로 그가 아프리카를 연구한 것도 아프리카를 통해 20세기 후반에 있어 선진국과 제3세계 사이의 불평등하고 부정의한 관계를 폭로하려는 목적에서였다. 이 점에서 그는 매우 진보적인 성향을 갖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연구를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세계의 역사로 확대했다. 오늘날 제3세계의 종속이 16세기에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450-1640년 시기(그는 이 시기를 '긴 16세기'라고 부른다)에 서유럽은자본주의의 기초를 처음 확립했고 그러면서 짧은 기간 내에 전 세계의 많은 지역들을 예속시켰다는 것이다.

이렇게세계가 하나의 경제의 틀로 묶인 것을 그는 세계-체제라고 부른다. 물론 그 중심부에 있는 것은 당연히 서유럽이다. 그 주위에반주변부, 또 그 바깥으로는 주변부가 둘러싸고 있으며 중심부와 반주변부 · 주변부 사이에는 착취와 예속관계가 만들어진다. 오늘날제 3세계의 빈곤은 이 지역이 바로 수백 년 동안 중심부의 착취를 받아온 주변부이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서유럽은 500년 전부터 지구상의 다른 어느 곳보다 경제적으로 우월한 상태에 있었고 지금도 그런 상태에 있다. 따라서 제3세계가 이런 강고한 예속관계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을 접하는 제3세계 사람들이 신선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무엇인가 답답한 심정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이는 그의 이론이 해방적인 성격을 갖고 있으면서도 한 편에서 서양의 우월을 역사적인 면에서 고정된 구조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월러스틴의 이론은 상당한 정도로 유럽중심주의적인 시각 위에 서 있는 것으로 근대 세계경제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여준다고할 수는 없다. 유럽 경제에 대한 설명도 그렇고 아시아 경제에 대한 평가에도 문제가 많다. 따라서 요즈음 특히 근대 초 아시아경제가 재평가되며 반박을 받고 있다. 그러면 월러스틴의 이론을 간단히 살펴보자.

세계-체제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가 사용하는 세계-체제라는 용어는 약간 설명이 필요하다. 그것에 세계라는 표현이 들어가기는 하나 전 세계를 모두 의미하는 것은아니다. 단지 한 국가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광역 경제를 의미한다. 즉 일정 지역에서 독립적인 여러 국가들이 무역으로 긴밀하게연결되는 경제체제를 말한다.

그래서 이 경우 그는 꼭 중간에 하이픈을 넣어 '세계-체제'라고 쓰고 그렇지않고 전 세계를 포괄하는 체제를 하이픈 없는 '세계체제'로 구분해서 쓴다. 16-18세기는 전 세계가 하나의 경제체제로 묶이기이전이니 당연히 세계-체제라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

그는 '긴 16세기'에 유럽에서 최초로 자본주의적세계-체제가 발전했다고 주장하는데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15세기 말에 봉건경제의 위기로 어려움에 처한 유럽이문제의 해결을 외부로의 팽창과 상업팽창에서 찾았고 거기에서 성공했기 때문이다. 즉 아메리카로의 진출, 아시아 무역, 유럽 내부무역의 증대가 그 결과이다.
그리하여 지역적인 노동 분업과 국가 사이의 힘의 차이에 의해 부등가 교환(부등가 교환이란 여러 조건에 의해 다른 노동량이 투입되는 상품이 같은 가격으로 교환됨에 따라 나타나는 불평등한 교환을 말한다.기술이나 자본의 차이, 국가의 힘의 차이가 그것을 가져온다. 바나나 한 트럭분과 대형 디지털 TV 한 대가 같은 가격에 팔릴 때바나나 생산에 훨씬 많은 인간의 노동력이 들어 갈 것은 뻔하다. 이 경우 기술과 자본의 차이에 따라 노동력의 부등가교환이나타나고 그에 따라 부가가치가 낮은 상품을 생산하는 지역이 착취를 당하게 된다. 또 힘이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에 대해보호관세를 물리지 못하게 할 때에도 마찬가지 일이 나타난다)이 이루어지는 체제가 한 세기라는 짧은 동안에 만들어졌다. 그 결과 중심부, 주변부, 반주변부의 삼중적 시스템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 오늘날의 중심부, 주변부, 반주변부를 나타내는 지도 (황토색이 중심부, 살구색이 반주변부, 연노랑색이 주변부이다)

즉 네덜란드와 잉글랜드, 북 프랑스에서는 강력한 국가와 가장 이익이 남는 경제활동과 가장 효과적인 노동방식이 자리 잡았다. 따라서 다른 지역들로부터 계속적으로 경제적 이익을 거두어들임으로써 우월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반면 라틴 아메리카, 동유럽, 지중해 주변의 많은 지역으로 구성되는 주변부에서는 노예제나 농노제에 의해 비효율적이지만 싸게생산되는 곡물, 귀금속, 원자재를 공급함으로써 중심부가 이익이 나는 활동에 특화하고 주변부를 가차 없이 수탈하도록 허용한다.

반주변부는 서, 남유럽의 남은 지역과 중유럽, 영국령 북아메리카로 정치구조나 경제활동, 노동지배 양식에서 그 중간적인 형태이다.

따라서 세 지역에서는 경제활동이나 노동 형태가 다 다르게 나타난다. 중심부에서는 공업과 특화된 농업이 이루어지나 주변부에서는특용작물의 단일 경작이 나타난다. 이것은 면화나 설탕, 커피, 고무 등 원자재로 중심부에 팔기 위한 작물들이다. 또 여러광산물들도 이에 포함된다. 또 중심부에서는 숙련공의 임금노동과 자본주의적 차지농(借地農)이 나타나나 주변부에서는 노예제도나강제노동이 나타난다.
서인도 제도의 플랜테이션에서 커피 생산을 위해 혹사당하는 아프리카 노예들

이 세 지역이 세계-체제로부터 받는 혜택도 각각 다르다. 주변부나 반주변부로부터 중심부로 이익이 흘러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리고이것을 도와주는 것이 중심부 국가들의 강력한 힘이다. 군사력을 포함한 이 중심부 국가의 권력을 월러스틴은 헤게모니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서유럽을 중심부로 16-18세기에 확립된 자본주의적 세계-체제는 1750년 이후의 산업혁명과 19세기의 제국주의 시대를거치며 확대되어 19세기 말에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전 세계를 포괄하는 말 그대로의 '세계체제'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는 기본적으로 수요와 공급을 일치시킬 수 없으므로 약 50년을 주기로 팽창과 정체를 되풀이하는 경기변동을 맞게 된다. 그런 과정을 통해 경제가 재정비되며 더 효율적인 자원 분배를 가능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자본주의 체제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노동력이 프롤레타리아화하여 노동력을 착취할 수 있는 데까지착취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자본가들이 더 이상 이윤을 낼 수 없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는 붕괴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해사회주의 세계질서로 이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좀 어렵긴 하나 이것이 그의 이론의 대체적인 틀이다.

3. 유럽의 자본주의는 어떻게 발전했는가

유럽과 중국의 차이


그러면 유럽에서 자본주의는 어떻게 발전할 수 있었을까? 월러스틴은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했고 중국에서 그것이 불가능했던 이유를 두 지역을 대비시키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3-16세기에 유럽과 중국은 비슷한 인구수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하기가 좋다. 15세기에 인구, 면적, 기술 수준(농업이나 항해술)에서 큰 차이는 없으며 가치 체계의 차이도 과장되어서는 안 된다.

유럽에서는 로마의 세계제국이 해체되어 혼란이 계속되었으나 중국에서는 제국이 그럭저럭 유지되었다. 지방분권적인 봉건제와중앙집권적인 관료제의 차이 때문이다. 그래서 보다 안정되어 있던 중국에서는 천여 년에 걸쳐 유럽에서보다 농민착취가 적었고유럽보다 더 발전된 경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농업경영면에서 유럽인들은 목축과 밀의 경작으로 나아갔고중국인들은 노동집약적인 쌀 경작으로 나아갔다. 중국은 땅보다 인력이 더 필요했던 반면 유럽에게는 더 많은 땅이 필요했다. 그것이유럽인들에게 외부로 팽창하려는 욕구가 더 컸던 이유이다.

중국은 거대한 관료기구를 가지고 있었고, 화폐경제와기술면에서도 좀 더 앞서 있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경제로 발전하는 데 더 유리했다. 그러나 거대한 제국을 유지해야 하는 부담이매우 커서 그것이 발전을 막았다. 즉 정치적 요소가 자본주의의 발전에는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1450년에 유럽에는 자본주의적 세계경제를 위한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지만 중국은 물론 다른 어느 곳에서도 그런 가능성은 없었다.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한 반면 중국이 정체상태에 빠진 것은 이 이유 때문이다.

위에서 복잡한 이야기를 피하느라고 빼 놓았지만 월러스틴은 세계-체제를 세계-경제와 세계-제국으로 구분한다. 광역 경제 안에 여러국가들이 포섭되어 있는 경우가 세계-경제이고 광역 경제를 하나의 정치체가 지배하고 있을 때 그것을 세계-제국이라고 부른다.세계-경제는 보통 1세기도 연명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경우가 많으나 한 국가가 그 전체를 지배할 수 있게 되면 세계-제국으로바뀌게 된다.

근대 이전에 나타난 모든 세계-체제는 세계-제국의 형태였고 따라서 정치가 경제에 통제와 간섭을하므로 어느 한계 이상으로 발전할 수 없었다. 로마나 중국이 대표적인 예이다. 반면 근대 초에 만들어진 유럽 세계-경제(이것이자본주의적 세계-경제 또는 자본주의적 세계-체제이다)는 수백 년을 존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하나의세계-경제 안에서 여러 국가들이 경쟁했으므로 상대적으로 경제에 대한 정치적 통제가 대제국의 경우보다는 약했고 그래서 자본주의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월러스틴이 보는 유럽 자본주의 발전의 요인들

그러면 월러스틴은 16세기에 유럽이 어떻게 자본주의로 향해 나아갔다고 생각할까. 그는 다음 네 가지 요소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첫째, 유럽의 아메리카로의 팽창은 그 자체로서 결정적인 것이 아니었을지 모르나 중요한 사건이었다. 신세계의금과 은이 유럽으로 하여금 수입 이상의 생활을 하게 했고 저축 이상으로 투자하도록 해 주었다. 생산 확대의 원인이 금, 은의양이 늘어난 때문인지 인구 증가의 결과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 금, 은은 그 자체가 상품이었다. 그리고 무역의 전반적인 팽창은16세기의 번영을 뒷받침했다.

둘째, 유럽에서 대규모 자본 축적을 가능하게 한 것은 물가혁명과 임금지체 때문이다. 물가가 오른 만큼 임금이 바로 따라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공업자들이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셋째, 중심부에서는 자영농이 발전했고 주변부에서는 환금작물 재배를 위해 강제노동이 등장하는 농촌 노동양식의 큰 변화가 나타났다. 요먼(yeoman, 자영농) 농장주 없이 자본주의 체제가 등장할 수 있었을지는 의심스럽다.

넷째, 자본주의 체제는 주변부의 환금 작물을 위한 강제노동 없이는 등장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 보듯 그는 아메리카 식민지의 착취나 비유럽 지역과의 무역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나 그와 함께 유럽에서의 내재적인 발전도중시한다. 아메리카로의 팽창이 결정적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귀금속 유입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유럽에서의 생산 확대가인구증가 때문인지 귀금속 유입 때문인지 잘 알 수 없다고 한 발을 빼고 있다.

유럽에서의 대규모 자본축적도임금지체에 그 원인을 돌린다. 또 서유럽에서의 자영농의 등장이 없었다면 자본주의 체제가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매우 미묘한 태도이다. 이것은 그가 자본주의를 기본적으로는 유럽 경제의 내재적 발전의 결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16세기에 유럽의 인구가 늘어나고 또 경제도 되살아나고 있었으므로 유럽 내부적인 요인과 외부적 요인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중요했는지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다. 사료 부족으로 단편적인 증거만을 이용해야 하는 것도 제약 요인이다. 그럼에도 내, 외부적인 요인의관계를 보다 설득력 있게 제시할 필요는 있다. 그의 주장 가운데 문제가 있는 몇 가지를 검토해 보자.

귀금속 유입과 물가혁명

우선 귀금속 유입의 문제이다. 아메리카로부터 스페인으로 금, 은이 유입되기 시작한 것은 1503년부터이다. 1800년경까지 유럽에 들어온 은의 양은 모두 약 10만 톤에 달한다. 어마어마한 숫자이다.
▲ 16세기 중반에 개발된 페루 포토시 광산의 갱내 모습. 원시적인 채굴방식을 사용해서 많은 인명피해를 냈다.

그 가운데 약 40% 가량이 계속 적자를 보인 무역 대금의 결제를 위해 아시아로 유출되었는데 그 최종 도착지는 중국이다.나머지는 유럽에 남았는데 1500년경 유럽의 은 보유량이 약 3만7천톤으로 추정되니 300년 동안에 처음 보유량보다 약1.6배의 은이 유입된 것이다.

유럽은 중세 시대에 주로 은본위 제도를 택하고 있었는데 은이 부족하여만성적인 화폐 부족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풍부한 귀금속의 유입이 화폐량을 증가시키고 경제에 활력을 불어 넣었을 것은분명하다. 아시아 무역이나 발트해 무역의 활성화는 이것과 관련이 깊다.

16세기 유럽에는 물가가 크게 오르는가격혁명이 나타났다. 지역에 따라 다르나 대략 3-4배 정도 올랐다. 곡물가가 가장 많이 올랐다. 화폐수량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이것을 화폐의 증가와 관련시킨다. 귀금속 유입이 화폐를 증가시켰고 이것이 물가를 올렸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만큼 화폐 유통량을늘려 경제발전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반면 속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화폐량 증가가 아니라 유럽 경제가 활성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경제 활동의 증가에 따라 화폐의 유통속도가 빨라져서 물가가 올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물가혁명을 검토하려면 인구 증가, 국내교역과 국제무역의 증가, 도시화, 공산품 생산증가, 명목임금 상승, 국가 조세증가라는 변수들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타당한 이야기이나 사실 어떤 요소가 어느 정도의 역할을 했는지 판단하는 것은매우 어렵다.

이 문제는 아직 논쟁 중에 있고 당장 어떤 결론을 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뒤의 시기는 또다르다고 하더라도 1525-1585년 사이의 스페인에서는 귀금속 유입량과 물가상승 사이에 분명한 상관관계가 나타난다. 또16세기 유럽의 경제 활성화 자체에 화폐 증가가 미친 영향도 매우 크다는 사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월러스틴의 유보적인태도보다는 귀금속 유입의 긍정적 영향을 더 강조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임금지체와 자본의 본원적 축적

월러스틴은 유럽의 대규모 자본 축적이 물가혁명 당시의 임금지체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물가는 급격히 오르나 고용계약은 대개 1년단위로 되어 임금이 오르는 것은 한참 뒤의 일이며 그래서 그 차액을 고용주가 차지하며 자본을 축적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론적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면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렇게 돈을 모은 사람들이 대자본가가 되었다는 분명한 증거는 별로없다. 그보다는 아메리카인의 직접적 착취와 노예무역을 포함한 대서양 무역이 유럽에게 준 이익이 훨씬 더 크다.

노예무역은 16세기에 본격화하여 19세기 전반까지 유지되었다. 그 동안에 약 1,300만 명의 아프리카인이 아프리카 서부지역에서 붙잡혀 아메리카로 팔려갔다. 영국이 가장 적극적이어서 어떤 연구자는 17세기 영국 자본형성의 1/3을 노예무역에 의한것으로 추산하고 있을 정도이다.
▲ 1601-1701년의 대서양 노예무역. 흑인노예들은 대체로 서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팔려나갔다. 노예무역은 19세기 전반까지도 계속되었다

▲ 영국의 리버풀 항구. 17세기에 노예무역으로 크게 번성했다.

이것은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 같은 다른 나라의 경우도 정도는 덜하나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이 시기 번영했던 유럽의 대서양 연안 항구 가운데 노예무역과 관련을 맺지 않은 곳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대서양 무역을 대표하는 것이 특히 영국인들이 주도한 삼각 무역이다. 직물이나 무기, 철제품 등 공산품을 싣고 아프리카에 가서팔고, 그 돈으로 노예를 사서 다시 아메리카에 팔고, 아메리카 플랜테이션 산물을 싣고 유럽으로 되돌아와 파는 것이다. 한 번항차에 여러 번 거래를 할 수 있었으므로 수입이 짭짤했다.
▲ 17세기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조선소 풍경. 17세기는 네덜란드 무역의 황금기이다.

17세기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은 설탕산업이었다. 이는 아메리카 플랜테이션에서 생산한 원당을 들여와 유럽 각 지역에서 정제하여설탕을 만들어 파는 산업이다. 시설에 많은 자본이 투입되어야 하나 높은 수익을 올려주는 유럽 최초의 자본주의적 산업으로 18세기후반에 면직산업이 발전하기까지는 자본축적에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다.


▲ 17세기 이후 유럽에 많이 건설된 설탕(정당)공장의 모형. 서인도제도나 브라질에서 수입한 원당을 유럽에서 정제하여 설탕을 생산한다.

해적질까지도 중요했다. 영국 엘리자베스여왕 시대의 유명한 해적인 드레이크가 세계를 일주하며 약탈행위를 하여 1573년에 영국에 반입한 약탈물들의 가치는 60만파운드에 해당했다. 당시만 해도 영국의 가장 큰 수입원이 양털을 유럽 대륙으로 수출하는 양모산업이었는데 1600년의 수출액은100만 파운드에 불과했다. 이렇게 근대 초 유럽 경제에 외부적 요인은 매우 중요했다. 월러스틴이 임금 지체에 대해 장황하게이야기하는 것은 내재적인 발전을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자영농의 성장과 농업자본주의

월러스틴은 유럽의 자본주의 발전과 관련해 주변부 강제노동과 함께 중심부의 요먼 성장을 불가결한 것으로 주장한다. 요먼은대지주(영주)에게서 땅을 빌려 대규모로 영농을 하는 차지농이나 자기 땅을 늘려 농사를 짓는 자영농을 말한다. 전통적으로 서양학자들은 근대 유럽경제의 확립에서 요먼의 성장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 왔다. 특히 자본주의의 중심국가가 된 영국의 경제를 말할때 그렇다.

이들이 자본주의적 경영을 통해 토지를 보다 효율적으로 이용했고, 농업생산성을 지속적으로향상시켰으며 이에 따른 농산물가의 하락과 실질임금의 증가가 다시 농산물에 대한 대중적인 수요를 확대시켰다는 것이다. 그래서이들에 의한 농업의 발전이 근대 자본주의의 밑바탕을 이루었고 나중에는 산업혁명의 기틀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주장은 19세기부터 있어왔지만 특히 각광을 받은 것은 1950년대 이후이고 70년대에 절정에 달했다. 그것은 식민지에서 독립한제3세계 학자들이 서양 자본주의 발전을 식민지 착취와 연결시켜 비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내부적 요인과 연관시킬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월러스틴도 사실 이런 주장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16-17세기에 영국농업에 특별하게발전했다고 할 만한 것은 없다. 관개 기술 등 여러 가지 기술이나 영농업의 개선을 이야기하나 그것은 영국만의 것은 아니고네덜란드 등 유럽 대륙에서도 일어나고 있던 일이다. 과거에는 18세기의 농업혁명을 이야기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그런 이야기가 잘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또 요먼의 일반적인 성장을 이야기하기도 어렵다. 실제로 토지는 15세기 이후에인클로저를 통해 계속 소수의 대지주나 하층 귀족 계급인 젠트리 층에게 집중되었다. 주로 양모생산을 위해서였다. 1861년의조사에 의하면 잉글랜드 전체 면적의 4/5가 7000명의 대지주 손에 있었다.
▲ 중세 말부터 영국은 플랑드르지방의 양모를 수출했다. 15-16세기에 인클로저는 양모를 생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결과 많은 농민들이 땅을 잃고 농업노동자로 전락했다.

이렇게 농업의 성장을 이야기할 수 없게 되자 1980년대 이후의 연구는 17, 18세기 영국 경제발전의 원인을 해외부문에다돌리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즉 과거에 무역으로 얻은 이익을 과소평가했음을 반성하고 수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것이다.

이 시기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비농업노동력의 40-50%가 수출산업에 고용되어 있었고 국내 제조업증가의 많은 부분이 해외수출의 팽창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비하면 농업생산성 증가에 따른 산업생산품의 수요는 매우 낮은비율이다.

이렇게 유럽 자본주의의 성장과 관련한 월러스틴의 주장은 아메리카와의 관련을 무시하지는 않으나 상당부분 1970년대까지 유럽중심주의적 학자들이 주장한 내재적 성장론을 수용한 것이다. 따라서 지금으로서는 설득력이 별로 없다.

그러나 정작 더 큰 문제는 아시아와의 관련에서 나온다. 월러스틴은 아시아의 경제를 형편없는 것으로 취급하고 도외시했으나 이는서양 학자들이 아시아의 상황을 잘 모르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면 이제 근대 초 아시아 경제에 대해 한번 살펴보자.

4. 근대 초 아시아 경제의 재평가

아시아 경제에 대한 전통적 견해와 문제점


월러스틴은 아시아로 간 귀금속은 대체로 가치를 저장하는 수단으로 금고 속에 보관되거나 사치품으로 사용되었으며 무역 수지는 언제나아시아에 불리했다고 주장한다. 아시아의 경제가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시아 경제는 유럽 세계-경제의 바깥에 있었다고주장한다.

이것은 사실 해묵은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19세기부터 아시아 경제를 보통'강제'에 의해 움직이는 통제경제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경제 논리가 아니라 통치자의 정치적 뜻에 따라 움직인다는것이다. 그래서 국가에 바치는 세금까지도 '공납 모드'라는 묘한 이름으로 부른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들에따르면 아시아의 전근대국가들에도 사기업가가 이끄는 상당한 규모의 활력 있는 상업부문이나 금융업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그 규모도 유럽의 기업들보다 훨씬 더 컸다. 따라서 같은 은이 유럽에서는 투자로 이어져 자본주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고아시아에서는 금고 속에 쳐박히거나 귀족들의 사치로 낭비되었다는 주장은 별로 근거가 없어 보인다.

위에서말했지만 1500-1800년 사이에 유럽에서 아시아로 유입된 금, 은은 엄청난 양이다. 그 가운데 중국의 경우만을 보자. 중국이이 사이에 무역을 통해 얻은 은은 유럽과 서아시아, 인도로부터 들어온 양에다 일본으로부터 유입된 8천-9천 톤, 멕시코와의 직접교역에 의한 1천 톤을 합쳐 약 6만8천 톤에 달한다. 유럽이 아메리카에서 얻은 은의 절반 이상에 해당한다.

그러면 왜 이 엄청난 양의 귀금속이 300년 동안이나 계속 아시아로 흘러 들어갔을까. 이것은 아시아에서 은의 가치가 유럽보다높기도 했으나 주로 무역흑자의 결과이다. 번영하는 아시아에 대해 유럽인들이 갖다 팔 물건이 별로 없었으므로 거의 유일한 수출품이은이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1660-1720년 사이에 아시아에 판 상품의 87%가은이었고 나머지만이 유럽산 상품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영국의 동인도회사도 아시아로 수출하는 상품의 10%를 영국제품으로 채우도록규정했었다. 그러나 그 적은 양도 잘 지킬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은이 아시아 상품의 수입을 위한 결제 수단으로 결정적인 비중을갖고 있었던 것이다.
▲ 17세기 초, 동방물산을 싣고 암스테르담항구로 들어오는 동인도회사 무역선.

중국이 세계경제의 중심이었나

일부 서양 역사가들은 중국경제가 유럽에서와 같이 발전하지 못한 것은 생태계에 대한 인구 압력이 컸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인구의 증가로 목재나 연료 등 자연자원이 부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개간할 땅도 부족하고 지력도 소모되었으므로 중국인들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단위 경작에 더 많은 노동력을 쏟아 부음으로써 생산량을늘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에도 한계가 있으므로 노동력을 계속 더 늘려도 생산량의 증가는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으며 결국 한계에봉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그들은 '안으로 말려들어간다'는 의미의 인벌루션(involuton)이라는 개념을 가지고설명한다.

그래서 중국 경제는 겉으로 보기에는 약간 성장하는 것 같아도 내실이 없었다. 즉 '발전 없는성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중국경제는 어느 시점에 가면 정체되고 결과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중국경제는산업화의 문턱에서 좌절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근대에 들어와 중국 경제와 유럽경제 사이에 결정적 차이가 생겨난 이유라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이루어지고 있는 아시아 경제에 대한 재평가는 이런 과거의 주장을 불식시키고 있다. 특히 캘리포니아 학파로 불리는미국의 연구자들 가운데에는 <변화된 중국>을 쓴 중국계 학자인 웡(R.Bin Wong), <거대한분기점>을 쓴 포머란츠(K.Pomeranz), <리오리엔트>를 쓴 프랭크(A.G.Frank) 등 많은 사람들이 포함된다. 이 가운데 특히 웡이나 포머란츠 같은 사람들은 기존의 일본이나 중국 연구자들의 연구와 원사료를 통해 중국경제를 재평가하고 있고 그 점에서 강한 설득력을 보여준다.
▲ 포머런츠의 거대한 분기점.

이들에 의하면 18세기의 중국은 엄청나게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생태학적 압력은 유럽의 선진지역보다 덜 받고 있었다. 삼림의 황폐화나 연료의 고갈, 건축재의 부족이라는 점에서 중국이 유럽보다 심각하지 않았다. 또유럽인들이 인구를 조절한 데 비해 중국인은 그렇지 못했다는 전통적인 주장은 잘못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중국인도 산아제한을통해 과도한 인구 증가를 막았다는 것이다.

또 18세기 중국에서 경제가 발전한 양자강 하류 지역의생활수준이나 소비수준은 지금까지 서양학자들이 주장해온 것과는 다르다. 많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칼로리 섭취, 설탕, 직물, 가구등의 소비에서 잉글랜드 남부와 같은 유럽의 발전된 지역과 비슷하거나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이들은 1800년경까지의 중국 양자강 하류 지역, 일본과 인도의 선진 지역을 영국과 비교해 보면 인구, 임금, 기술, 법적제도, 신용 등 모든 면에서 유럽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19세기에 와서 유럽이 산업화를 통해 큰 차이를만들어냈지만 그것은 똑 같이 생태학적 위기에 직면한 유럽이 석탄 같은 새로운 에너지원을 쓸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식민착취를 통해아메리카 등 해외의 막대한 자원을 독점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19세기에 나타난차이는 중국경제의 쇠퇴 때문이 아니라 유럽 경제성장의 가속화 때문이고 그것은 특히 영국에서 철과 석탄자원을 결합하고 아메리카의자원을 이용함으로써 산업혁명을 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전적으로 우연의 결과라는 것이다.
▲ 영국 썬더랜드(Sunderland) 근처의 탄광. 19세기 초의 모습.

실제로 18세기 이전의 상황을 보면, 1500-1750년 사이에 중국의 인구는 1억2천5백만 명에서 2억5천만 명으로 약100% 정도 증가한 것으로 추산된다. 같은 시기 잉글랜드 인구가 230만 명에서 370만명으로 증가한 것보다 증가율이 더높다. 이는 대량의 은이 들어와 경제가 크게 활성화되며 경작지가 증가하고 2모작의 도입으로 식량증산이 이루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중국경제는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그 뒤를 잇는 정치적 혼란 때문에 17세기에 잠시 침체했으나 17세기 말에 다시 회복되었다. 양자강 유역에서는 면직물, 견직물 산업이 크게 성장했고 그 밖에 자기, 담배, 염료인 인디고, 종이 등의 산업도 발전했다. 특히 광동성 등 남부지역의 산업은 해외무역의 증가로 크게 자극을 받았다.
▲ 근대 초에 유럽으로 대량으로 수출된 청화백자.

이에 따라 농업이 점차 상업화되고 도시화도 가속화되었다. 그리하여 프랭크 같은 사람은 당시에 세계경제가 여러 중심을 가지고있었을 수는 있으나 어느 하나가 가장 중요했다면 그것은 유럽이 아니라 중국경제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유럽이 아니라 중국이 당시세계경제의 '중심'이었다는 것이다.
▲ 17세기 중국 황하의 풍경.

아시아 경제에 편승한 유럽

일본경제도 16-17세기에 막대한 은의 생산과 수출로 급격하게 성장했다. 국제무역이 크게 증대하여 말라카까지 진출했고 중국과는직접 무역이 불가능했으므로 필리핀의 마닐라와 베트남의 호이안을 거점으로 중개무역을 했다. 국내산업이 급격히 발전하며1658년에는 중국으로부터 자기 수입을 중단했을 뿐 아니라 일본산의 유명한 이마리 자기를 유럽에까지 수출할 정도가 되었다.
▲ 일본의 무역확대에 많은 기여를 한 포르투갈 상인들.

경제발전으로 인구도 급증하여 1500년의 1,600만에서 1750년의 3,200만으로 증가했다. 경제가 급속히 상업화하고도시화하며 18세기의 도시 인구비율은 중국이나 유럽보다 높다. 이것은 결코 정체되고 폐쇄되어 있는 사회라고는 할 수 없다.

인도도 마찬가지이다. 인도는 무굴 제국 성립 이전에도 세계 직물산업을 지배했었는데 제국의 성립으로 인도가 하나로 통합되며도시화와 상업화가 크게 진척되었다. 인도의 전체 인구는 1500년의 약 5,400만-7,900만에서 1750년에는 약 1억3천만 명에서 2억 정도로 크게 증가한 것으로 추산된다. 아그라, 델리, 라호르 같은 도시는 17세기에 인구 50만의 대도시로번성했다.
▲ 인도의 중요한 무역항 가운데 하나인 캘리컷(Calicut)

17세기는 인도 해양무역의 황금기로서 인도는 유럽에 대해 큰 무역 흑자를 냈고 서아시아에 대해서도 약간의 흑자를 냈다. 이는 주로 보다 효율적인 생산으로 가격 경쟁력을 가진 직물과 특산품인 후추 등의 향신료 때문이다.
그래서 프랭크는 1750년 세계전체의 총생산량은 1,480억 달러인데 그 가운데 세계인구의 2/3인 아시아 인구가 4/5를생산했고 세계인구의 1/5인 유럽인이 아프리카, 아메리카인과 함께 나머지 1/5을 생산했다고 추산하고 있을 정도이다.

또 16-18세기 동안 유럽은 아시아에 대해 300년간 무역역조를 냈는데 이렇게 막대한 무역 역조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산업경쟁력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따라서 아메리카에서 막대한 양의 은이 유입되지 않았다면유럽인들은 아시아로부터 아무 것도 수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메리카의 은이야말로 유럽 경제를 아시아 경제에 연결시키는 중요한끈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프랭크는 근대 초 유럽에 가장 영향을 준 것은 아메리카의 귀금속이 공급된 것으로이것 때문에 유럽인들은 이미 잘 확립된 유라시아 경제에 '올라 탈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유럽인들은 어떤 의미에서도세계경제체제나 자본주의를 직접 창조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월러스틴이 주장하는 유럽 세계-경제가탄생하기 오래 전에, 그리고 그것이 나타난 한참 후에도, 실제의 세계경제는 광범한 노동 분업과 정교한 무역체계를 갖고 있는아시아적인 것이었으며, 그 한 가운데 중국이 있었다는 것이다. 프랭크가 중국중심적인 경향을 강하게 보이는 점을 감안한다고 해도아시아의 이런 상황과 당시 아시아에 대한 유럽의 의존을 고려하면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이 갖는 한계는 분명하다고 하겠다.

당시의 아시아 경제 상황에 대해서는 18세기 사람으로 <국부론>을 쓴 영국의 뛰어난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의 관찰이적절해 보인다. '중국과 이집트, 인도는 세계의 어떤 나라들보다 부유하다. 중국은 유럽의 어느 곳보다도 훨씬 부유한 나라'라는것이다.

사실 18세기까지, 아시아 경제에 대한 유럽인들의 평가는 매우 높았다. 그것이 달라지는 것은유럽인들이 산업혁명에 성공한 이후이다. 그러니까 19세기에 와서 아시아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스미스의 이야기에 더귀를 기울여 보자.

'아메리카 발견 후에 유럽의 대부분이 잘 살게 되었다. 이는 잉글랜드, 홀랜드, 프랑스, 독일뿐이 아니다. 스웨덴, 덴마크, 러시아까지도 농업과 제조업을 발전시켰다. ‥‥아메리카의 발견이 가장 중요하다. 새로운광대한 시장이 생김으로써 새로운 노동 분업, 기술의 발전이 가능했는데 이는 과거의 좁은 시장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노동생산성이 높아지고 유럽 모든 나라에서 생산량이 증가했다. 이와 함께 유럽인들은 부유해졌다. 동인도는 아메리카 은의 새로운시장이었다. 금 · 은은 항상, 지금도 그렇지만, 유럽으로부터 인도로 가져갈 매우 이익이 많이 나는 상품이다. 은이야말로 두극단의 대륙을 하나로 잇는 주된 상품이다. 이것으로 이 먼 지역이 서로 연결되었다.'

5. 세계체제론의 확대

무엇이 자본주의인가


세계체제론에 대한 비판은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세계체제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월러스틴의 이론 체계가 전체적으로 비판을받으며 그것이 시간, 공간적으로 크게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의 세계체제론은 이미 월러스틴이 만들어 놓은 틀을 훨씬넘어 서고 있다. 세계체제론이 더 이상 월러스틴의 전유물이 아닌 것이다.

월러스틴은 16세기 이전에는 오직 세계-제국만 있었고 세계-체제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세계 경제가 1500년경에 날카로운 변화를 보이며 그 이전 시기와 구분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전 시대와 후의 시대를 나누는 기준이다. 월러스틴은 두 개의 기준을 이야기한다. 하나는 교환을위한 생산이 존재했고 그것을 통해 자본축적이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지역간의 노동 분업과 경쟁적인 축적이 멀리떨어져 있는 지역들을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는 역할을 할 수 있었느냐의 여부이다.

월러스틴은 무역에의해서만은, 즉 교환을 위한 생산만으로는, 이런 것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생산관계의 변화가 있어야, 즉 임금노동이만들어져야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맑스주의자로서 당연한 태도이다. 그러므로 자본축적에서도 경제원리보다는 정치원리가지배적이었던 근대 이전에 세계-체제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무역의중요성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의 스승이라고 할 브로델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유럽에서의 자본주의 흥기를16세기가 아니라 11세기 이후의 상업화 과정과 경제 팽창에서 찾고 있다. 중세 도시들도 이익을 내기 위해 노력했고 자본주의는그런 노력의 결과물이지 16세기에 와서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고대의 이집트에서전근대의 일본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진정한 자본가, 도매상, 무역 대금업자, 그리고 그들을 돕는 수많은 사람들을 발견할 수있다고 주장한다. 이들도 근대 서양의 자본주의적 상인들과 얼마든지 비교 가능하다는 것이다.
▲ 기원전 2세기의 상거래모습을 보여주는 이집트 벽화.

프랭크도 이와 비슷하게 상당한 규모로 이루어지는 정규적인 무역이 국제적인 노동 분업을 통해 세계-경제를 만들 수 있다고생각한다. 그것은 무역과 생산이 분리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문제는 무역망과 노동 분업이 얼마나 광범하게 퍼져 있는가 하는점이다.

물론 18세기 말 이후 산업화로 인해 자본축적이 양적인 면에서 엄청나게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질적인 문제는 아니다. 이에 대해 월러스틴 자신도 그 변화가 그렇게 극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인정하고 있다.

사실 지속적인 재투자와 그에 따른 자본축적은 모든 상업이나 수공업에서 자연스런 일이다. 그것은 최소한 수천 년의 역사를 갖고 있고 아시아 사회라고 다를 바 없다. 따라서 그것을 16세기 이후의 유럽으로 한정시킬 수는 없다.

그래서 최근의 세계체제론자들은 '근대 역사가들이 자본주의의 기원과 뿌리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은 연금술사의 노력과마찬가지'라고 혹평하고 있다. 찾을 수 없는 것을 찾으려는 무익한 일이라는 것이다. 프랭크도 이에 대해 '자본주의적생산양식이라는 괴물과, 그것이 서유럽에 기원을 갖고 있다는 주장은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점잖게 충고하고 있다.

세계체제론의 확대

이렇게 유럽중심적 세계-체제가 거부되며 체르닉(E.Chernykh) 같은 사람은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의존하여 세계체제를 청동기시대까지 소급시키고 있다. 이미 5천년 전에 광범하고 지속적인 국제무역과 주민들의 이주, 외적의 침입, 문화와 기술의 확산 등에의해 사람들 사이에 광범한 접촉이 이루어졌고 금속, 목재, 곡물, 가축, 기타 원자재, 식료품, 직물, 도기 같은 부피가 큰생필품들의 대량 무역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아라비아반도, 레반트, 아나톨리아 반도, 이란, 이라크, 인더스 계곡, 트랜스 코카시아, 중앙아시아의 일부를 하나의 세계체제에 포함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아랍상인들이 주로 이용한 도우(Dhow)라는 배. 작지만 조종하기가 매우 편리한 배로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연결했다.

이들은 근대에서와 같이 고대에도 무역이 생산의 성격에 영향을 미쳤고, 노동의 지역간 분업과 잉여의 정규적인 이전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고대라고 해서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또 중세 후기의 세계체제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유럽 헤게모니 이전에>라는 책을 쓴 자넷아부-루고드(J.Abu-Lughod)는 1250년이 세계사에서 하나의 분수령이라고 생각한다. 1250-1350년 사이에 중국에서프랑스에 이르는 아프리카-유라시아의 핵심지역이 하나의 광대한 교역망으로 연결된 세계체제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몽골제국이 아시아와 유럽을 직접 잇는 교역망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세계체제에는 아시아와 이슬람권, 유럽의 세 개의광역체제가 서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세계체제가 무너진 것은 14세기의 흑사병 때문이다.
▲ 아부-루고드의 <유럽 헤게모니 이전에>의 번역본 표지.

또 질스(B.Gills)나 프랭크는 아프로-유라시아의 핵심지역에서 지난 5천년 동안 단일한 세계체제가 지속적으로 발전해 왔다고주장한다. 세계체제가 만들어진 것은 월러스틴이 주장하듯 5백년이 아니라 5천년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그 중심에 있는 것은장거리 무역이라는 것이다.

이를 경기 순환 사이클로 푸는 사람들도 있다. 세계경제가 이렇게 상호 의존하고있었다는 사실을 전 세계적인 경기순환의 연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유라시아의 여러 지점에서 경기의 호황과 쇠퇴가거의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모델스키(G.Modelski)와 톰슨(W.Thomson)은 A.D. 930년이후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 영향을 미친 콘트라티에프 경기순환(50년을 주기로 하는 경기순환)을 19개 발견했다. 예를 들면1760년대 초부터 1780년대까지 나타난 불경기는 콘트라티에프 경기순환의 하강 국면으로서 전 세계에 걸쳐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도, 러시아, 서유럽, 아메리카 등지에 동시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아메리카와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는 원인을 제공했다는것이다. 이렇게 경기순환이 전지구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세계경제가 하나로 묶여 있는 반증이라는 것이다. 그럴듯한 이야기이다.

이렇게 새로운 세계체제론은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크게 확대되고 있다. 16세기 이후의 유럽에만 한정되었던 시각을 5천년에 걸쳐 아프리카를 포함하는 전 유라시아 대륙으로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주장들은 아직은 가설적인 단계에 있으므로 설득력이 크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매우 편파적인 유럽중심주의적인 체계에균형을 잡으려는 시도로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월러스틴의 시각은 그야말로 좁은 유럽 지역에만 제한된시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연구를 기대해 볼만하다고 생각한다.

6. 월러스틴 세계체제론의 유럽중심주의

지금까지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과 그 문제점들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새로운 연구를 통해 그것이 더 이상 그대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많은 한계들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시아 경제에 대한 새로운 연구, 특히 중국경제에 대한 연구 성과들에 대해서 논쟁이지속되고는 있으나 여하튼 새로운 연구들이 근대 세계경제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열어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그것은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근대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요구하고 있다. 서양인들이 자신들의 유럽중심적세계사를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로 생각하는 '자본주의'라는 근대성의 기원을 유럽으로부터 분리시키고, 그것을 유럽 안에만한정된 발전과 차단시킴으로써 근대성의 의미 자체에 의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월러스틴이 세계체제론을구성하기 위해 많은 정열을 쏟았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사의 객관적 이해에 실패한 것은 이러한 유럽중심주의적 태도 때문이다.서양인들이 자본주의를 본격적으로 발전시키며 전 세계를 하나로 포섭하기 이전에도 이미 전 세계의 주요 지역들이 하나의 경제체제의본질적인 부분들로 묶여 있었음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브로델의 한계를 되풀이한 데불과하다. 사실 월러스틴의 근대 경제에 대한 역사적 설명의 많은 부분은 브로델의 것을 빌리거나 변형, 발전시킨 것에 불과하기때문이다. 그러므로 월러스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브로델에 대한 비판적 접근이 먼저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것은 월러스틴이나 브로델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니다. 블로트가 말했듯이 '유럽식민자는 세계를 식민화했을 뿐 아니라역사도 비슷하게 식민화'함으로써 아직까지도 우리의 역사인식에 매우 큰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바른세계사의 인식을 위해 어떤 인식의 틀을 가져야 할 것인가는 자명하다고 하겠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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