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경제문제에 충동적인 남자와 결혼을 전제로 만나야 할까요

연애한 지 1년 된 30대 초반입니다. 제 남친은 돈을 너무 쉽게 낭비합니다. 명품 좋아하고 비싼 식당 찾아다닙니다. 처음엔 저도 함께 쇼핑하고 근사한 식당에 가는 게 신났고 또 시원시원하게 돈 쓰는 게 남자다워 좋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직장생활 5년간 저금 한 푼 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나이도 저보다 많고 또 연봉도 훨씬 높은 그이기에 알아서 잘하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나이도 있고 해서 당연히 결혼 전제로 만나고 있었기에 그 사실을 알고 나니 갑자기 너무 막막하더군요. 조심스럽게 물어봤더니 지금 있는 오피스텔도 전세가 아니라 월세라고 하더군요. 오히려 꼭 집이 있어야 하는 거냐면서, 죽을 때 가지고 갈 집도 아닌데 그 돈, 인생 즐기는 데 쓰면서 집 빌려 쓰면서 살아도 되는 거 아니냐고 합니다. 그렇다고 그의 집안이 넉넉한 것도 아닙니다. 다른 큰 불만은 없지만 이렇게 경제적으로 불안한 남자와 어린 나이도 아닌 제가 결혼을 전제로 계속 만나야 하는 건지 요즘 너무 고민이 됩니다. 친구들 이야기 들어봐도 다들 결혼하면 저만 고생할 거라고 합니다. 헤어지는 게 맞는 걸까요? 조언 부탁드립니다.

A

0. 경제적으로 불안한 남자, 결혼 상대로 부적합한 거 아닌가요? 이런 질문인데. 그럼 문제가 남친의 낭비에 있는 거냐. 아니. 본질적 문제는 남친의 소비 양태가 아니라 당신과 남친의 세계관, 그게 다르다는 데 있는 거다. 뭔 소리냐. 보자.

1-1. 본인 이야기 좀 하자. 왜. 글쎄. 하루 예산 5달러에 넝마 패션으로 배낭여행하던 20대 시절 어느 여름날 오후, 파리 오페라 대로변에서였다. 그날 밤 파리를 뜰 예정이었기에 시간이나 때울 요량으로 어슬렁거리던 차에 쇼윈도 속 양복 한 벌이 느닷없이 시야에 꽂혔다. 세상에. 한눈에, 매료, 됐다. 그때껏 양복 소유한 적도, 그러고 싶었던 적도 없었다. 하지만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이미 내 몸은 매장에 들어가 옷부터 집어들고 있었다. 걸쳐 봤다. 이럴 수가. 극도로, 쌈박하다. 아싸. 신난다. 그제야 택, 확인했다. 가격, 백만 원 남짓. 허걱. 남은 예산 전부다. 집에 두고 온, 여태 내 모든 복식의 총합보다 비싸다. 일정, 두 달이나 남았다. 사지 말아야 할 이유, 백만 세 가지. 쭈그리고 앉아, 5분간, 고민했다. 그리고, 샀다. 백만 원짜리 양복에 꼬질꼬질한 반팔 티셔츠 받쳐 입고 배낭, 들쳐멨다. 그날부터 4주 연속, 공원벤치에서 잤다. 물론 그 양복 입고서.

1-2. 돌아보면, 내 인생 소비기준이 결정된 게, 바로 그 5분간이다. 한 푼도 없다면. 잠은. 노숙이나 밤차로 가능하겠지. 식량은. 비상라면은 겨우 일주일치. 그럼, 어떻게든 벌어야 한단 거네. 그게 가능할까. 보장된 건, 하나도, 없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즐거움, 흔하던가. 천만에. 옷 한 벌에 이렇게 흥분한 적, 있던가. 처음이다. 그렇다면 절약한 백만 원을 향후 두 달간 숙소와 식량에, 합리적으로, 소비한다면, 그럼 지금 당장의 이 환희는, 고스란히, 보상받을 수 있는 건가. 그러게. 그럴 순 있는 건가. 이 대목서, 주춤했다. 처음 가져 본 유의 의문이었다. 지금, 바로, 이 순간의 고유한 기쁨은, 이 순간이 지나면, 같은 형태와 정도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거 아닌가. 누릴 수 있을 때, 그 맥시멈을, 누려야 하는 거 아닐까. 불안한 미래는 아직 닥치지 않았으니 내가 맞서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러게. 맞다. 그래서, 벌떡 일어나, 샀다. 식량은, 로마 숙소삐끼와 부다페스트 암달러상으로 해결했다. 역시 그 양복 입고서.


2-1. 미래란, 애초, 불안한 거다. 누구도, 모르니까. 그 공포가 금융시스템 탄생의 주역이다. 그거 통제코자 저금하고 펀드 사고 보험 든다. 당장의 즐거움 중 일부는, 그렇게 이자율과 수익률로 계량되어, 유보된다. 차후 인출될 현금으로 그 희열, 보상받으리라 믿으며. 그렇다면, 그 쾌락 중 과연 얼마를 털어, 예치할 것인가. 이 교환가치의 개인적 기준을 관장하는 게, 바로 세계관이다. 당신과 남친은 이게, 안 맞는 거고. 당신 믿음과는 다르게, 여기에, 옳고 그르고, 없다. 근검절약에 의한 부의 축적을 신의 축복으로 환산해 낸 칼뱅 자본주의는, 절묘하긴 하나, 절대적인 거 아니다. 사표 내고 전세 털어 세계일주 하는 커플들, 삶에 무책임해 그러는 게 아니라고.

2-2. 경제적으로 불안한 남친과는 헤어져야 하나요?

그러니까 이 질문, 남에게 해봐야 아무 소용 없다. 이렇게 바꿔, 스스로에게 해야 한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기꺼이 감당할 만한 가치가, 그 남친에게 과연 있는 건가. 그 남친은 경제적 불안을 감수할 만한 행복을 내게 주고 있는 건가. 그 남친과 함께라면 삶의 불확실성을 함께 맞서겠단 결의가 생기는가. 그러니까 그는, 그 양복인가. 당신에게 지금 필요한 건 그렇게 스스로 따져 볼 당신만의 5분인 게다. 그 질문에 답할 수 없다면, 결혼은, 아니다.

PS-그 양복은 ‘보스’다. 그땐 그 브랜드가 뭔지도 몰랐다. 이젠 몸이 불어 입지 못하지만 옷장 속 넘버원 아이템은 여전히 그놈이다. 지금도, 쳐다보기만 해도, 흐뭇하다.

김어준 방송인

Posted by 중년하플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