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의 확실한 종언, 부시와 유럽의 결별"
홍기빈의 '현미경과 망원경' <21> GE-허니웰 합병의 좌절과 그 의의
2004-07-26 오전 9:45:58
III. 어제의 세계: 지구화, 인수 합병, 신자유주의

⑥ 90년대의 끝 : GE/허니웰 합병의 좌절과 그 의의

90년대 지구화의 전제 조건과 위기

이전의 연재분에서 살펴보았지만, 닛잔/비클러는 인수 합병을 주된 방법으로 삼는 이러한 ‘넓이 지향’ 축적 양식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고 본다. 인수 합병이 진행됨에 따라, 경제 영역 안팎의 권력의 배분이 근본적으로 바뀌며 또한 사회적 조건의 창출 또한 일정한 한계에 부딪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를 그들은 ‘울타리(envelop)’라고 부른다①.

클린턴 행정부의 달러-월스트리트 레짐과 워싱턴 컨센서스를 앞세운 이러한 지구적 규모의 ‘상품화’는, 축적의 주요 활동 무대를 주로 일국 내부로 규정당하고 있었던 서방 국가의 자본에게 폭발적인 ‘지구화’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에 기업 간의 인수 합병 활동도 그 이전의 ‘울타리’를 넘어 지구적 규모에서 행해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주로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미국과 유럽 국가 사이의 대규모 인수 합병은 정말로 이젠 ‘자본에 국경이 없다’는 말을 현실로 느끼게 하였다. 그 결과 ‘지구적 규모의 초국적 소유 구조와 자본가 계급’이 나타나는 가능성을 전망하는 이들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90년대가 끝나가면서 이렇게 지구적인 규모에서 행해졌던 대규모 인수 합병의 붐도 그 한계 즉 새로운 ‘울타리’를 만나는 양상이 나타났다. 대규모 인수 합병으로 인한 경제적 권력의 재분배에 대해 기존의 권력 구조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제도적 장치를 바꾸어 내든가 아니면 거기에 분명한 제동을 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은 결코 물리학 역학과 같은 기계적 과정이 아니다. 해당 구역의 지배 세력들 사이의 타협이나 공동의 세계관 창출 등 그야말로 그람시가 ‘역사적 블록의 헤게모니 형성’이라고 불렀던 복잡한 정치적 과정이 절대 필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결코 손쉽게 혹은 자동적으로 달성되는 것은 아니다. 유능한 정치적 지도 집단이 있어서 대단히 정교한 정치적 기술을 발휘해 나갈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②.

90년대식 지구화의 위기는 97년과 98년에 걸친 아시아, 러시아, 남미의 금융 위기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아시아 금융 위기의 원인에 대해서는 수많은 분석이 있지만, 기본적인 원인이 90년대에 붐을 일으킨 “신흥 시장(emerging market)”이 과연 어느 만한 실제의 채산성을 갖고 있는가에 대한 국제 금융 시장의 신뢰가 흔들린 데에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즉 채산성이 제대로 담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나치게 빠른 외형적 경제 성장과 설비 투자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세계 금융 시장에 확산되기 시작했던 것이다③. 여기에 덧붙여 90년대 자본 축적의 낙관주의를 지탱하는 또 하나의 축이었던 기술 정보 혁명 ? “나스닥”, “닷컴”, “신경제(New Economy)” 같은 말들로 집약된다 ? 의 실제 수익성이라는 것도 점차 근본적인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아마도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세계 주식 시장을 계속 끌어올리는 원동력이었던 대규모 인수 합병의 건수가 점차 고갈되기 시작하고 또 심각한 사회적 한계에 부딪히는 증후가 역력하였다.

이러한 요인들은 마침내 2000년 ‘신경제’ 시대의 총아 나스닥의 폭락으로 나타났다. 2000년 3월 10일 5,048.62이라는 최정점을 거친 이후에 시장의 낙관주의는 극에 달했으나, 이후의 사태는 이미 추운 계절이 오고 있음을 분명히 알리는 쪽으로 가고 있었다. 닷컴 붐의 원동력인 창업주 상장(IPO: Initial Public Offerings)은 2000년 초 79건에 그 총액은 무려 106억 달러에 이르고 있었으나 2000년 한해동안 실제로 성사된 것은 20건도 채 되지 않았고 그 총액은 36억 달러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결국 시장의 침체가 단기에 그치리라는 낙관적인 기대가 어긋나고, 이 침체의 원인은 장기적 구조적인 것임으로 드러나면서 1년이 지난 2001년 3월의 시점에서 나스닥 지수는 최정점에서 60%나 하락해버리고 말았으며, S&P 500와 다우 존스 산업 평균 지수도 각각 17%, 7%씩 하락하고 말았다.

GE와 허니웰의 합병 좌절: 결혼식도 잔치도 끝이 났는가

이러한 21세기 초의 급격한 사태 변화로 인해 변화하기 시작한 세계 금융 시장의 사고방식(outlook)에 “인수 합병 축적 양식에 기반을 둔 어제의 세계”는 끝난 것이 아닌가라는 비관주의를 더욱 확고하게 한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제네럴 일렉트릭(GE)과 허니웰(Honeywell) 합병의 좌절이었다. 제트 엔진 시장 1위의 점유율을 가지고 있는 GE는 2000년 10월 우주 항공 산업과 자동차업의 유망한 생산업체인 허니웰과 합병 계획을 발표한다. 이 합병은 4백20억 달러 규모의 거래로서, 산업 회사의 합병으로서는 역사상 최대 규모였고 또 GE의 CEO 잭 웰치(Jack Welch)의 주장에 따르면, 두 회사는 거의 중복되는 생산 품목도 없으므로 이 두 회사의 결합이야말로 “가장 깨끗한 흠잡을 데 없는 합병”이라는 축복된 결혼이었다④.

하지만 이를 통해 GE는 그 크기를 거의 3분의 1을 늘여 기존의 위치를 더욱 강화시킬 것이 분명하였다. 이러한 사건 진행을 제트 엔진 업계의 그 다음 업체인 유나이티드 테크놀로지(United Technology)와 영국의 롤스 로이스(Rolls-Royce)등이 가만히 좌시하기는 힘든 일이었으리라. 중간에 벌어진 일은 하나님만 아실 것이다 ? 그분조차 모르실 수도 있다. 분명히 나타났던 바는, GE와 허니웰이 그 ‘축복된 결혼’을 매듭짓기 위해 입술을 부벼대려는 순간, 누군가 난데없이 식장에 뛰어들어 이 결혼은 무효라고 외치며 깽판을 놓고야 말았다는 것이다. 그 괴한은 다름 아닌 유럽연합(EU)의 반독점 위원회(European Commission for Competition) 마리오 몬티(Mario Monti)였다. 디트로이트 총각 GE와 뉴저지 색시 허니웰이 워싱턴의 교회에서 미국 목사님 주례로 벌이는 이 ‘미국 결혼’에 어째서 이태리 엑센트 고약한 브뤼셀 공무원이 나타나서 행패를 부리게 된 것일까.

90년대 대서양을 건너는 무수한 합병 사례들은 진공 속에서 이루어 진 것이 아니었다. 미국도 EU도 자체의 시장 질서가 있고 그 질서는 경제학자들이 항상 주장 하듯이 엄청난 크기의 과점 기업들이 치고 박는 경쟁 질서이다. 따라서 경제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대단히 정교하고 복잡한 독과점 규제와 시장 질서 유지를 위한 각종 조치와 감찰이 없이는 그 ‘평화로운 시장’은 하루 아침에 전쟁으로 변할 수도 있다. 대서양을 건너는 정도 규모의 인수 합병이 이러한 각각의 내부 구조와 법적 제도적 장치에 충격을 주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인수 합병은 워싱턴과 브뤼셀의 긴밀한 협조와 제도적 개혁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었고, 또 실제 그 협조는 상당히 성공적이기도 하였다⑤.

그 와중에서 EU는 유럽 내의 자본과 기업의 이익에 잠재적 영향을 미칠 만한 인수 합병 거래라면 그 거래가 지구 어디에서 누가 벌이는 거래이건 좌시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고 미국도 이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합병에 참여하는 기업들의 세계 연간 매출액 총액이 5십억 유로가 넘고 그 중 250만 유로 이상의 거래가 EU 15개국 사이에서 행해질 경우 그 기업의 국적에 관계없이 EU에 통지해야 한다는 것을 법으로 정해놓고 있는 것이다. 유럽인들은 140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를 통하여, GE와 허니웰의 합병은 항공 우주 산업에 있어서 독점을 초래하여 항공 산업 등등에 있어서 불공정 거래를 낳게 될 것이라는 반대 사유를 분명히 하였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미국의 통상 대표 로버트 죌릭과 상무성 장관 도널드 에반스 그리고 부시 대통령 세 명은 입을 모아 이러한 유럽의 조치에 대해 항의하였고, 유럽인들은 이에 대해 부시 정권 출범 후의 계속된 일방주의적 행태를 들어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이제 싸움의 불똥은 제트 엔진 생산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항공업으로까지 튀었다. 항공 산업이야말로 미국의 보잉(Boeing)과 유럽 대표 에어버스(Airbus)가 대립하는, 양 쪽 무역 경쟁의 가장 첨예한 지역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먼저 보잉사의 부회장 해리 스톤싸이퍼가 저 부시 3인방을 거들어 유럽을 비난하면서 그 배후에는 에어버스사의 책략이 있음에 틀림없다고 <르 몽드> 지와의 인터뷰에서 포문을 열었다. 이에 에어버스 측에서는 자신들은 그 합병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다시 보잉사 측의 불순한 정치적 의도를 비난하였다. 그러자 공화당 상원의원인 필 그램(Phil Gramm)은 GE가 부분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방송 CNBC 뉴스에 나와, 이 사건이 향후 미국 유럽 관계에 큰 앙금을 남길 것이라고 말한다.

이 사상 최대의 ‘결혼’이 파탄나면서, 창호지에 구멍 뚫을 준비를 하며 신이 나서 모여든 구경군 하객들도 된서리를 맞고 말았다. 6월14일 다우 존스 지수는 GE와 허니웰의 주가 폭락을 따라서 100포인트 이상 하락하였고, 합병의 성사를 믿고 거래를 벌였던 선물 시장의 수많은 거래자들도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 되었다⑥.

‘초제국주의’의 종말?: 90년대와 ‘어제의 세계’

이 GE/허니웰 사건은 여러 가지 점에서 90년대 지구화와 인수 합병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있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누누이 말했듯, 90년대의 ‘어제의 세계’는 워싱턴 컨센서스와 같은 초국적적인 지배 계급의 긴밀한 협조와 합의를 필수적 전제 조건으로 한다. 그래서 이러한 세계를 한없이 유지하려면 정작 결혼하여 백년해로의 궁합을 다져야 할 쪽은 양국의 지배 세력들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90년대의 세계를 지탱할 만한 사회적 조건들이 그 한계에 부딪혔음을 압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인수 합병으로 인한 경제적 권력의 재분배는 궁극적으로 경기 참가자들 간에 심각한 갈등과 경쟁을 낳게 되어 상호간의 “깽판놓기(sabotage)”를 낳고 만다. 게다가 이 항공 산업의 경우 유럽과 미국이라는 군사 권력의 안보 이익과 첨예하게 닿아 있는 부분이다. 이 산업을 “순수히 경제적인 논리”에서 어느 한 쪽의 기업이 싹쓸이를 한다는 것은 이미 그 권력의 재분배라는 것이 경제 영역을 훨씬 넘어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EU와 부시 대통령, 보잉과 에어버스가 싸움에 끼어들기 시작할 무렵, 이미 쟁점은 애초의 그 알량한 “건전한 상거래 질서 확립” 차원을 멀리 떠나, 미사일 안보 체제(Missile Defense System), 미국의 보호주의 무역, 환경, 인권, 중동 질서 재편 등등의 모든 쟁점에서 미국과 유럽의 지배 계급 사이에 이해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사건으로 변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100년전 레닌과 카우츠키의 논쟁을 떠올리게 된다.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자였던 칼 카우츠키(Karl Kautsky)는 ‘전 세계의 자본가 계급이 하나로 뭉쳐서 평화롭게 세계를 공동 착취하는 초제국주의(Ultra-imperialismus)’의 가능성을 이야기하였다. 이에 대한 레닌의 반론의 논점은 아주 명확한 것이었다. 자본가와 지배 계급들이 궁극적 목표로 삼는 것은 독점적 권력의 달성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관계의 본질은 기본적으로 갈등과 경쟁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각자가 그렇게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해가 일치하면 그들도 일시적으로 전반적인 협조와 화합을 일구어내기도 한다. 그것이 카우츠키가 논거로 삼은 전 세계 지배 계급의 협력의 양상이었다. 하지만 일정 기간이 지나면 다시 이들 지배 세력의 갈등의 계기가 전면화되게 마련이다. 즉, “경쟁과 협조는 독점 자본주의 자본가 계급 행태의 동전의 양면”일 뿐이라는 것이다⑦.

카우츠키의 현실 인식은 유럽 협조 체제(Concert of Europe)가 그나마 작동하고 또 각종 초국적 독점체도 만들어지면서 민족 국가 단위를 넘어서는 국제 자본가 계급의 협력이 종종 나타나던 19세기 말의 세계를 모델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미 몇 번의 식민지 쟁탈전과 군국화를 거쳐 바야흐로 세계 대전의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던 1914년의 시점에서 보면 이러한 카우츠키의 ‘어제의 세계’에 대한 노스탤지어는 이미 시대착오임이 분명한 것이었다. 카우츠키의 그 논문이 독일 사회민주당 기관지 “신시대(Neue Zeit)”에 공표된 것이 하필이면 1차 대전이 발발한 1주일 후였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격세지감을 더욱 극적으로 보여준다. 독일의 점잖은 ‘교양 신사’에 불과했던 카우츠키와 달리 좀 더 냉정하고 계산적으로 현실을 직면할 배짱이 있었던 ‘렌 강에서 온 깡패’ 레닌은 그러한 세계의 변화를 볼 수 있었다. 그의 눈에 이미 각국 지배 계급은 ‘갈등과 전쟁’을 자본 축적의 주요 계기로 삼는 쪽으로 관점을 바꾼 지 오래이고, 세상은 ‘임박한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21세기의 벽두에 분명해진 지구 정치 경제의 현실은, 인수 합병의 대상이 될 만한 기업의 풀은 말라가고, ‘과잉 생산’과 디플레의 위협은 번져가고, 정보 기술 혁명은 상당 부분 ‘허구(hype)’였음이 드러나고, 부시 정권과 유럽 지배 세력 사이에는 거의 모든 사안에 걸친 세계관과 정책의 차이로 확대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제 세계는 어디로 갈 것인가.

슈테판 쯔바이크(Stefan Zweig)가 그의 자서전 <어제의 세계>에서 회상하는 유럽 그리고 그 한 복판에 피어난 꽃 비엔나는 코스모폴리타니즘이 살아 숨쉬는 생동감 있고 열린 세계였다⑧. 하지만 그의 그러한 회상도 카우츠키의 경우처럼 노스탤지어에서 나온 것임이 분명하다. 그가 그 글을 쓰던 당시의 세계는 그 정반대의 방향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히틀러와 파시즘의 등장 이후 이제 유럽은 철과 바퀴가 지배하는 아비규환으로 바뀌었고, 유태인 쯔바이크는 독일을 떠나 긴 망명 끝에 결국 브라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이제 우리도 그가 겪어야 했던 것과 비슷한 일련의 역사 진행을 보게 되는 것일까.

한 가지는 분명한 것 같다. “90년대”는 끝났다. 금성무와 임청하도 영화 [중경삼림]에서 말한 바 있다. 사랑도 홍콩도 유통 기간이 끝나면 변하게 마련이다. 그 뒤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건 간에.

<주(註)>

① 조나단 닛잔, 심숀 비클러 저, 홍기빈 옮김, <권력 자본론: 정치와 경제의 이분법을 넘어서>(삼인, 2004) 220쪽 이하 참조.

② 기업의 소유 구조나 금융 체제와 같은 경제 제도들의 형성과 변화는 이러한 지배 블록 내부의 헤게모니와 합의의 산물이라는 것이 ‘자본-통제 복합체(Capital-Control Complex)’ 개념의 기본 생각이다. Gibin Hong, “The Concept of Capital-Control Complex: The Case of Japan”, Review of Radical Political Economics, 2004(forthcoming).

③ Jonathan Nitzan, “The "Asian Miracle": How Close toMaturity?”, The BCA Emerging Markets Strategist 1997, November, 5-10pp.

④ “The Anatomy of the GE-Honeywell Disaster” by Michael Elliot, The Time, July 8, 2001.

⑤ “US and EU Economic Policy: Cartels, Mergers, and Beyond” Address by William J. Kolasky, Deputy Assistant Attorney General, Antitrust Division, U.S.Department of Justice, before the Council for the United States and Italy, Bi-Annual Conference, New York, NY. January 25, 2001. 참조.

⑥ 이상의 정황은 다음을 보라. “US and Europe split on GE takeover of Honeywell”, By Chris Marsden World Socialist Web Site, June 21, 2001.

⑦ Karl Kautsky, “Ultra-imperialism” New Left Review, 1970. no.59; Vladimir I. Lenin, Imperialism: The Highest Stage of Capitalism, in Selected Works of V.I.Lenin, vol. I. (Moscow: Progress Publisher, 1967).

⑧ Stefan Zweig, The World of Yesterday: An Autobiography, introduction by Harry John, (Lincoln: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1964).
Posted by 중년하플링 :
"'권력'은 어떻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는가"
홍기빈의 '현미경과 망원경' <23> <권력자본론> 서평에 답하며
2004-08-05 오후 2:37:13
지난 7월24일 <프레시안>에 실린 <권력자본론> (심숀 비클러ㆍ조나단 닛잔. 홍기빈 옮김, 삼인, 2004)에 대한 박승호 박사의 서평은 책의 논지와 내용을 충실하고 깊이있게 추적한 글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진지하고 성실한 서평을 읽게되는 것이야말로 책을 준비한 사람들에게 그 동안의 피로를 잊게 하는 가장 큰 보상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서평에 대해 전해 들은 저자들은 물론, 책의 번역자인 필자도 박승호 박사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사회적 권력'이야말로 '자본'과 '이윤'의 근원"

서평 후반에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인 서평자의 입장에서 <권력자본론>에 대한 비판이 개진되고 있다. 논지를 추리자면, 첫째, 서평자가 보기에 저자인 닛잔과 비클러는 권력을 '대기업들의 시장 독점력'과 같은 의미로 쓰고 있다. 둘째, 이렇게 권력이라는 개념이 경제적 개념으로 환원되었기 때문에, 저자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결국 <권력자본론>은 사회의 정치 경제 현상을 대기업의 시장 지배력으로 환원하는 또 하나의 경제주의로 귀결되었다. 셋째,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결국 마르크스의 준거점이었던 자본주의적 계급 관계라는 사회적 관계의 패러다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미국의 소위 '제도주의' 학파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많이 나왔던 비판이며, 이에 대한 논의는 학술적이며 또 대단히 복잡할 것이기에 프레시안 지면에서 자세한 반론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인다. 또 필자는 책의 번역자에 불과하므로 저자들의 입장을 변호하거나 상술할 이유도 또 자격도 없다. 이 글에서는 단지 이러한 서평이 이 책에 대해 낳을 수 있는 불공평한 오해라고 생각되는 지점만을 지적하겠다.

첫째, 닛잔과 비클러가 강조하는 자본의 권력이란 대기업의 시장 지배력이 아니다. <권력자본론>의 2장에서는 자본의 권력이란 '사회적 관계의 상품화'에서 나온다는 점이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저자들은 베블렌의 논지를 따라 생산은 사회 전체에 걸쳐 이루어지는 과정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자본이란 그러한 사회적 생산 과정에 가장 결정적인 관건이 되는 유형 무형의 계기들-기계일 수도 있고 지식일 수도 있고 법적 규제일 수도 있다-에 대하여 사적 소유권을 설정하여 자신의 '자산(asset)'으로 만들어버린다. 그 자산에 대한 소유권이란, 곧 자기 수틀리는대로 그 자산을 생산에서 빼내어버림으로서 사회 전체에 고통을 가하여-이것이 베블렌이 말하는 '깽판놓기(sabotage)'이다-이윤을 뜯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약간의 비유를 들자면, 사회적 생산의 아주 중요한 '병목'에 해당하는 부분을 '볼모'로 잡아서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인질극'을 벌이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 전체로부터 '몸값'으로 뜯어내는 부분이 이윤의 원천이라는 것이 베블렌의 자본 및 이윤 이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윤의 근원을 '자본재의 생산성'에서 찾는 신고전파의 자본 이론 그리고 '잉여 노동 시간의 착취'에서 찾는 마르크스 이론 모두가 생산의 '기술적 과정' 자체에서 자본과 이윤을 설명하는 데에 반하여, 베블렌과 닛잔 비클러는 사회적 생산 과정을 "깽판놓을" 수 있도록 핵심적인 계기를 '자산'으로 움켜쥐어버리는 소유권이라는 사회적 권력에서 자본과 이윤의 근원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저자들이 자신들의 자본 이론을 "권력자본론"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사회적 권력'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는 비밀"
『권력자본론』(Capital as Power)(심숀 비클러, 조나단 닛잔 지음/홍기빈 옮김, 삼인, 2004) ⓒ프레시안

이렇게 사회적 관계의 일부를 장악하여 현금의 흐름(cash flow)을 창출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 바로 영업 기업(enterprise, going concern)이다. 그리고 19세기 후반에 들어오면 이 기업들은 자신들의 현금 흐름을 현재 가치로 할인하는 자본화(capitalization)의 기법을 통하여 소유권을 상품화시키는 증권 시장(securities market)을 발전시켰다. 이것이 현재의 금융 자본주의의 본질이요 발생이라는 것이 책의 주장이다.

여기서 주목할 지점은, 첫째 그렇게 '자산에 대한 소유권'을 설정하여 '깽판놓기'를 가능케 함으로서 '현금 흐름'을 낳게 만들 수 있는 사회적 관계의 가지수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는 것, 둘째 따라서 그렇게 성공적인 현금 흐름을 일단 확보한 후 증권 시장에서 매매할 수 있는 사회적 관계의 가지수도 거의 무궁무진하다는 것이다. 이 후자야말로 미국 주식 시장 역사를 논하는 자들이 항상 입에 올리는 소위 '깊이(depth)'라는 것이다.

인간 세상의 사회적 관계 중 이렇게 현금을 창출하는 목적으로 '자산'으로 자본화된 것들의 예는 역사적으로 실로 무궁무진하며 이 지구화의 시대에 폭발적으로 늘어가고 있다. 가장 오래된 예라면 매춘부의 육체를 들 수 있겠고, 최근에 나타난 예를 들자면 미국과 유럽의 주요 주식 시장에 상장되어 있는 프로 축구팀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된다.

남자와 여자가 성욕을 느끼고 해소해나가는 전체의 사회적ㆍ자연적 과정에서 그 핵심 관건이 되는 남자와 여자의 신체 일부를 '자산'으로 쥐고 현금 흐름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노는 날 들판에 나가 공을 차며 뛰다가 걔중 잘하는 이들의 플레이를 감상하게 되는 자연스런 과정은 이제 스물 몇 개 정도의 다리통을 '자산'으로 보유한 구단주에게 황금알을 낳아주는 거위로 변하였다. 하물며 전기를 사용하는 과정, 쌀을 생산하는 과정 등등은 말할 것도 없다. 21세기의 인류 문명이 지금 당하고 있는 상태는, 이렇게 자본의 소유권이라는 사회적 권력에 의해 "황금알 낳는 거위"로 포획되고 있는 사회적 과정이 숨막히는 속도로 늘어가고 있으며, 그 결과 우리의 일상 생활 전체가 상품화에 포위되고 있다는 것이 이 <권력자본론>의 중요한 논점의 하나이다.

따라서 닛잔 비클러가 권력을 '대기업의 시장 독점력'으로 환원하고 있다는 비판은 사실상 책의 내용과 정반대로 빗나간 비판이 아닐 수 없다. <권력자본론>은 거꾸로, 세상에 존재하는 무궁무진하게 다양한 종류의 권력, 포주와 기둥 서방의 권력에서 시작하여 조세를 뜯는 국가의 권력, 여자들과 아이들을 저임금으로 일시키는 가부장 사회의 권력, 삼림과 천연 자원을 마음껏 팔아치우는 토호들의 지방 권력, 지적 소유권을 전 세계로 휘두르는 빌 게이츠의 권력, 비정규직의 사회 보장을 계속 유보시켜 자본 권력을 확장하는 국가자본의 권력, 인간 유전자에 대한 지식을 독점하는 선진국 대기업의 권력, 토플과 토익 시험을 강제하는 영미 세계의 문화적 권력 등등 무궁무진한 현실에서의 권력이 어떻게 하여 '자산에 대한 소유권'으로 '자본화'되고 또 증권시장에서 할인되어 '상품화'되는지의 과정을 보여주려 하는 것이다. 요컨대 "대기업의 시장력이 어떻게 사회적 권력이 되는가"가 아니라, "사회적인 다양한 권력이 어떻게 자본화되어 경제적 힘으로 변하는가"의 방향으로 논리가 전개된 것이다.

"공장 밖 자본 축적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권력자본론>은 서평자가 말하고 있는"노동자 자본가라는 자본주의적 계급 관계에 착목해야만 사회적 관계의 권력 관계가 총체적으로 드러난다"는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 대해 거꾸로 다음과 같은 비판을 내놓게 된다. "공장 밖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자본의 축적 과정의 사회적 관계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현대 자본주의에서의 기업의 행태를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생산 과정에서 벌어지는 노동자들로부터의 "절대적 상대적 잉여가치의 착취"와 거의 혹은 전혀 무관한 방식으로 자본이 축적되고 있는 예는 얼마든지 있다. 즉 자본 축적에 관련된 사회적 관계의 지평이란 공장이나 작업장에서의 공식적인 노자 관계의 틀을 훨씬 넘어서는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앞에서 본 베블렌ㆍ닛잔/비클러 자본 이론의 입장대로 그러한 자본 축적은 필시 일정한 사회적 관계에 대한 권력을 현금 흐름으로 상품화시키는 과정에 근거한 것이라면, 그 공장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축적 과정은 분명히 노동자 자본가라는 관계 이외의 종류의 권력 관계를 상품화한 것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권력자본론>의 입장에서 오로지 계급 관계를 '사회적 관계 일반'과 동일시해버리는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은 사실상 노자 관계 이외의 여타 사회적 관계에서 작동하는 권력에 대한 설명을 방기하는 것이며, 이는 노동자 이외의 다양한 종류의 사회적 불평등과 억압이 자본 축적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또한 도외시하는 결과가 된다고 비판하게 된다.

결국, 서평자의 비판의 논지와 <권력자본론>의 논지는 서로 정반대로 엇갈려 있다는 것이 책을 번역한 입장에서 뚜렷이 보이기에, 차후의 생산적인 논쟁을 위해서나 또 <권력 자본론>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를 피하기 위해서나 위의 점을 지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다시 한번 중요한 논점을 제기해주신 박승호 박사에게 감사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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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끝나"고 "문명이 충돌"할 때 미국이 한 일은?
홍기빈의 '현미경과 망원경' <20> 미정부-월가-헤지펀드 네트워크의 탄생
2004-07-21 오후 6:18:04
III. 어제의 세계 : 지구화, 인수 합병, 신자유주의

⑤ 인수 합병 축적 양식의 사회적 조건과 한계

클린턴 시대의 달러-월 스트리트 레짐

그런데 여기서 꼭 기억하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이렇게 코스모폴리탄적인 외양을 취한 90년대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미국이라는 일국의 국익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라는 점이다.

'공식적 담론'만이 진실이라고 믿는 '모범 시민'이라면 90년대의 워싱턴 컨센서스의 주장 그리고 그에 따라 변해가는 지구촌의 실제 세계가 아마도 "기술 진보와 인류 이성의 발전에 따른 역사의 불가항력"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는 깨자마자 커피를 마시며 지구촌 이곳저곳의 '황소(bull)'와 '곰(bear)'의 이야기를 듣고 하루를 시작한다. 직장의 꽃 피는 화제는 뮤추얼 펀드와 닷컴 창업 이야기이다. 집에 돌아와 읽는 교양 서적은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역사는 끝났는가>나 사뮤엘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따위의 교양 서적을 읽으며 하루를 정리한다.

하지만 이 어떤 것도 이러한 현상을 추동하는 구체적인 인간 집단의 노력이 없다면 결코 벌어지지 않는다. 이 명제를 믿지 않는 사람은 필시 모종의 '신의 섭리'를 믿는 종교인이거나 '역사의 발전 법칙' 따위를 믿는 구닥다리 헤겔주의자 공산주의자밖에 없다. 헤겔의 거대한 철학 체계의 중심에서 가장 빗나간 명제를 그것도 알렉상드르 코제브(Alexandre Kojeve)가 프랑스 정권과 학계를 오가면서 그 필요에 따라 멋대로 변형해놓은 데에다 또 다시 알란 블룸(Alan Bloom)이라는 악명 높은 보수주의자의 시각으로 굴절시킨 후, 또 다시 어거지로 굽혀진 니체의 명제랑 칵테일 해놓은 이 후쿠야마의 책을 읽고서 진지한 철학을 가진 독자라면 진저리를 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게다가 거두절미 설명도 없이 일본을 갑자기 아시아와 독자적인 '문명'이라고 우기는 무식한 주장을 오로지 하버드 교수라는 이름 자리로 밀어붙이고 있는 헌팅턴의 책은 독자로 하여금 문자와 종이의 발명 자체에 대한 회의를 일으킨다. 그런데 이 책들은 90년대 지구촌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된다. 그러면 식민지 신문의 지식인들은 이 두 사람을 '석학(碩學)'이라는 명칭을 붙여 하늘로 떠받들기에 바쁘다. 기자들은 잘 읽지도 않고서 알쏭달쏭한 어휘로 찬사를 남발하고, 지식인 범주에 끼는 데에 혈안이 된 이들은 이 저자들의 권위에 도전할 불경한 생각 따위는 추호에도 없다.

하지만 이 두 권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과정에는 CIA 의 출연 기관인 랜드 회사(Rand Corporation)가 있고, 출판, 방송, 언론을 하나로 꿰어 90년대에 출현한 각종 미디어 거대 기업(conglomerate)이 있다. 그리고 이 두 권의 책이 정당화시킨 90년대 미국의 세계 전략 ? 워싱턴 컨센서스 그리고 그럼에도 계속되는 미국의 군사화 ? 이 있다. 아마도 이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하버드 대학, 뉴욕 타임스, 퓰리처 상 등등의 이름이 동원되면 사대주의에 찌든 주변부의 지식계는 그대로 이 책을 성전으로 받아들이고 "멈보점보(mumbo jumbo)"를 외치기 시작한다는 것을①.

책 두어 권이 이러하다면, 그토록 미증유의 위력을 발휘한 워싱턴 컨센서스와 지구화에 미국 정부가 손 털고 물러나 있었다고 생각하는 쪽이 부자연스럽다. 여기에서 피터 고완(Peter Gowan) 등이 주장하듯이 이미 70년대 초부터 형성된 바 있는 미국의 '달러-월 스트리트 레짐(Dollar-Wall Street-Regime)'의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②.

1971년 닉슨 대통령의 달러-금 태환 중지 선언 이후 세계 통화 체제는 현실적으로(de facto) 달러 본위제로 운영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원래 유사 이래 통화 발행을 독점할 수 있는 권력은 그에 따른 권력(seignorage)을 쥐게 마련이다. 미국이 이를 이용하지 않았다고 하면 더 이상한 일이다. 이미 1971년 직후 시카고의 농산물 시장 등에 존재했던 선물 옵션 시장은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달러와 세계 외환 선물 시장으로 변모하였다. 여기에 80년대부터 꾸준히 지속된 미국 내의 금융 탈규제는 미국이 변화된 세계 금융 환경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는 제반의 조건을 성숙시켰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피터 고완은 이러한 조건을 미국의 국익을 위해 체계적으로 활용할만한 계획이 미국 국가 차원에서 구체화된 것은 클린턴 행정부였다고 보고 있다③. 골드만 삭스 은행 출신의 루빈 재무장관을 위시하여 현재 하버드 대학 총장으로서 최근 "70년대 서울의 100만 10대 창녀 부대" 발언으로 망신을 한 바 있는 로렌스 서머스 그리고 물론 연방 준비 위원회의 앨런 그린스펀 등으로 짜여진 드림팀 내각은 이러한 워싱턴 컨센서스의 결과 엄청난 규모로 불어난 국제 금융 자본의 흐름을 십분 이용할 수 있는 정부 ? 월 스트리트 ? 헤지 펀드의 네트워크를 구성했다는 것이다.

90년대에 몇 번이나 국제적 문제가 되었던 조지 소로스 등등의 헤지 펀드(hedge fund)의 위험성에 대한 공식적 담론의 입장은 아주 명쾌한 것이다. 시장은 기본적으로 수익성과 효율성을 따라 움직이는 기적적인 기구이다. 그리고 금융 시장에서의 가격 부침은 그러한 '실물' 시장에서의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할 뿐이다. 투기와 헤지 펀드의 움직임은 그러한 대세의 흐름을 조금 앞서서 표현해주는 '제비'일 뿐이지 계절 자체를 만들어내는 실세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깡드쉬나 스탠리 피셔 같은 IMF 관리들의 성명이었다.

과연 그랬을까. 90년대에 전 세계를 누볐던 유명 헤지 펀드로 타이거 펀드, 조지 소로스의 퀀텀 펀드, LTCM(Long Term Credit Management fund)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이 이런 저런 나라의 통화 등을 건드리면서 움직일 수 있었던 돈의 규모가 과연 그런 '제비'에 불과한 소량이었을까. 이들 펀드의 자본 자체는 제한이 되어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들이 그 워싱턴과 월 스트리트의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미국의 은행들로부터 차입할 수 있는(물론 이들 은행의 대부는 연방 준비위와 완전히 무관하게 벌어질 수 없다) 금액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IMF 자체가 이미 공식적으로 이들 헤지펀드가 자신들 자본의 20배의 액수를 은행에서 레버리지로 차입하여 움직인다고 인정한 바 있고 조지 소로스는 자신이 차입할 수 있는 은행 융자의 크기를 50배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파산해버린 LTCM의 경우 그 크기를 따져보니 250배에 달했다는 것이 밝혀진 바 있다. 주요 헤지 펀드의 자본금 총액은 당시 대략 3천억 달러로 잡고 이들의 레버리지 융자의 크기를 대략 100배로 잡는다면, 결국 이들이 미국 금융망을 이용하여 움직인 돈의 크기는 30조 달러 정도였다고 할 수 있다④. 물론 이들 헤지펀드가 완전히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이 크기의 자금은 결코 '제비'라고 할 수도 없음은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미국 정부도 워싱턴 컨센서스에 포괄된 인사들도 이러한 전지구적인 상품화와 금융 자본의 축적이 아무런 사회적 충돌없이 벌어질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은 사람들일 수는 없다. 이미 이들은 80년대 중반 멕시코나 다른 개발도상국의 '구조 조정' 경험 속에서 어떤 사회적 반항이 조직될 수 있는지를 충분히 경험한 바 있다. 그래서 이들은 그 사회적 반동을 흡수할 수 있는 각종의 전술을 백방으로 마련해 두어야 했다. 이러한 전술을 이론적 실제적으로 지도하고 뒷받침하여 전 세계적 지구화가 무리 없이 진행되도록 하는 것도 미국 정부의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이었다⑤.

<주(註)>

①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자신들이 알지도 못하는 어떤 대상을 두려워하면서 그걸 달래기 위해 우르르 엎드려서 외치는 주문을 흉내내는 소리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게 유럽인들에게 그렇게 보인 것인지 실제 아프리카의 관습인지는 물론 알 수 없다. 하지만 서양과 미국에서 나온 이야기라고 하면 별 생각 없이 우선 그 앞에 달려가 108배를 바치기 바쁜 21세기 주변부 지식인의 모습을 지칭하는 데에는 아주 요긴한 단어이다.

② Peter Gowan, Global Gamble: Washington's Faustian Bid for World Dominance, (London: Verso, 1999). 이 책은 <세계 없는 세계화>(홍수원 옮김, 시유시, 2001)로 국내에 번역됐다. 저자는 New Left Review의 편집자를 역임했다.

③ 같은 책, 39쪽.

④ 같은 책, 96~98쪽.

⑤ 이러한 지구화에의 반항에 대한 각종 대응 전술에 대해서는 John Williamson ed. The Political Economy of Policy Reform, (Washington D.C.: Institute for International Economics,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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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우리를 막을 수 있겠는가?"
홍기빈의 '현미경과 망원경' <19> '상품화'에 대한 맹신과 '워싱턴 컨센서스'
2004-07-19 오전 9:49:14
III. 어제의 세계 : 지구화, 인수 합병, 신자유주의

⑤ 인수 합병 축적 양식의 사회적 조건과 한계

앞에서 보았듯, 세계적인 '지배적 자본'에 있어서 90년대의 주요한 자본 축적 양식은 지구적 규모에서의 대규모 인수 합병이었다는 것이 닛잔/비클러의 진단이다. 그런데 이러한 '넓이 지향' 양식으로의 자본 축적이 벌어지려면 어떠한 사회적 조건이 창출되어야 하는 지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자본이란 기본적으로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는 칼 마르크스의 통찰은 근대 경제학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중차대한 핵심을 찌르고 있다. '경제'란 사회적 관계와 동떨어져서 움직이고 있는 '별유천지비인간' 같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특정한 몇 몇 기업이 엄청난 규모의 자본 축적에 성공했다는 것은 곧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관계의 변형과 재구성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마르크스가 19세기 자본주의의 축적 과정에서 주로 착목했던 그 '사회적 관계의 변화'는 무산 계급의 창출과 기계제 공장 생산의 확장이었다. 그런데 1990년대의 지구적 규모의 인수 합병과 금융 자본 팽창을 통한 자본 축적 과정이 가져온 사회적 관계의 변형과 창출은 그보다 훨씬 더 포괄적인 것이었다.

이 장에서는 잠깐 그래프와 숫자 등의 '좁은' 의미에서의 경제 현상에서 시야를 돌려 그러한 사회적 조건의 창출과 변형이 어떠한 것이었고 또 그 한계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자.

'상품화'란 무엇인가

'시장화(marketization)'나 '상업화(commercialization)'와 구별되는 '상품화(commodification)'라는 말은 80년대 이후 비판적 사회과학계 등에서 주로 쓰이게 된 말이지만, 그 의미를 깊이있게 규정한 사람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적 관계의 상품화'라는 표현은 아마도 80년대 이후 지구적 규모에서 진행되어 온 경제적 변화의 사회적 성격을 가장 효과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상품'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이 질문은 간단해 보이지만 실제 대답하려고 보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냥 '시장에 쌓여 있는 물건' 즉 '팔려고 내놓은 물건'이라고 하면 되지 않느냐고 할 지 모른다. 그런데 '팔려고 내놓은 물건이 상품이다'라는 말은 그 '상품'이라는 단어를 길게 풀어놓고 있는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이런 대답을 누가 못하겠는가. 문제는 그 '팔려고 내놓은 물건'이란 도대체 어떤 물건(물론 가시적인 물건이 아닐 수도 있다)이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물건들을 아무리 관찰해보아도 ? 마르크스의 유명한 표현대로 '저고리를 아무리 이리저리 헤집어 보아도' ? 그 물건의 가시적 속성에서 '상품'의 성격을 찾을 수는 없다. 가격표가 붙어 개시장에 진열된 개고기 한 근이나 어제 개천가에서 동네 형들이랑 몰래 잡은 옆집 복돌이 고기나 똑같은 맛과 색깔의 개고기일 뿐이다. 결국 그 '상품'이라는 규정성은 무언가 복잡한 형이상학적인 문제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이 '상품'의 문제가 형이상학적 문제임을 최초로 간파한 사람은 칼 마르크스보다 몇 천년 전의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는 시장에 나와 있는 상품들을 가만히 보면, 두 개의 전혀 무관한 '목적인(final cause)'이 같은 물건 안에 공존하고 있음을 본다. 똑같은 짚신이라도 내가 신으려고 내가 꼬은 짚신에는 "발이 편해야 맘이 편하고 일이 잘 된다"는 오로지 하나의 목적만이 녹아 들어 있다. 그런데 오늘밤 한 잔 걸쳐보려고 술값 마련을 위해 그 짚신을 아고라 길바닥에 내걸었다면, 거기에는 "술 먹을 돈을 마련하고 말리라"는 다른 목적이 덧씌우게 된다. 즉, 어떤 물건이 본래의 쓰임새와 됨됨이와 무관하게 "화폐를 조달하는 수단"으로 변형된 것이 상품이다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 말도 별로 대단할 것 없는 뻔한 말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정치경제학적 함의를 끌어낸다. 인간 세상과 우주의 그 어떤 존재도 "무에서 생겨난 것"이 없으며, 또 아무런 쓸모 없는 물건이 생겨나는 법도 없다. 자연도 사회도 꼭 필요한 물건만을 만들어내어 꼭 필요한 데에 사용하는 "인색함(parsimonious)"을 그 본성으로 한다. 그래서 하나의 물건에 두 개 이상의 다른 목적이 공존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지금 상품이 되어 길바닥에 나와 있는 저 물건들은 원래 그 물건을 만들어낸 자연적 사회적 과정에 녹아들어 있는 본래의 쓰임새가 있으며 또 그 됨됨이(형상)는 그 목적에 부합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런데 그런 일련의 자연적 사회적 과정에 갑자기 "돈벌이"라는 엉뚱한 목적이 천둥에 개 뛰어들듯 낑겨들어 있는 것이 상품이다. 따라서 어떤 물건이 시장에 나 앉게 되면 조만간 그 "돈벌이"라는 목적이 그 물건의 자연적인 목적 ? 신발의 경우 발과 맘을 편하게 하여 일을 돕는다 ? 을 압도하여 쫓아내는 일이 벌어질 것이고, 결국 "발이 편하건 말건 잘 팔리면 그만"이라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비극은 그 상품에만 벌어지지 않는다. 그 상품을 만드는 활동이라는 것도 본래의 예술적 창의적 활동이 아닌 기계적인 "돈벌이 활동"으로 전락하게 되고, 결국 그 물건을 낳은 자연적 사회적 과정 전체가 변질되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우려가 근거없다고 생각되는 이들은 삼풍백화점과 성수 대교를 상기하기 바란다. "튼튼하고 안전"해야 할 구조물 본래의 목적이 어떻게 "돈벌이" 과정으로 인하여 변질되었을 때 어떤 황당한 사태가 가능한가를.

"상품"이라는 것의 형이상학적 원리를 따져본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래서 겉보기에는 단순해보이는 이 시장과 상품화라는 현상이 계속 확장될 경우엔 기존의 사회적 관계 전체를 변질시키고 마침내 해체시킬 것이라는 강한 우려를 표명한다. 그의 시대의 아테네가 본래의 정치 공동체의 모습을 잃고 계속 붕괴되어 나가는 것도 이러한 시장 관계의 확장과 무관하지 않다고 그는 보았던 듯 하다①.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 방식을 발전시켜서 20세기의 세계 자본주의의 상품화 현상을 한층 더 날카롭게 분석하는 틀을 제시한다. 먼저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상품 철학의 연장선에서 상품이란 '애초부터 판매할 목적으로 생산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주 심각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짚신이나 개고기는 아예 처음부터 "내다 팔아 돈을 사리라"는 목적에서 생산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시장에서 거래하고 있는 존재들을 보면 그런 목적에서 생산할 수 없는 것들 그리고 숫제 인간이 생산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이 들어가 있다. 최근 경매 싸이트에서 화제가 된 "소년의 동정(童貞)"같은 것은 특이한 예로 보아 넘어가두자. 폴라니가 보기에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가장 근간이라 할 세 가지의 요소 시장, 즉 노동 시장, 토지 시장, 화폐 시장의 상품 즉 인간, 자연, 사회적 구매력이라는 것은 그렇게 "판매를 위해 생산"될 수 없는 대표적인 존재들이다. 하지만 경제 원론을 공부한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이 세 가지 상품이 시장 가격으로 자유롭게 매매되지 않는 한 시장 경제의 자기 조정 메카니즘은 결코 작동할 수가 없다. 결국 시장 경제의 작동을 위해서는 이 세 가지를 마치 상품인 것처럼 가정하고 자유롭게 매매하게 하는 '상품 허구(commodity fiction)'를 법적 정치적으로 제도화할 수밖에 없다고 폴라니는 말한다②.

이러한 폴라니의 논리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상품화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고발하는 정도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차원의 사회 변혁을 가져온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인간, 자연, 사회적 구매력등을 골간으로 구성되는 '사회 조직' 자체를 아예 상품으로 만드는 것이 자본주의적 상품화의 본질이라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 전력과 같은 국영 기업의 사유화나 우리 나라 은행의 외국인 소유 같은 문제를 따져보자. 두 경우의 조직 모두 그 고정 자산의 형성부터 각각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생산과 판매 모두에서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사회 조직과 물고기와 물 이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한 부분들이다. 그런데 한국 전력을 사유화하여 그 소유권을 주식 시장에 '내다 판다'는 것은 정확하게 무슨 뜻인가. 한국 전력이나 은행 등의 조직의 안팎을 통과하고 있는 사회적 관계의 흐름을 '자본화'라는 방법을 통해 '상품화'하는 것이 아닌가. 이제 더 많은 돈을 내고 그 '상품'이 된 한국 전력의 '주주'가 된 자들이 그 사회적 관계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러한 '사회적 관계의 상품화'를 더 많이 확장하는 것이 바로 20세기 끝 무렵 '지구화'의 이름으로 행해졌던 '넓이 지향' 축적 양식의 사회적 조건이었다.

워싱턴 컨센서스

이 III 장의 첫 부분에서도 잠깐 보았듯이, 이러한 '사회적 관계의 상품화'를 맹신하였던 19세기의 고전적 시장 자본주의는 기존의 사회적 관계를 거침없이 파괴하여 그 여파로 사회주의 혁명, 파시즘, 양차 대전이라는 일대 혼란을 낳고 말았다③. 따라서 브레튼 우즈 통화 체제와 GATT 를 양 축으로 하여 2차 대전 이후에 복구된 세계 경제 질서는, 그 전과 달리 각 나라의 통화 주권과 자국 산업의 보호의 여지를 넉넉히 허락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고 있었다. 즉 세계적 규모에서 또 각국 내부의 차원에서 시장 경제의 작동이 다시 정치적 사회적 관계의 맥락으로 묻어들어갈(embedded)'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④.

그런데 80년대 들어와서 지구 정치 경제는 다시 '전면적 상품화'의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첫째, 50년대와 60년대에 미증유의 장기적 경제 호황을 구가했던 미국과 유럽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70년대에 들어와서 인플레이션과 실업율이 함께 오르는 소위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을 겪게 된다. 이에 자본 측은 사뮤엘 헌팅튼 등의 보수 정치학자들의 "민주주의의 과잉"론과 밀튼 프리드만 등 통화주의자(Monetarists)들의 "케인즈 경제 정책의 종언"론을 앞세워 고전적 자유 방임주의로의 회귀를 요구하게 된다⑤. 노사 협조에 근간한 전후의 수정 자본주의 형태는 노동 조합과 여타 사회 집단들이 민주주의라는 미명하에 자율적 독립적으로 움직여야 할 시장 경제에 지나친 간섭을 해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나친 복지 재정 정책과 경기 부양을 위한 느슨한 통화 정책이 사회 전체의 이완과 혼란을 가져왔고, 당시의 경제 위기가 그 집약적 형태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영국의 대처와 미국의 레이건 정권을 필두로 하여 80년대 서방 국가들의 정치 경제 정책이 신 보수주의 혹은 신 자유주의 정책의 방향으로 대 전환을 이루게 된 계기이다.

제 3세계 나라들에도 변화의 물결이 덮치게 되었다. 198년 모라토리움을 선었했던 멕시코를 필두로 엄청난 금액을 차입한 무수한 개발 도상국들이 줄줄이 외채 위기에 처하자 돈을 빌려준 서방의 은행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이들은 채무의 보전과 지불 능력의 확보를 위해 IMF등을 앞세워 이 나라들의 내부 정치 경제 구조를 거칠게 바꾸어 나가는 '구조 조정'을 시작하였다. 70년대까지 제 3세계 국가들에 일반적이었던 민족주의에 기반한 '국가 자본주의' 형태 체제는 첫 번째 청산 대상이었다. 먼저 외환 가지 안정과 외환 보유고 확보라는 단기적 목표를 위해 '화폐적 접근(monetary approach)'을 앞세운 IMF가 들어간다. 이에 살인적인 긴축 재정과 고금리 통화 정책이 강제되었고, 이에 따라 사회 복지 지출의 감소, 대규모 국영 기업의 사유화(외국 은행에게 고스란히 넘어가는 일이 많았다), 소비의 감소, 중소 기업의 파산 등의 현상이 줄을 이었다. 그 다음엔 장기적인 '구조 조정 계획(Structural Adjustment Program:SAP)'을 앞세운 세계 은행(World Bank)이 들어가서 '내다 팔 수 있는 것은 모조리 내다 파는' 개방 무역형 체제로 경제 구조를 바꾸어 버린다.

90년대가 되자 이 변화의 물결은 제 2세계, 즉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마저 휘감아버렸다. 공산주의가 무너진 이후 시장 경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서방의 정치가들과 학자 관료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이 시장 지향적 개방 경제 체제가 관철되도록 적극 개입하였다. 이리하여 80년대의 지구 정치 경제는 다시 '전 지구적인 상품화'를 지향하는 19세기 형의 고전적 자유주의 체제로 급격하게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90년대 초가 되면 전 세계 각국의 주요 정치가, 관료, 학자, 지식인들 사이에 각국 내부 또 지구적 차원의 정치 경제 체제 전환의 방향에 대하여 일정한 공감과 합의가 도출된다. 이것이 저 유명한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이다.

이 논란의 여지가 많은 용어에 대해 폴 크루그만(Paul Krugman)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말은 미국 정부 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상 세계의 수도인 워싱턴에 중심을 둔 IMF, 세계 은행, 각종 연구소들(think tank)과 같이 정치적 안목을 갖춘 투자 은행가들, 현실 감각있는 각국 고위 재무 관료들 등 세계 여론 지도층들이 모여 시기마다 주도적인 담론을 집단적으로 규정하는 모든 네트워크와 제도들을 총칭하는 것이다."⑥

이러한 초국적적인 "워싱턴 컨센서스"가 지향했던 지구 정치 경제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몇 가지만 추려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우선 WTO 등을 앞세워 무역의 완전 개방을 이상으로 삼는다. 시장의 합리성의 논리를 들어 국유 기업의 사유화를 지지한다. 사회 복지 지출의 삭감 등을 통한 균형 재정 그리고 엄격한 통화 정책 등을 통하여 화폐 가치의 안정에 주력하며, 많은 개발 도상국의 경우 달러와 같은 기축 통화의 가치에 자국 화폐의 가치를 아예 연동시키도록 권장한다. 탈규제의 논리를 들어 금융 시장의 분할(compartmentalization)을 무너뜨리도록 하고 대외적으로 개방하며, 투자자와 기업 활동에 최대한의 자율권을 보장한다.

이 '워싱턴 컨센서스'가 바로 90년대의 신자유주의적 지구화가 표방했던 이념이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누가 냉전이 끝나면서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갔다"고 했던가. '이데올로기'란 단순한 의견이나 세계관이 아니라 거기에 맞추어 인간 세상을 뜯어고쳐야만 하는 아주 정치적 물질적인 관념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 '워싱턴 컨센서스'는 그런 의미에서 아마도 역사상 가장 큰 규모에서 작동했었던 이데올로기였다고 할 수도 있다. 역사상 이렇게 "전 지구"라는 규모에서 실제로 세상을 바꾸어 놓고 지구촌 구석구석 모든 부분까지 인류의 생활 양식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킨 이념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도 경제적 민족주의도 모두 사라진 이상 그것을 막을 힘은 아무 것도 없는 듯 했다. 다임러크라이슬러(DaimlerChrysler)의 합병 계약 자리에서 어느 중역이 했다는 다음의 말은 그 승승장구의 '그들'의 분위기를 잘 전한다. "이제 누가 우리를 막을 수 있겠는가?(Now, who's gonna stop us?)".

<주(註)>

①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 사상에 대해서는 졸저,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책세상, 2001) 참조.

② 칼 폴라니의 경제 사상에 대해서는 칼 폴라니,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 경제인가>(홍기빈 옮김, 책세상, 2002) 참조.

③ 이러한 시장 자본주의의 지구적 확장이 야기시킨 20세기의 '대변형'이 칼 폴라니의 고전적 저작 The Great Transformation: The Political and Economic Origins of Our Time, (Boston: Beacon Press, 1957)([거대한 변환](민음사, 1992))의 주요 테마이다.

④ 이 말은 칼 폴라니가 시장 자본주의 이전 사회의 경제적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쓴 용어이다. 존 러기(John Ruggie)는 이 말을 빌어 2차 대전 이후의 세계 시장 자본주의의 성격을 '묻어들어간 자유주의(embedded liberalism)'이라고 부른 바 있다. John Ruggie, "International Regimes, Transactions, and Change: Embedded Liberalism in the Postwar Economic Order" International Organization, 36(2), Spring, 1982.

⑤ M. Crozier, S. P. Huntington and J. Watanuki ed., The Crisis of Democracy, (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1975). Milton Friedman, Milton Friedman's Monetary Framework: A Debate With His Critics R. J. Gordon ed.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4)

⑥ Paul Krugman, "Dutch Tulips and Emerging Markets", Foreign Affairs, July/August, 1995. 28-9pp. 로버트 콕스와 같은 국제 정치학자도 80년대 중반에 이렇게 전 지구적 규모의 상품화를 지향하는 초국적적인 네트워크가 나타나고 있음을 관찰한 바 있고, 그 네트워크가 내부의 사정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뿌옇게 가려진 성운(nbuleuse)"라고 부른 바 있다. Robert Cox, Production, Power, and Social Forces,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7)
Posted by 중년하플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