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arius님 블로그에서 퍼옴 http://armarius.net/ex_libris/archives/2006_0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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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으로부터 도주하는 아이들

사토 마나부(지음), 손우정/김미란(옮김), <<배움으로부터 도주하는 아이들>>, 북코리아, 2003 초판 1쇄, 2005 초판 2쇄.


중앙대학에서 논문작성법 강의를 마치고 강남의 압구정으로 가는 길에 노량진 학원가를 지나가게 되었다. 공부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이 있는 것을 처음 보았다. 남녀노소 구별이 없었다.


readmefile.draft에서 다음과 같은 메모를 읽었다.


"조선시대 고위 관료로 출세한 조상분들의 묘를 보고 뿌듯해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습니다…… 어머님은 항상 저한테'자네'라는 호칭을 쓰셨습니다. 이를테면 학창시절의 제게 '자네, 우리 집안에 정승이 3대째 끊긴 것을 아는가’라는 식의 말씀을자주 하셨습니다."

- 정운찬 서울대 총장, 월간「인물과사상」2006년 1월호에 인용된,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

(http://readmefile.net/memo/index.php/archives/124)


정운찬의 어머니가 했다는 말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공부 열심히 해야 훌륭한 사람된다' 이다.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 많고공부해서 입신 출세하겠다는 이들이 세상에 넘쳐나는데 나는 '왜 사람들은 배움을 마다하는가'라는 의문에 파묻혔다. 이 의문을 다시쓰자면 '순수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지식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배움을 추구하는 이를 발견하는 일은 왜 어려운가'이다.노량진을 목격하고 정운찬의 인터뷰를 읽은 뒤 이러한 의문은 더욱 강해졌다. 안타깝게도 정운찬은 대학의 총장이라지만 내 의견에별다른 대답을 내놓지 못할 듯하다. 나의 질문을 들은 김성열은 사토 마나부의 책을 추천하였다. 김성열은 Edu-Fascism을주제로 석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다.


이 책은 "'배움'으로부터 도주하는 아이들"과 "학력을 묻는다", 두 편의 글로 되어 있다. 중복이 없지 않으므로 앞의글을 '동아시아형 교육은 무엇인가', '사회변화와 교육개혁의 실패', '공부에서 배움으로'의 순서로 정리하였다.

동아시아형 교육은 동아시아의 정치.경제.사회.문화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지주형은 이 점을 명료하게 정리한 바 있다:"국가주도-압축성장/근대화-수출주도-저임금 노동", "사회적 상상력 및 비판적 사고 능력의저발전"(http://moraz.egloos.com/1181191).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저자의 논의를 살펴본다. "동아시아형교육 근대화에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압축된 근대화'라는 것이다... 동아시아 나라들은 신분, 계급과 계층차이를 넘어 모든 국민에게 교육 기회를 보장하고 교육에 의한 사회 이동 유동성을 높임으로써 국민 통합과 산업화를 한꺼번에추진했다... 현재 동아시아 교육 위기를 살펴볼 때 압축된 근대화라는 동아시아형 근대화의 종언과 파탄은 중요한 요소가 될것이다." 한국의 압축적 근대화에서도 교육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지주형이 지적하듯이 그것이 만들어놓은 "값싼 양질의노동력의 실체란 본질적으로 저임금에 서구자본이 시키는 일 그대로를 말끔하게 작업하는 그런 노동자"일 뿐이었다.


압축적 근대화의 두번째 특징은 "경쟁교육이다... 동아시아 나라에서 교육은 경쟁이 주요 동기가 되어 추진되었다. 이에따라교육에서의 민주주의 원리도 왜곡되고 있다. 교육의 권리란 경쟁에 참가하는 권리이며, 교육의 평등이라 경쟁 기회의 평등인것이다." 세번째 특징은 "산업화와의 친화성이다. 경쟁원리를 통한 '압축된 근대화'는 산업주의 사회의 급속한 발전과 평행하여진행되었다. 급속한 산업화는 소수의 지적 엘리트와 다수의 단순 노동자라는 피라미드형의 노동시장을 형성하였으며, 이 피라미드형의노동시장은 입시경쟁에 따른 피라미드형의 학력구조와 일치하고 있다." 이 세번째 특징은 첫번째 것을 부연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이처럼 동아시아에서는 산업 자본주의의 요구에 부응하여 "대량의 지식을 획일적.효율적으로 전달하고, 개인간의 경쟁을 조직하여확실하게 습득시키는 교육을 추진해왔다. 생산성과 효율성을 내걸고 대량생산을 실현하는 대공장시스템의 학교교육을 추구해온 셈이다."


이러한 교육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중앙집권적 관료주의적 통제"가 필요한데 이때 "학교는 국가체제의 말단기구이며교사는 국가정책의 충실한 수행자"의 기능을 한다. 이것이 네번째 특징이다. 또다른 특징은 "교육의 공공성이 미성숙하다는점"이다. 이는 국익중심의 국가주의와 이기적인 개인경쟁이라는 양대 축 사이에서 탈락된 요소이다. "공공권은 본래 국가와 개인의중간지대인 사회권(society), 그중에서도 자립한 개개인이 서로 원조.협력하는 협동사회(association)를 기반으로하여 성립"하는 것이다. 이것은 여섯번째 특징으로 거론된 것인데, 사실상 동아시아의 교육만이 아니라 사회의 전형적인 특징, 즉국가와 그것에 의해 획일적으로 조직된 원자적 개인만이 있을 뿐 시민사회라는 근대적 개인의 자율성 영역의 결여는 국익중심 교육의필연적 귀결임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서 평소에는 지극히 이기적인 행태를 보이다가도 특정 사안에 대해서는 극도의 애국주의적 광기를발산하는 '국민'들은 이러한 교육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개발과 성장이라는 위선적 구호로 상징되는 압축적 근대화는 파탄에 직면한지 오래 되었으며, 그에따라 그에 상응하던 교육모형도무너졌으나 새로운 모형은 만들어지지 않은 채 파탄의 현상들이 만연해 있다. 동아시아적 교육을 받은 사회구성원들은 그 누구도새로운 모형을 만들어낼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동아시아적 교육을 받은 이들은 이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여아웃사이더가 되거나 자신의 학벌자산을 활용하여 상층부로의 이동을 꾀하고 있기도 하다.


이 파탄의 현상들을 정리하기로 하자. 저자가 가장 먼저 거론하는 것은 이 글의 제목이기도 한 '배움으로부터의 도주'이다.학생들이 더이상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머지 현상들은 이것의 원인에 해당하거나 파생현상들이다. 그러면 왜 공부로부터도망가는가? "이제 대다수의 아이들은 학교교육을 통해 부모보다 높은 교육력을 획득할 수도, 부모보다 높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할수도 없다." 이것이 이유이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동아시아형 경제 모형과 교육모형이 연동되어 있었듯이, 그 파탄역시 둘의 연결선상에서 보아야 한다.


저자는 "포스트 산업주의 사회로의 이행에서 청년 노동시장이 해체되고 있으며, 그 변화가 급격"함을 지적한다. "대량의프리터(free arbeiter) 출현은 젊은이들의 근로의욕과 도덕성의 쇠퇴 때문이 아니라 급격한 청년 노동시장의 붕괴가 만들어낸 결과"라는 것도 밝혀낸다. 교육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교육개혁의 실패에 따라 "공립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입시에서 요청하는내용 사이에 격차가 생기고 그 틈새에서 사학지향의 입시경쟁이 격화되어 과외나 입시 학원 등의 입시 산업이 말 그대로 틈새산업으로보급"된다. 한국에서도 익숙하게 발견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학습내용 -- "총망라된 지식을 '넓고 얕게' 가르쳐온동아시아형 교육은 '적고 깊게' 배우는 교육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 교육과정 -- "교과의 기본적.본질적 교육내용이학년을 따라가며 반복적으로 등장하도록 '나선형 교육과정'으로" --, 학급 규모 등을 중심으로 대안을 제시한다. 이것을 하나의슬로건으로 집약하면 "'공부'에서 '배움'으로"이며, 그것을 수행할 과제는 '활동적인 배움', '협동적인 배움', '음미하는배움'이다.


나는 이러한 내용을 정리하여 김성열과 논의하였으며 다음은 그와 주고받은 이야기의 일부이다(김성열의 언급은 인용부호에넣었다): 사토 마나부는 교육을 기능적 관점에서 파악한다. '배움' -- 이는 평생교육이라는 말로 바꾸어도 무방할 것이다 --을 정착시키자, 그러면 청년실업이 줄어든다고 말한다. 그는 신자유주의적 교육정책을 비판하고 있기는 하나 결국에는 포스트산업주의적 자본주의에 기여하는 인간배출 교육 모형을 내놓고 있다. 김성열에 따르면 "자본제하에서의 교육제도는 '정당한 차이'를만들기 위한 기제"이다. 이 점을 간과한 채 이루어지는 교육에 관한 논의는 순진한 것이거나 그것을 애써 외면한 것이다. 한국의모든 대학에 프랑스의 그것처럼 번호를 붙이자는, "법과 제도를 통한 보완"을 주장하는 몇몇 '개량적 지식인들'의 해법이 이에해당한다. "전 사회를 학교화하는" 평생교육이라해도 그것의 실상은 사회 곳곳에서 자본주의의 작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교육을수행하겠다는 것으로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공부에서 배움으로 가는 것을 나무랄 일은 없다. 그러나 공부가 산업 자본주의에서 나름대로 기능하였듯이, 배움 역시 고도화된자본주의에서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게 되리라는 것을 따져보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김성열은 "교육은 구조의 통제와 행위의 자유라는이율배반적 상황을 정당화하는 매개체"라는 규정을 제시한다. 이 규정은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교육을 그 기능의 측면에서 파악한것이며, 이것이 애초의 내 의문에 대해 어느 정도 답을 제시한다. 나에게 남은 과제는 이러한 부정적 의미의 교육을 어떻게 극복할것인가, 다시 말해서 긍정적 의미의 교육 개념을 정립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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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알만한 이에게서 책을 추천받고 독서 후 정리하여 질의 응답을 통해 생각을 가다듬었다. 이 서평을 통해 그 과정을 집약하였다. 이렇게 집약된 내용을 놓고 관심있는 몇몇 사람들과 다시 토론하려 한다.


Posted by 중년하플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