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6, 최지웅 지음

 

석유라는 주요자원을 통해 20세기 역사, 경제를 설명해주는 책. 독자 리뷰를 보니 이 방면에서 꽤 유명한 책의 내용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듯 한데, 문외한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정리가 잘된 요약이다. 현대 역사를 바라보는 전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결국 세계경제의 근본은 자원과 시장이다. 르네상스가 향신료 무역을 통해 발달했다면, 20세기 세계화의 핵심은 석유이다. 석유야 말로 20세기를 형성하고, 국제 관계를 결정지은 주요한 자원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 석유의 시대는 처칠이 모든 전함의 원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변경하면서 시작되었다. 

  • 석유의 군사적, 경제적 가치를 일찍부터 알아차린 영국은 아랍에 대한 개입을 통해 이 중요한 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자 하였다. 

  • 1, 2차 대전을 통해 주요한 열강으로 떠오른 미국은 영국의 정책을 본받아, 아랍권에 대한 헤게모니 장악을 시도하였다.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영국은 이란을 중심으로 지역적인 기반을 구축하였다. 

  • 하지만, 이란의 경우 호메이니의 집권으로인해 영국의 석유 지배권은 약화 되었다. 

  • 1,2차 석유파동은 중동국가와 이스라엘의 대립과 중독국가내에서의 석유패권을 위한 경쟁이 발단이 되었다.

  • 석유가격을 높게 유지하고자 하던 중동국가들과는 반대로 석유가격을 합리적인 수준에서 유지하는 것이 장기적인 산유국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생각을 가진 것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 장관인 야마니가 있었고, 그의 생각은 역사를 통해 옳은 것으로 증명되었다.  

  • 미국은 달러 페그제가 폐지되는 시점에서 사우디아라비아와의 협상을 통해서 국제 시장에서 원유의 지불 화폐로 달러화를 선택하게 하였다. 오늘날 달러의 기반 가치는 석유라고 볼 수 있다. 

  • 미국이 세일가스 개발을 통해 원유 생산량을 늘리자 OPEC의 시장가격 결정권은 그 힘을 잃게 되었고, 새로운 변화를 맞을 수 있게 되었다. 

 

석유 가격이 유례없이 낮아지고 미국 정부는 전례없는 규모의 양적완화를 실행에 옮기고 있는 지금, 석유와 관련된 현대 자본주의 체계가 어떻게 변화할지 무척이나 흥미로운 지점이다. 달러의 가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석유에 대한 지배권을 서서히 잃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중동 국가들은 어떤 전략을 취할까? 태양광 및 풍력을 위시한 대체 에너지 산업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무엇보다 20세기 문명의 근원 동력이였던 석유 중독을 인류는 끊을 수 있을까?

 

석기 시대는 돌이 부족해져서 끝난 것이 아니다. 석유 시대는 석유가 고갈되기 전에 끝날 것이다. - 자키 야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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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oanalysis and Zen Buddism

2020. 5. 19. 09:55 from Lectura
 
  • 2020.5, Erich Fromm
 
기독교는 오랫동안 서구인들에게 삶에 대한 답변을 제공해 주었다. 이 세계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 라는 질문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동시에 제공했다. 근대 계몽주의의 성공으로 이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과학을 통해 제공되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기독교적 답변도 그 권위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프롬에 따르면 현대인의 정신적 위기는 계몽주의의 지나친 성공에 따른 이성의 비대화에 있다. 이성이 중세의 무지를 물리치고 과학을 발전시키고 자본주의와의 결합을 통해 폭발적인 생산성 증가를 이룩하자, 스스로 인간의 삶에서 최상위 가치 임을 선언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성만으로는 모든 삶의 질문에 답할 수 없다. 그렇다고해서 기독교가 제공하는 환상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 
 
존재의 한계를 깨달은 인간은 탈출을 시도한다. 방향은 두 가지. 퇴행하거나, 실존을 극복하고 ‘개인화’를 이루는 것이다. 퇴행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대략적인 형태를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 모성 고착: 필요를 모두 채워주던 어머니의 품으로 퇴행한다. 
  • 부성 고착: 아버지와의 동일화를 통해 분열을 극복한다. 
  • 죽음 지향: 주변의 모든 것을 소화하고 파괴하려는 충동.
  • 자아 강화: 끊임없이 자아를 확장하고 강화한다. 

 

이런 모든 형태의 퇴행이 현대의 소비주의와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보라! 일하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일 중독 수준으로 생산적인 삶을 살고 이렇게 획득한 화폐를 소비함으로써 퇴행적인 만족을 얻는 것이 전형적인 현대 소비자이다. 우리는 식탐을 통해 주변 모든 자원을 소비하고 명품과 같은 물건을 소비하면서 자아를 강화한다. 광고를 통해 전해지는 모든 메세지는 단 한가지 ‘소비하라’. 마트와 온라인 쇼핑몰은 우리의 모든 욕구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어머니이다.
 
이렇게 해서 현대인은 일/소비/과식 중독에 시달리게 되었다. 더 큰 문제는, 대중 소비주의로 인해 진정한 ‘개인화’를 위한 성장이 지연된다는 점이다. 이는 현대 사회가 일부분 조장하고 있는 면이기도 하다. 
 
  • Any society, in order to survive, must mold the character of its members in such a way that they want to do what they have to do; their social function must become internalized and transformed into something they feel driven to do, rather than something they are obliged to do.
 
즉, 사회는 개인에게 무엇이 합당한 행동/생각이고 무엇이 합당하지 않은 것인지를 내재적으로 강제한다. 끝없는 소비와 일의 일상에서 멤도는 현대인의 삶은 사회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내재화 한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에 의해 조건지어진 기계적인 반응을 벗어나야 한다. 실존을 극복하고 ‘개인화’를 통한 우주와의 합일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나르시시즘을 극복해야 한다. 자아의 한계를 깨닫고 현실 안에서 자유를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윤리적인 관점에서 선을 행하라는 것이 아니다. 퇴행적인 형태의 종교를 극복한 인간에게 선은 강제되어야 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가 선을 행한다면, 그것은 선을 행하는 것이 세계와의 합일/행복/well-being 이루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개인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중심주의와 탐욕을 극복해야 한다. 
 
  • Well - being means, finally, to drop one’s Ego, to give up greed, to cease chasing after the preservation and the aggrandizement of the Ego, to be and to experience one’s self in the act of being, not in having, preserving, coveting, using.
 
그리고 이와 같은 자아발전은 선이 추구하는 목표와도 일치한다. 
 
  • The achievement of the aim of Zen, as Suzuki has made very clear in his book, Studies in Zen, implies the overcoming of greed in all forms, whether it is the greed for possession, for fame, or for affection; it implies overcoming narcissistic self - glorification and the illusion of omnipotence. It implies, furthermore, the overcoming of the desire to submit to an authority who solves one’s own problem of existence. The person who only wants to use the discovery of the unconscious to be cured of sickness will, of course, not even attempt to achieve the radical aim which lies in the overcoming of repressedness.
 
정신분석학이나 선불교나 모두 자아의 변화를 추구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은 자아의 성숙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결국 파랑새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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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식의 심리학

2020. 5. 8. 17:28 from Lectura
 
  • 2020.4, 키마 카길 지음 / 김경아 옮김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더 먹는 것과 운동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단순히 체중을 줄인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먹는 것에 따라 많은 것이 좌우된다는 것을 깨달은 후로는 더욱 조심해서 먹으려고 한다. 예를들면, 매운 음식의 경우 먹을 때는 잠깐 맛있지만, 그 뒤로는 속이 불편한 것이 좋지 않아 잘 먹지 않는다. 
 
이 책은 현대인의 상습적인 과식과 소비주의 문화를 연결해서 설명해 주고 있다. 과식이 단순히 개인적으로 과도하게 음식을 섭취하는 문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소비를 조장하는 현대 사회의 보다 깊은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이미 대부분 몸으로 느끼고 있는 사실이지만 잘 정리된 책으로 만나는 것도 결심을 새롭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끝없는 소비의 고리는 가장 먼저 초정상자극에서 시작된다. 설탕, 포르노, 광고와 같은 초정상자극은 결국 자극에 무디게 만들고, 더욱 강한 자극을 찾도록 만드는 매개체이다. 개인적인 관점에서는 삶의 여러 측면에서 초정상자극을 찾아내서 피하는 생활방식이 필요하다. 
 
  • 쾌락을 추구하는 일이 인간을 자멸로 이끌 때는 초정상자극(supernormal stimulus, 진짜보다 과장된 모형이 더 강한 반응을 이끌어내는 현상으로 동물학자 콘라드 로렌츠와 니코 틴버겐이 발견했다) 이라는 용어처럼 지나친 자극에 끊임없이 노출돼 단순한 즐거움을 더이상 느끼지 못할 때다.
 
소비문화는 이렇게 만들어진 충족되지 않는 욕망을 교묘하게 파고든다. 만족되지 않는 욕망은 또다른 소비를 통해 충족될 수 있다는 ‘약속’을 함으로써, 새로운 소비를 촉진시킨다. 
 
  • 소비문화에서 사용되는 이상화된 이미지와 서사는 그 상품이 치유해줄 것이라 여겨지는 결핍의 느낌을 우리 내면에 만든다. 이처럼 채워지지 않는 욕망은 기대를 채우려는 더 절박한 시도를 낳아 결국 소비를 증가시킬 수 밖에 없다. 곧 소비주의에 기대 심리적 욕구를 채우려 들면 과소비와 과식을 하게 된다. 
 
이렇게 범람하는 미국 소비문화의 기원을 1960년대 반문화운동의 실패에서 찾는다. 즉, 60년대 이후 시스템적인 개혁보다는 개인적인 향상에 집중한 중산층 문화가 소비주의 확산에 기여했다는 관점이다. 이런 관점은 소비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서는 개인적인 각성 만이 아니라, 시스템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 [나르시시즘의 문화]에서 크리스토퍼 래시는 나르시시즘이 널리 퍼진 동시에 매력적으로 인식되는 문화가 되었다고 말한다. “1960년대 반문화운동 이후 미국인들은 오직 개인적인 일에 틀어박혔다. 사람들은 삶을 어떻게든 의미 있게 개선할 희망을 잃었고 이제 의미 있는 일이라고는 정신적인 자기계발일 뿐이라 확신했다.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건강에 좋은 음식을 먹고 발레나 벨리댄스 수업을 들으며 동양의 운동에 몰두하는 것… 프로그램으로 승격되고 진실성과 자각이라는 표현으로 포장되는 이런 활동들은 그 자체로는 무해하지만 정치로부터 후퇴와 가까운 과거에 대한 부정을 뜻한다.”
어쩌면 이 책에서 이야기 하는 바와 같이 현대의 아주 근본적인 문제는 모든 삶의 고민을 ‘소비’를 통해 해결하려는데 있는듯 하다. 고대의 신들을 잃어버린 현대인은 소비라는 새로운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 우리는 삶 자체를 소비라는 행위를 통해 이어간다. 소비가 동반되지 않는 활동을 생각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이다. 이러한 경향은 점점 더 속도를 내고 있고, 상황을 그렇게 놔둔다면 더욱 이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 
 
  • 과소비의 해결책은 마케팅과 광고 전문가들이 우리를 설득하는 것처럼 또다른 형태의 소비가 아니라 소비를 줄이는 길밖에 없다. 
 
소비와 물질만능주의, 광고에 삶의 주도권을 내어주어서는 안된다. 그대 삶의 주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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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 The Existentialist Cafe

2020. 4. 28. 16:06 from Lectura
  • 2020.4, Sarah Bakewell
 
실존주의 철학이 무엇인지, 그 철학을 한 사람들은 누구이고 그들은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그런 철학을 했는지 이야기해주는 책. 철학자의 삶과 유리된 아이디어 설명에 그치지 않고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함께 조망하는 접근 방법을 택하고 있다. 
 
그 동안 읽으면서 울림을 느꼈던 많은 글과 이야기 저변에는 실존주의가 있었다. Jordan B. Peterson교수, 소명을 따르라 이야기한 신화학자 조셉 캠벨,  야키 인디언 돈 후앙의 가르침,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등… 실존주의라는 맥락을 알고 나니 왜 이런 주장이 나왔는지 훨씬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어찌보면 실존주의 철학은 니체 이후 절대자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시도 중 가장 성공적인 시도였고, 많은 사상과 문학이 실존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책에 따르면 실존주의는 키에르케고오르, 니체, 후설, 하이데거, 야스퍼스와 같은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아출현하였다. 19세기 합리적 세계관의 확산에 따른 종교의 쇠퇴와 1,2차 세계 대전을 통한 인간성 말살의 위기를 겪고 난 사람들은 절대 원리에 기반하지 않은 삶의 철학을 고민하게 되었다. 신이 없다고 한다면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 Sartre’s big question in the mid - 1940s was: given that we are free, how can we use our freedom well in such challenging times?
 
아니 어떻게 살 지를 고민하기 전에 절대적인 논리적, 종교적 기반 없이 계속해서 살아갈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때문에 이것은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이다.
 
  • For Camus, we must decide whether to give up or keep going. If we keep going, it must be on the basis of accepting that there is no ultimate meaning to what we do.
 
이러한 자유에 직면해서 많은 사람들은 공포에 질리거나 별다른 의미없이 일상을 채울 수 있는 다양한 습관을 통해 삶에 대한 고민 없이 살아가고 있다. 이런 핑계를 ‘bad faith’라고 불렀다. 
 
  • Sartre argues that freedom terrifies us, yet we cannot escape it, because we are it.
  • For Sartre, we show bad faith whenever we portray ourselves as passive creations of our race, class, job, history, nation, family, heredity, childhood influences, events, or even hidden drives in our subconscious which we claim are out of our control.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에 압도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이 정해져있다는 숙명론에 빠지지 않은 채로, 내가 가진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실존주의이다. 
 
  • The way to live is to throw ourselves, not into faith, but into our own lives, conducting them in affirmation of every moment, exactly as it is, without wishing that anything was different, and without harbouring peevish resentment against others or against our fate.
  • The ambiguous human condition means tirelessly trying to take control of things. We have to do two near-impossible things at once: understand ourselves as limited by circumstances, and yet continue to pursue our projects as though we are truly in control. In Beauvoir’s view, existentialism is the philosophy that best enables us to do this, because it concerns itself so deeply with both freedom and contingency.
 
유교의 중용이나 Jordan Peterson 교수의 Order/Chaos 사이를 걸어가는 인간의 이미지와도 유사하다. 
 
  • For Beauvoir and Sartre, this was the big lesson of the war years: the art of life lies in getting things done.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답을 실존주의에서 구할 수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사르트르와 보봐르의 삶은 우리가 지향 할 수 있는 삶의 한 가지 형태를 보여준다. 사르트르는 많은 흠이 있는 사람이였지만, 한번만 주어진 자신의 삶을 치열하고 정열적으로 살아간 지식인이였다. 편안한 주류로의 편입을 거부하고 늘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 철학자였다. Bad Faith를 거부하는 삶. 
 
그 당시는 전쟁이나 식민지 독립 같은 이슈들이 문제였다면, 오늘 날은 소비주의와 자본주의가 장애물일 수 있다. 자유에 압도당하지 말고, 허위에 기대지도 말자. 
 
홀로 행하고 게으르지 말며
비난과 칭찬에도 흔들리지 말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Sutta Nip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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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심리상자

2020. 4. 24. 16:49 from Lectura
 
  • 2020.4, 유영수 저
 
2014년에 처음 일본을 방문했을때 너무나도 친숙한 느낌을 받아 놀랐다. 깨끗한 버전의 한국같은 느낌? 결국 한국의 근대화는 일본의 영향력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일본이 요즘 길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어떤 의미로든 한국 근대의 롤모델이었던 일본이 이제 정점을 지나 쇠락의 길을 걷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무엇이고, 우리가 그 길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뭔가 다른듯 한데, 정확하게 그 다른 지점이 무엇인지 알기 어려웠던 일본에 대해서 깊이있게 알아보기 위해 선택한 책. 지나치게 학구적이지 않으면서도 신변잡기만 늘어놓지 않아 좋았다. 대인공포증, 나카마(친구), 공기 읽기, 아이소 와라이(억지미소), 전차남, 중년동정남, 가베돈, 대세 따르기, 와라간(더치페이), 맞장구 문화, 독박육아, 소년 야구 등의 키워드를 통해 일본인과 문화를 분석한다. 
 
겉과 속이 다르다거나, 친절하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같은 표면적인 일본인의 특징은 넘어서, 많은 일본인들이 그와 같은 특징을 공유하는 근본 문화, 역사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면서 읽었다. 앞으로 추가적인 독서가 이루어진다면 바뀔 수 있겠지만, 일단 현재까지 내가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다. 
 
  • 잦은 재해로 인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가 실질적인 중요성을 갖게되었다. 
  • 일본 문화는 개인의 생존을 집단에 의지하는 형태로 발달했고 이는 개인주의 발달의 지연을 가져왔다.
  • 집단주의가 우선 시 되면서 수직적인 관계의 중요성이 극단적으로 강조되었다. 
  • 이로인해 가정 교육은 개성을 기르기 보다는 집단에 순응하는 법을 가르치는 방향으로 영향을 받았다.
  • 때문에 모든 단계의 인간 조직에서 상하관계가 중요해졌고, 이를 피상적인 과도한 예의라는 형태로 승화시켰다. 
 
현재 일본 사회가 가지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폐해는 위의 논리로 설명이 되지만, 그냥 내 개인적인 가설이다. 
 
상하관계의 중요성과 피상적인 예의라는 부분은 ‘기생충’의 이선균이 가진 입장과 무척이나 유사한 면을 보인다. 예의는 차리지만 선은 넘지 않으면서 각자의 자리를 지키는 사회. 특히나 지배층 입장에서 매력적일듯 하다.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면서 야만적이지만 겉으로는 세련된 인간관계라고 포장할 수 있으니까. 
 
다른 측면으로는 다양성이 부족하고 지나친 효율의 강조로 오히려 비효율이 발생한 상태랄까. 생각해보면 세상 만물이 100%의 효율로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한듯 싶다. 100% 효율이란 관점은 즉 조직/개인의 모든 자원이 단기적인 성과에 집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중장기적인 성과에 대해서는 고려하기 힘든 상태이고, 단기적으로는 이런 상태가 최적일 수 있겠지만, 장기적인 관점의 부족으로인해 어려움을 겪게 되는 패턴 아닐까? 빅토르 위고가 레미제라블을 통해 한말 ‘능란함만 있는 곳에는 째째함이 있다’와도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물론 일본 사회가 가진 특징이 무조건 나쁜 것만을 아닐 것이다. 요즘 일본의 단점이 부각되는 이유는 부패한 정치와 조직문화 때문일 것이고, 위의 분석은 그러한 부패한 정치가 유지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자연재해와 일본문화의 특징을 연관 짓는 가설을 확인하기 위한 사족. 인터넷에서 100년 동안의 지진발생 빈도를 기록한 아래 그림을 찾았다.  
 
재미있게도 가장 지진이 빈번한 환태평양 지진대에서 어느 정도 단일한 문화를 오랫동안 유지하면서 근대화를 이룬 국가로 일본, 뉴질랜드, 필리핀 정도가 눈에 띈다. 근대에 와서 상당한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지만, 정치적으로 완전한 민주화에 한계를 보였다는 점에서 일본과 필리핀의 유사성이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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