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0.08.16 The Storytelling Animal
  2. 2020.05.19 Psychoanalysis and Zen Buddism
  3. 2020.03.03 Psychoanalysis and Religion

The Storytelling Animal

2020. 8. 16. 19:50 from Lectura

  • 2020.8, Jonathan Gottschall 지음

 

사람들이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하다. 사람들은 차가운 통계와 과학이 아닌, 맥락을 갖춘 이야기라는 틀을 통해 세상을 살아간다. 스스로의 삶에 대해서, 주변 사람에 대해서, 뉴스를 통해서 주인공과 드라마를 만들어 낸다.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의식주를 해결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남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야기에 몰입해서 보낸다. 소설, 드라마, 게임, 영화, 뮤지컬, 주변 사람에 대한 가십까지도 따져보면 모두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단순히 남는 시간을 채우는 오락거리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세상을 해석하는 틀이다.  다니엘 카네만의 ‘생각에 관한 생각(Thinking, Fast and Slow)는 우리 뇌가 사실보다는 픽션에 기반하여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우리 안에는 과학자와 소설가가 있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소설가로 보낸다. 이와 같은 호모 사피엔스의 이야기 중독은 어디에서 왔을까? 이런 습성은 과연 생존과 진화에 도움이 될까?

 

저자는 이 책에서 왜 우리가 이야기에 좋아하는지 가설을 제시한다. 몇 가지 증거를 통해 이야기가 단순한 현실 도피나 시간을 때우는 행위가 아닌, 복잡한 사회 관계를 잘 헤쳐나가기 위한 시뮬레이션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이론이 그것이다. 가치 있는 이야기는 주인공이 어려움을 만나 해결하는 형태를 하고 있다. 우리는 주인공의 여정을 통해 유사한 상황에서 각자가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지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 It seems plausible that our continuous immersion in fictional problem solving would improve our ability to deal with real problems.

  • In one study, they found that heavy fiction readers had better social skills — as measured by tests of social and empathic ability — than those who mainly read nonfiction.

  • Trouble is the fat red thread that ties together the fantasies of pretend play , fiction , and dreams , and trouble provides a possible clue to a function they all share : giving us practice in dealing with the big dilemmas of human life.

 

현실은 너무나 많은 사실들을 내포하고 있고, 우리는 그 모든 사실들을 종합적으로 받아들여 처리할 수 없다. 때문에 그중 일부를 선별하고, 이를 인과관계 혹은 그럴듯한 인과관계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설'에 기초해서 과거를 해설하고 미래를 예측한다. 우리의 뇌가 동작하는 방식은 연역법도 귀납법도 아닌 상정 논법이다(abduction). 가끔은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우리의 능력이 너무나 뛰어나, 과거의 기억을 왜곡하기도 하고 음모론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 The storytelling mind is allergic to uncertainty , randomness , and coincidence. It is addicted to meaning. If the storytelling mind cannot find meaningful patterns in the world , it will try to impose them. In short , the storytelling mind is a factory that churns out true stories when it can , but will manufacture lies when it can’t.

  • Conspiracy theories offer ultimate answers to a great mystery of the human condition : why are things so bad in the world?

 

이야기의 현실적인 가치는 사람들이 집단으로 일할 수 있게 해주는 실용적인 면에 있을 수 있다. 거대한 이야기가 없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그룹으로 함께 일하고, 회사를 이루고, 민족을 이루고, 나라를 이룰 수 있을까? 정치인들의 연설이 그처럼 중요한 이유, 철학자들의 시대정신이 그 처럼 큰 역할을 하는 것도, 모두 스토리를 추구하는 우리 종의 특징 때문일 수 있다. 어쩌면 동물과 인간을 구분 짓는 가장 큰 특징은 지능이 아니라, ‘이야기’ 일 수 있다. 뇌에서 과거와 미래 현실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진행할 수 있는 능력. 이 능력 덕분에 인류는 집단으로 움직일 수 있었고, 결국 그 이야기들이 오늘날의 문명까지 이어져 왔다.

  • David Sloan Wilson proposes that religion emerged as a stable part of all human societies for a simple reason : it made them work better.

  • Story, in other words, continues to fulfill its ancient function of binding society by reinforcing a set of common values and strengthening the ties of common culture.

 

우리가 인생의 의미라고 하는 것들도, 단지 자신에게만 일관된 이야기일 수 있다. 융도 정신분석가의 의무 중 하나로 인생의 의미를 되찾아 주는 것을 이야기했고, 때문에 종교와 신화를 참조하였다. 

  • Psychotherapy helps unhappy people set their life stories straight ; it literally gives them a story they can live with. And it works.

  • We are , in large part , our personal stories. And those stories are more truthy than true.

 

오늘날 우리는 소설의 몰락에 대해 이야기하는 우려의 목소리를 듣지만, 이야기는 다른 형태로 모양을 바꿔 우리 일상 곳곳에 스며있다. 오히려 문제는 지나치게 자극적인 이야기에 탐닉하는 것일 수 있다. 식량이 많아지면서 몸에는 좋지 않지만, 식욕을 자극하는 당 위주의 식사가 우리의 건강을 망치는 것처럼, 이야기를 즐길 시간이 많아진 현대인들은 이야기로써의 가치보다 자극적인 소재만으로 이루어진 Junk Story의 지나친 소비로 정신적인 건강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삶의 의미에 대한 건전한 추구가 좌절된 현대인들은 인공적으로 급조된 양산형 이야기에 파묻혀 삶을 소비한다.

 

인생을 관통하는 만족할만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써 내려간 이야기에 만족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자신에게 가장 가치 있는 인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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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중년하플링 :

Psychoanalysis and Zen Buddism

2020. 5. 19. 09:55 from Lectura
 
  • 2020.5, Erich Fromm
 
기독교는 오랫동안 서구인들에게 삶에 대한 답변을 제공해 주었다. 이 세계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 라는 질문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동시에 제공했다. 근대 계몽주의의 성공으로 이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과학을 통해 제공되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기독교적 답변도 그 권위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프롬에 따르면 현대인의 정신적 위기는 계몽주의의 지나친 성공에 따른 이성의 비대화에 있다. 이성이 중세의 무지를 물리치고 과학을 발전시키고 자본주의와의 결합을 통해 폭발적인 생산성 증가를 이룩하자, 스스로 인간의 삶에서 최상위 가치 임을 선언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성만으로는 모든 삶의 질문에 답할 수 없다. 그렇다고해서 기독교가 제공하는 환상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 
 
존재의 한계를 깨달은 인간은 탈출을 시도한다. 방향은 두 가지. 퇴행하거나, 실존을 극복하고 ‘개인화’를 이루는 것이다. 퇴행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대략적인 형태를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 모성 고착: 필요를 모두 채워주던 어머니의 품으로 퇴행한다. 
  • 부성 고착: 아버지와의 동일화를 통해 분열을 극복한다. 
  • 죽음 지향: 주변의 모든 것을 소화하고 파괴하려는 충동.
  • 자아 강화: 끊임없이 자아를 확장하고 강화한다. 

 

이런 모든 형태의 퇴행이 현대의 소비주의와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보라! 일하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일 중독 수준으로 생산적인 삶을 살고 이렇게 획득한 화폐를 소비함으로써 퇴행적인 만족을 얻는 것이 전형적인 현대 소비자이다. 우리는 식탐을 통해 주변 모든 자원을 소비하고 명품과 같은 물건을 소비하면서 자아를 강화한다. 광고를 통해 전해지는 모든 메세지는 단 한가지 ‘소비하라’. 마트와 온라인 쇼핑몰은 우리의 모든 욕구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어머니이다.
 
이렇게 해서 현대인은 일/소비/과식 중독에 시달리게 되었다. 더 큰 문제는, 대중 소비주의로 인해 진정한 ‘개인화’를 위한 성장이 지연된다는 점이다. 이는 현대 사회가 일부분 조장하고 있는 면이기도 하다. 
 
  • Any society, in order to survive, must mold the character of its members in such a way that they want to do what they have to do; their social function must become internalized and transformed into something they feel driven to do, rather than something they are obliged to do.
 
즉, 사회는 개인에게 무엇이 합당한 행동/생각이고 무엇이 합당하지 않은 것인지를 내재적으로 강제한다. 끝없는 소비와 일의 일상에서 멤도는 현대인의 삶은 사회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내재화 한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에 의해 조건지어진 기계적인 반응을 벗어나야 한다. 실존을 극복하고 ‘개인화’를 통한 우주와의 합일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나르시시즘을 극복해야 한다. 자아의 한계를 깨닫고 현실 안에서 자유를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윤리적인 관점에서 선을 행하라는 것이 아니다. 퇴행적인 형태의 종교를 극복한 인간에게 선은 강제되어야 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가 선을 행한다면, 그것은 선을 행하는 것이 세계와의 합일/행복/well-being 이루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개인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중심주의와 탐욕을 극복해야 한다. 
 
  • Well - being means, finally, to drop one’s Ego, to give up greed, to cease chasing after the preservation and the aggrandizement of the Ego, to be and to experience one’s self in the act of being, not in having, preserving, coveting, using.
 
그리고 이와 같은 자아발전은 선이 추구하는 목표와도 일치한다. 
 
  • The achievement of the aim of Zen, as Suzuki has made very clear in his book, Studies in Zen, implies the overcoming of greed in all forms, whether it is the greed for possession, for fame, or for affection; it implies overcoming narcissistic self - glorification and the illusion of omnipotence. It implies, furthermore, the overcoming of the desire to submit to an authority who solves one’s own problem of existence. The person who only wants to use the discovery of the unconscious to be cured of sickness will, of course, not even attempt to achieve the radical aim which lies in the overcoming of repressedness.
 
정신분석학이나 선불교나 모두 자아의 변화를 추구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은 자아의 성숙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결국 파랑새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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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중년하플링 :

Psychoanalysis and Religion

2020. 3. 3. 11:31 from Lectura
 
  • 2020.3, Erich Fromm
 
종교가 제공해 주던 삶의 의미를 신이 죽어버린 현대 시대에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 고민한 에리히 프롬의 저작이다. 최근 알게 된 Christian Atheism이나 Jordan B. Peterson 교수의 입장과 유사한 주장이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우리가 우주를 지배하는 신에 대해서 경배해야할 필요성은 사라졌지만,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 종교 혹은 종교적인 관심은 여전히 유용하다는 것이다.  
 
  • the question is not whether man returns to religion and believes in God but whether he lives love and thinks truth. If he does so the symbol systems he uses are of secondary importance. If he does not they are of no importance.
  • Centering the religious discussion on the acceptance or denial of the symbol God blocks the understanding of the religious problem as a human problem and prevents the development of that human attitude which can be called religious in a humanistic sense.
 
과학이 이만큼 발달한 상태에서 물질계에 직접 관여하는 신이라는 개념은 너무나 시대에 뒤쳐진 생각이 되었다. 이런 생각을 여전히 지지하는 사람들은 원리주의자이거나 이단에 가깝지 않을까? 그렇다고 ‘전투적 무신론자’라고도 할 수 있는 입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다. 세상의 질서가 어떻게 되어있는가? 라는 질문의 답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삶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의 답을 도출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과거의 종교적 철학적 지식에 기반해서 우리 스스로 판단하는 수 밖에 없다. 
 
오히려 프롬이 걱정하는 것은 하루하루의 삶에 매몰되어 궁극적인 삶이란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는 현대인이다. 
 
  • While we have created wonderful things we have failed to make of ourselves beings for whom this tremendous effort would seem worthwhile .
  • The threat to the religious attitude lies not in science but in the predominant practices of daily life .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하지 않고, 현대 사회가 원하는 ‘마케팅 지향적인 성격’을 갖춘 사람들이 인간으로서의 잠재력을 펼치지 못하면서 내적 갈등에 시달리면 신경증이라는 형태로 그 갈등이 표출될 수 있다. 이런 신경증을 대했을때 증상의 치료에 집중하여 사회에서 ‘정상적인’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을 치료의 목적으로 둘 수 도 있지만, 프롬이 생각하는 정신 분석학은 이 보다 한단계 더나아가 사람들의 도덕적인 고민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을 도와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 neurotic symptoms are not isolated phenomena which can be dealt with independently from moral problems.
  • psychoanalysis shifted its emphasis more and more from therapy of the neurotic symptoms to therapy of difficulties in living rooted in the neurotic character. 
 
그렇다면 프롬이 생각하는 인간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무엇일까? 형이상학적인 기반의 도덕률에 기대할 수 도 없고, 우주만물을 주관하는 신도 의지할 수 없다면, 우리가 지향하는 삶은 어때야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다시 한번 프롬은 인본주의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 love, if we mean by love a capacity for the experience of concern, responsibility, respect, and understanding of another person and the intense desire for that other person’s growth.
  • man must strive to recognize the truth and can be fully human only to the extent to which he succeeds in this task. He must be independent and free, an end in himself and not the means for any other person’s purposes. He must relate himself to his fellow men lovingly. If he has no love, he is an empty shell even if his were all power, wealth, and intelligence. Man must know the difference between good and evil, he must learn to listen to the voice of his conscience and to be able to follow it.
 
이와 같은 목표는 직감적으로 옳게 느껴지는데, 아마도 인류 진화의 역사와 인간의 본성 때문이지, 철학적 사유의 결과는 아닐 것이다. 
 
최근 읽은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를 통해 접한 하이데거의 생각과 비교하는 것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두 사상가 모두 유사한 이야기를 약간 다르게 변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이데거가 제시한 ‘시인의 관점’과 프롬이 제시한 사랑, 자유, 독립성은 어찌보면 유사한 이야기이다. 외부 세계에 애정에 기반한 관심을 갖는 것. ‘경이’와 ‘애정’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 등이다. 
 
좀더 나아가자면 이러한 태도는 ‘돈후앙의 가르침’에서 돈 후앙이 이야기한 통제된 우행(controlled folly)과도 연관이 있다. 
 
'다른 것보다 중요한 것 따윈 없는데도, 어떤 행위를 선택헤서 마치 그것이 자신에게는 의미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거야. 통제된 우행은 식자로 하여금 자기가 하는 행동은 의미 있는 행동이라고 말하게 하고, 마치 의미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게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아. 그래서 그는 그런 행동을 끝마친 뒤에는 평온하게 물러서지. 자기가 한 행동이 선하든 선하지 않든, 성공했든 실패했든 본인은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네.'
 
잘은 모르지만 대승불교의 ‘보살’이란 개념과도 연관이 있을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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