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ychoanalysis and Religion

2020. 3. 3. 11:31 from Lectura
 
  • 2020.3, Erich Fromm
 
종교가 제공해 주던 삶의 의미를 신이 죽어버린 현대 시대에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 고민한 에리히 프롬의 저작이다. 최근 알게 된 Christian Atheism이나 Jordan B. Peterson 교수의 입장과 유사한 주장이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우리가 우주를 지배하는 신에 대해서 경배해야할 필요성은 사라졌지만,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 종교 혹은 종교적인 관심은 여전히 유용하다는 것이다.  
 
  • the question is not whether man returns to religion and believes in God but whether he lives love and thinks truth. If he does so the symbol systems he uses are of secondary importance. If he does not they are of no importance.
  • Centering the religious discussion on the acceptance or denial of the symbol God blocks the understanding of the religious problem as a human problem and prevents the development of that human attitude which can be called religious in a humanistic sense.
 
과학이 이만큼 발달한 상태에서 물질계에 직접 관여하는 신이라는 개념은 너무나 시대에 뒤쳐진 생각이 되었다. 이런 생각을 여전히 지지하는 사람들은 원리주의자이거나 이단에 가깝지 않을까? 그렇다고 ‘전투적 무신론자’라고도 할 수 있는 입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다. 세상의 질서가 어떻게 되어있는가? 라는 질문의 답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삶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의 답을 도출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과거의 종교적 철학적 지식에 기반해서 우리 스스로 판단하는 수 밖에 없다. 
 
오히려 프롬이 걱정하는 것은 하루하루의 삶에 매몰되어 궁극적인 삶이란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는 현대인이다. 
 
  • While we have created wonderful things we have failed to make of ourselves beings for whom this tremendous effort would seem worthwhile .
  • The threat to the religious attitude lies not in science but in the predominant practices of daily life .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하지 않고, 현대 사회가 원하는 ‘마케팅 지향적인 성격’을 갖춘 사람들이 인간으로서의 잠재력을 펼치지 못하면서 내적 갈등에 시달리면 신경증이라는 형태로 그 갈등이 표출될 수 있다. 이런 신경증을 대했을때 증상의 치료에 집중하여 사회에서 ‘정상적인’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을 치료의 목적으로 둘 수 도 있지만, 프롬이 생각하는 정신 분석학은 이 보다 한단계 더나아가 사람들의 도덕적인 고민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을 도와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 neurotic symptoms are not isolated phenomena which can be dealt with independently from moral problems.
  • psychoanalysis shifted its emphasis more and more from therapy of the neurotic symptoms to therapy of difficulties in living rooted in the neurotic character. 
 
그렇다면 프롬이 생각하는 인간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무엇일까? 형이상학적인 기반의 도덕률에 기대할 수 도 없고, 우주만물을 주관하는 신도 의지할 수 없다면, 우리가 지향하는 삶은 어때야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다시 한번 프롬은 인본주의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 love, if we mean by love a capacity for the experience of concern, responsibility, respect, and understanding of another person and the intense desire for that other person’s growth.
  • man must strive to recognize the truth and can be fully human only to the extent to which he succeeds in this task. He must be independent and free, an end in himself and not the means for any other person’s purposes. He must relate himself to his fellow men lovingly. If he has no love, he is an empty shell even if his were all power, wealth, and intelligence. Man must know the difference between good and evil, he must learn to listen to the voice of his conscience and to be able to follow it.
 
이와 같은 목표는 직감적으로 옳게 느껴지는데, 아마도 인류 진화의 역사와 인간의 본성 때문이지, 철학적 사유의 결과는 아닐 것이다. 
 
최근 읽은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를 통해 접한 하이데거의 생각과 비교하는 것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두 사상가 모두 유사한 이야기를 약간 다르게 변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이데거가 제시한 ‘시인의 관점’과 프롬이 제시한 사랑, 자유, 독립성은 어찌보면 유사한 이야기이다. 외부 세계에 애정에 기반한 관심을 갖는 것. ‘경이’와 ‘애정’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 등이다. 
 
좀더 나아가자면 이러한 태도는 ‘돈후앙의 가르침’에서 돈 후앙이 이야기한 통제된 우행(controlled folly)과도 연관이 있다. 
 
'다른 것보다 중요한 것 따윈 없는데도, 어떤 행위를 선택헤서 마치 그것이 자신에게는 의미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거야. 통제된 우행은 식자로 하여금 자기가 하는 행동은 의미 있는 행동이라고 말하게 하고, 마치 의미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게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아. 그래서 그는 그런 행동을 끝마친 뒤에는 평온하게 물러서지. 자기가 한 행동이 선하든 선하지 않든, 성공했든 실패했든 본인은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네.'
 
잘은 모르지만 대승불교의 ‘보살’이란 개념과도 연관이 있을듯 싶다. 
 
 

 

'Lectura' 카테고리의 다른 글

At The Existentialist Cafe  (0) 2020.04.28
일본인 심리상자  (0) 2020.04.24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0) 2020.02.13
민주당의 착각과 오만  (0) 2020.02.02
신사와 선비  (0) 2020.01.21
Posted by 중년하플링 :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2020. 2. 13. 10:59 from Lectura
2020.2, 박찬국 지음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우리는 이 시대를 지배하는 것이 이성과 합리성이라고 생각하지만, 하이데거에 따르면 실은 광기에 가까운 편협함이다. 현대는 ‘인간 개개인을 비롯한 모든 사물을 기술적인 처리 대상으로 격하시키고 그것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신들의 에너지를 내놓도록 몰아’댄다. 때문에 우리들은 세계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고 고독감, 무력감, 허무감에 시달린다. 이를 잊기 위해 우리들은 일상을 잡담과 호기심으로 채우고 있다.
 
‘시인으로 거주하지 않고 단순히 과학자나 기술자로만 존재하는 한, 인간은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삶에 대한 공허감과 권태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비와 오락 그리고 향락에 탐닉하지요. 이와 함께 소비와 오락, 향락을 위한 물자를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자연 파괴를 일삼거나 사람 사이의 투쟁과 갈등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에 대한 극복 방안으로 하이데거는 시인으로서의 삶을 제시한다. 사물을 끊임없이 분해하는 합리성의 사막을 벗어나, 존재하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애정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시인의 관점을 회복할 때 우리는 삶을 통해 의미를 되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시적 감성을 통해 세계와 하나가 될 때 우리는 고독감과 무력감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경이라는 기분 속에서 보는 세계는 의미로 충만한 곳이기에 허무감 역시 극복할 수 있는 것이지요.’
 
잘 알지 못했던 독일 철학자의 사상이 불교의 가르침이나 크리슈나므르티의 이야기와 유사하다는 사실에 우선 놀랐다. 하지만, 내가 읽은 책 중 가장 유사한 주장은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에서 찾을 수 있을 듯 하다. 아래는 그 책을 읽고 내가 남긴 감상문의 일부이다. 

 

'진리가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진리는 혹은 세상을 바라보는 이성적인 관점은 과거 인간들이 꿈꿀 수 없었던 많은 것을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이성 혹은 과학의 유용성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이성의 기준으로 보기 시작했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점이라는 것이 작가의 통찰이다. 살아가면서 모든 문제를 유용성의 문제로만 볼 수는 없다. 어떤 것은 유용성 혹은 진리의 관점이 아니라 개개인의 가치에 기반하여 판단 될 수도 있는 것이고 이를 인정해야 한다.'
 
현대 철학 조류가 합리성의 극복이라는 사실은 예전에 학교에서 배웠지만, 이제야 그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되었다. 현대인의 문제점이나 현상에 대해서는 놀랍도록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과 유사하다. 내가 자주 접한 에리히 프롬이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게 아닌가 싶다.
 
시인의 관점이라니.. 알듯 모를 듯 하다.

'Lectura'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인 심리상자  (0) 2020.04.24
Psychoanalysis and Religion  (0) 2020.03.03
민주당의 착각과 오만  (0) 2020.02.02
신사와 선비  (0) 2020.01.21
경제 규칙 다시 쓰기: 21세기를 위한 경제 정책 보고서  (0) 2020.01.05
Posted by 중년하플링 :

민주당의 착각과 오만

2020. 2. 2. 19:08 from Lectura
  • 2020.1 토머스 프랭크 지음 / 고기탁 옮김
 
2016년 트럼프는 힐러리 클린턴을, 공화당 대통령 후보 역사상 가장 많은 득표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당시 언론을 통해 비춰지는 트럼프의 이미지는 무지한 백인 하류층을 포퓰리즘으로 자극하여 표를 얻어내는 예측불가능한 망나니였다. 그런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 소식은 전세계적으로 무척이나 충격적인 뉴스였다. 무엇이 미국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무력과 부를 갖춘 나라의 민주주의 체계하에서 트럼프와 같은 이질적인 정치인을 대통령으로 만들었을까?
 
이 책은 트럼프 당선 전에 (미국에서) 출간되었지만, 미국 민주당의 정책과 미국이라는 사회에 대해서 많은 것을 설명해주고 있다.
 
성공적인 뉴딜 정책으로 한동안 정권을 유지했던 미국 민주당은 전통적으로 노동자 중심의 정당이였다. 하지만 1970년대가 되자 민주당은 더 이상 노동자들의 정당이 아닌 사회의 상층부를 이루는 전문직의 정당이 되고자 하였다. 그때부터 ‘변화’와 ‘창의성’이 강조되기 시작했고, 미국의 소득불균형은 확대되기 시작했다. 클린턴은 이러한 민주당의 변화를 상징하는 인물이였다. 그의 행정부는 많은 금융계 인사들로 채워졌고, 예측 할 수 있듯, 금융산업을 위한 다양한 규제완화 조치를 추진하였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정권을 잡은 오바마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실리콘 밸리의 기업가들을 가까이하였다. 여전히 민주당 인사들은 노동자를 위한 당이라는 수사를 사용하지만, 민주당의 정책은 더 이상 노동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대신 민주당은 ‘정치적인 올바름’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페미니즘, 성소수자, 인종 문제 등은 주요 이슈로 활용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소득 불균형을 가리는 기만책에 불과하다.  
 
미국의 정치에 대해서 이야기 할때, 비슷하고 별로 다르지도 않은 두 거대당 사이의 권력 주고 받기라는 해석이 왜 생겼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정치 세력을 크게 좌파와 우파로 나누는데, 노동자를 위하지 않는 정당이라면 좌파라고 말하기 힘든 것이 당연하다. 왜 미국 민주당은 성공적이었던 노동자 층의 지지와 열망을 포기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지속적으로 떠오르는 질문이다. 이 책은 민주당이 노동자의 당이 되기를 포기한 이후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나 처럼 민주당이 여전히 중도 좌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가치가 있는 접근법이다. 하지만, 왜 민주당이 노동자의 정당에서 전문직의 정당으로 변절했는지를 생각하다 보면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이 생겨난다. 
 
어쩌면, 그 이유가 거대 기업 노조의 경직성과 정규직 노동자들의 이기주의 때문은 아니었을까? 블루칼라 노동자라고 해서 늘 약자인 것 만은 아니다.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잘 조직화된 정규직 노조원은 사회적 약자라고 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문제는 현대 경제는 모든 블루칼라 노동자에게 그런 일자리를 제공할 수 없다는 점이다. 어쩌면 소득 불균형 문제는 노조화를 통한 노동자의 교섭권 증대를 통해 해결 할 수 없는 문제일 수도 있다. 이윤이 나는 경우 이를 노동자와 자본가가 어떻게 나눌 것인가 하는 문제는 협상을 통해 결정될 수 있다. 하지만, 이윤이 나지 않는 다면? 회사의 제품이 해외에서 만들어내는 값싼 노동력과 경쟁하기에 불가능할 정도로 경쟁력이 없다면, 노조와 대화하여 임금 인상률을 1% 낮추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한국의 정치 현실에 비추어 볼때 무척이나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정의당과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의 반목은 정당 지도부의 좁은 시야 때문이 아니라, 계급적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근본문제일 수 있다. 노무현 정권이 삼성전자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은, 미국 민주당이 실리콘 밸리의 기업인들과 인적 교류를 통해 동조되는 현상과 유사한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좌파정당으로 시작한 집권 세력이 전문직으로 경도되는 이유는 거창한 음모가 아니라, 경제가 이를 강제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차이도 있다. ‘정치적인 올바름’은 한국에서는 오히려 정의당이 힘쓰는 이슈들이다. 민주당은 여전히 최저시급인상을 통해 사회 저소득층의 소득을 올리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저자가 스스로 설명하는 이 책을 쓴 이유는 아래와 같다. 
 
나는 이 책에서 민주당이 이 시대의 대표적인 사회 문제인 소득 불균형 문제에 맞서 싸우는 데 어떻게 실패했는지, 세계적인 경제 침체와 언제 끝날지 모르는 불황의 주범인 월 스트리트에 왜 강력하게 대응하지 못했는지 집중 조명했다. 그럼에도 보다 중요한 메시지는 좌파 정당이 전세계 좌파 정당의 전통적인 제 1 지지 기반인 노동자에게 흥미를 잃으면 이런 모양새가 된다는 것이다. 
 
미국 정치에 대해서 한국 언론을 통해 접하기 어려운 새로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높게 치지만, 한국과 미국의 차이를 고려한다고 해도 저자가 주장하는 바를 온전히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Lectura' 카테고리의 다른 글

Psychoanalysis and Religion  (0) 2020.03.03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0) 2020.02.13
신사와 선비  (0) 2020.01.21
경제 규칙 다시 쓰기: 21세기를 위한 경제 정책 보고서  (0) 2020.01.05
마음의 탄생  (0) 2019.12.05
Posted by 중년하플링 :

신사와 선비

2020. 1. 21. 10:40 from Lectura
  • 2020.1, 백승종 지음
 
기사라는 이상은 매력적인 만큼이나 모순적이다. 봉건질서에 순응 하면서도,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존재가 기사이다. 우리는 모순에 매력을 느낀다. 모순은 현실에서 실현하기 어렵기 때문에 어려운 만큼 이상으로 격상된다. 선비도 기사라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모순적이다. 조선시대 지배층을 이루었으면서도 지식을 추구하였던 사람들. 이 책은 서양의 기사/신사와 선비의 개념을 비교하면서 단절된 우리의 전통문화를 되 짚는다.   
 
많은 문화권의 지배층은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 하기 위한 다양한 이유를 만들어낸다. 고대 왕족들은 신이 선택했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했다. 중세로 넘어오면서 사회가 복잡해지고, 지배층의 범위가 확장되면서 새로운 형태의 정당화가 필요하였고, 이를 충족시킨 것이 기사도라는 개념일 수 있다. 근대로 넘어오면서 이 개념은 ‘신사’라는 개념으로 계승/변형되었고, 후에는 시민이라는 개념으로 확대되었다. 많은 사람이 모여 무리를 만들어내고 계층 구조가 발생하면, 특정 인물이 왜 계층 구조에서 우위를 점해야 하는 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늘 필요하다. 그것이 비록 현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하더라도, 그런 이상화된 개념이 만들어졌다는 사실 자체를 유의해봐야 한다.  
 
조선에는 선비가 있었다. 선비란 누구인가? 기본적으로 성리학에 입각하여 자기 자신을 닦으며, 기회가 주어지면 관직에 나가 세상을 이롭게 만드는 지식인 계층이였다. 물질적인 가치보다는 정신적인 가치에 방점을 두고, 사리사욕을 채우거나 탐욕을 경계하면서 자연과 하나되는 경지를 추구하였다. 
 
책을 읽으면서 잘 몰랐던 조선사회의 부정적인 부분에 대해서 좀더 알게 되었다. 조선시대는 기독교 이상에 기반한 중세사회와 유사한 면이 있었다. 형이상학적인 성리학에 기반하여 여타 다른 사상적 변화를 용납치 않았던 것이다. 이상화된 사회를 상정하게 이에 대한 반론을 용납치 않았다는 점에서 중세사회와 무척이나 유사하다. 이런 측면에서 선비는 중세의 성직자들과 유사하다. 높은 이상을 추구하였지만 현실적으로는 위선적인 면이 많았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읽으면서 내가 밑줄 친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 선비들은 경제발전을 통해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선비의 삶은 내면의 안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바로 그 점에 조선 사회의 중요한 특징이 있었다. 
  • 과거시험 공부는 학자가 정신을 쏟을 일은 아니다. 그런데 국가가 인재를 뽑는 방법이 이 한길뿐이지 않은가. 완급과 선후의 분별을 잘 살펴서 과거 준비를 하는 것이 좋겠다. 하찮은 외부의 욕망 때문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작은 유혹 때문에 소중한 것을 변치 않을 수만 있다면, 과거시험 준비에 매달리더라도 선비들 자신에게는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 비옥한 토지를 널리 차지하는 것이야말로 자손을 위한 계책이라고 여기는 자들이 우리 족계에 들어와 있다면, 그 어리석음이 어찌 딱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하여 남과 다투어 송사를 벌이고 모질게 싸워, 이 난리에 살아남은 외로운 이웃과 화목을 도모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 인간의 삶에는 일신의 안일과 부귀영화보다 몇 갑절 귀한 가치가 따로 존재한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흉내조차 낼. 수 없이 높은 경지였다고 생각한다. 
 
모두 물질적인 것을 뛰어넘는 가치를 추구한 선비를 묘사하고 있다. 아마도 나에게는 선비의 이러한 측면이 가장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이리라. 현대인의 삶에서 선비를 재해석해서 접목할 수 있는 부분도 바로 이 점이라고 생각된다. 

'Lectura'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0) 2020.02.13
민주당의 착각과 오만  (0) 2020.02.02
경제 규칙 다시 쓰기: 21세기를 위한 경제 정책 보고서  (0) 2020.01.05
마음의 탄생  (0) 2019.12.05
Man and His Symbols  (0) 2019.11.13
Posted by 중년하플링 :
 
  • 2020.1, 조지프 스티글리츠 지음 / 김홍식 옮김
  • @@@
 
지난 30년 동안 미국은 공급주의 이론에 기반하여 부유층에 유리한 경제규칙들을 늘려나갔고, 이는 선진국 중 유래 없는, 빈부격차가 큰 사회를 만들어냈다. 이 책에서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비록 미국만을 대상으로 했지만, 원인과 해결방법을 제시한다. 원제는 'Rewriting the Rules of the American Economy: An Agenda for Growth and Shared Prosperity’ 이다. 
 
신자유주의 학파는 공급이 늘어나면 수요는 자연스럽게 확대된다는 공급주의 경제학에 기반하여 생산력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도입하였다. 낮은 인플레이션 추구, 긴축재정, 민영화, 자유화를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는 애초에 의도했던 낙수효과를 만들어내지도 못했고 사회의 빈부격차가 커지는 결과를 가져오기만 했다. 정부의 개입이 적으면 경제는 자연스럽게 최적의 상태로 작동한다는 믿음은 깨졌고, 2008년 경제위기를 기점으로 많은 이론가들에게도 부정당했다. 하지만, 30년간 정책에 미쳤던 영향력은 여전히 살아있다. 현재 미국 경제는 중산층의 몰락과 상위계층으로의 쏠림으로 대표되는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었다. 
 
특허와 자산 가격 상승으로 대표되는 지대 추구 행위는 경제에 긍정적인 효과는 없으면서 이미 많은 유무형 자산을 확보한 상위계층에게 돈을 몰아주는 효과를 가져온다. 이렇게 왜곡된 경제적 과실의 배분은 중산층의 몰락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급증하는 복지, 의료 예산으로 이어져 정부의 역할을 축소시킨다. 전형적인 negative feedback loop의 형태를 보인다. 이런 문제점들은 모두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증적인 요법의 한계를 넘어선 경제의 체질을 바꾸기 위한 혁신적인 방안이 필요하다.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 시스템에서 지대추구 행위를 누그러뜨리는 것이다.
 
또다른 정책의 축은 중산층의 안전과 중산층에 진입할 기회를 보장해 주는 규칙과 제도를 복원하는 것이다. 의료보험의 보장성 강화, 노동권 강화 등과 같은 세부 정책은 모두 이러한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저자가 제시하는 수단들이다. 
 
읽다보면 미국에만 해당되는 내용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도 이미 지난 정권을 통해 상당히 많은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추진하였다. 문재인 정권으로 넘어오면서 최저 시급인상으로 대표되는 소득증대 정책을 시행하였고 이미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만일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추진했던 신자유주의 정책이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면 지금보다도 훨씬 극단적인 양극화가 나타났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에서 제시되는 많은 정책 제안들은 우리나라에도 유효한 것들이 많다. 
 
  • 중앙은행은 인플레이션을 조절하는 것만을 목표로 두지 말고, 완전고용을 지향하는 통화정책을 추구해야 한다. 경기 팽창기에 완전고용을 이룩하고 이를 유지하는 것은 노동자들이 사용자를 대상으로 임금 협상력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 금융 부분은 실물경제를 지원하기 위하여 시작하였으나, 이제는 그 의미가 퇴색할 정도로 금융산업 자체의 이익률을 높이는 목적에만 복무하고 있다. 금융 부분의 규제를 강화하여 지나친 이익 추구 성향을 완화시켜야 한다.
  • 기업의 단기 이윤 추구 경향을 완화하여야 한다. 이는 혁신을 가로막는 원인 중에 하나가 되고 있다. 주주만을 위한 기업활동이 아니라 소비자와 직원을 고려한 중장기적인 혁신을 추구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 과도하게 팽창한 기업이 아닌 노동자의 힘을 키워 주어야 한다. 이를 통해 임금을 증가시키고 중산층을 다시 키울 수 있다.  
 
원래 보고서 형태로 만들어진 내용을 책으로 출간해서인지 읽기에 재미있지는 않다. 그래서 별 세개. 

'Lectura'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민주당의 착각과 오만  (0) 2020.02.02
신사와 선비  (0) 2020.01.21
마음의 탄생  (0) 2019.12.05
Man and His Symbols  (0) 2019.11.13
인플레이션: 부의 탄생, 부의 현재, 부의 미래  (0) 2019.10.16
Posted by 중년하플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