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이틀 이야기가 아니지만, 다시 신문기사로 등장했군요.

일단 제일마지막에 업계 관계자가 한 이야기가 정답 아닐까 합니다. SW산업 자체가 별로 돈을 못버는데, 어떻게 그 산업 종사자들에게 대우를 잘해줄 수 있겠습니까? 그럼.. 우리나라의 SW산업은 이미 노동집약적인 단순 제조업처럼 부가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는 사양산업이 되버린걸까요?

그러고보니 SW산업이 노동집약적이라는 것은 이미 회자되는 이야기이고.. 어쩌면 SW산업의 생산성이 낮은 것이 문제의 핵심일 수도 있겠군요. 그럼 왜 생산성이 낮을까? 싸구려 초급인력들로 땜질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럼, 왜 초급인력으로 땜질할까? 고급 인력이 없기 때문이지..

역시 문제는 꼬리를 물고 도는 뱀처럼 재귀적이군요. --;

다시 방향을 바꿔서, 그럼 미국은 어떻게 저런 재귀적인 덧에 빠지지 않고, 고급인력도 양성하면서 노동생산성도 증가시킬 수 있었을까요? 흠.. 어찌됐던 돈을 잘 버는 회사들이 있으니까? MS, Google, HP, IBM, Cisco모두.. 돈을 남기는 SW 관련 회사(일단 Cisco도 넣어줍시다. 통신장비업체이기는 하지만, 여하튼, 여기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의 SW개발 업무가 있거든요)들이죠.

우리나라는? .. 에 아직 SW에 기반을 두고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회사는 전무하지 않을까요? 삼성? 여기는 디자인 혹은 HW쪽이 더 중요하죠. 나머지는...?? 솔직히 떠오르는 회사가 없군요.

그럼.. 다음 질문은 왜 미국은 SW를 통해서 부가가치를 올리고 돈을 벌어들이는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할까? 가 됩니다.

이것은 세계화, 특허권, 기술표준지배력, 시장선점 효과 등이 얽혀서 그렇게 된게 아닐까 합니다만.. 딱부러지는 대답은 내놓기가 힘들군요.

자.. 가설에 대한 검증. 그럼.. 미국이외에 SW를 통해서 돈을 잘 못벌고 있는 나라들의 SW인력에 대한 대우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열악한가? 를 보면 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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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실업으로 대표되는 구직난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지만 임베디드 소프트웨어(SW) 등 SW 업계는 인력난에 허덕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 더 심화될 전망이다

◇◇SW 업계의 인력난정보통신부에 따르면, 지난해를 기준으로 국내 SW업계 종사자는 20만 명 선. 이 중 개발자는 70%인 14만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최근 각종 연구기관들은 잇따라 국내 SW업계의 인력난이 이미 빨간불이 켜진 상태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에 따르면, 올해부터 2010년까지 국내 SW 분야에서 초급 인력 5200명, 중급 인력 7400명, 고급 인력 5500명 등 총 1만8100명의 인력이 부족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임베디드 SW 분야의 인력난이 심해 현재와 같은 상태라면 2010년까지 총 1만2000명의 인력이 부족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 LG경제연구원은 최근 임베디드 SW산업 관련 보고서에서 국내 임베디드 SW 산업의 가장 큰 문제로 고급 인력의 부족을 지적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오는 2007년 경 가전이나 각종 단말기, 자동차 등에 적용되는 임베디드 SW 개발에 필요한 인력이 1만4000명 부족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같은 인력부족 현상은 디지털 컨버전스 시대의 산업 핵심 인프라로 떠오르고 있는 SW 산업 성장의 최대 걸림돌로 작용해 향후 정부의 산업발전 전략에도 적지 않은 차질을 빚을 것이라는 우려를 낳고 있다.

◇인력난의 원인현재 나타나고 있는 SW 인력문제는 특히 설계ㆍ분석 능력과 풍부한 개발경험을 가진 전문인력 부족인데, 이는 인력 수급간의 질적 불일치 때문으로 풀이된다.

매년 대학이 배출하는 SW 관련 인력은 많지만, 이들의 수준이 산업계의 수요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질적 괴리가 발생하고, 이로 인해 구직난과 인력난이 상존한다는 것이다.

SW 개발자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한 신기술 재교육 프로그램 부족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2003년 IT인력 활용 실태조사 결과, SW 개발자의 기술수명은 6.7년으로 조사된 바 있다.

또 현재의 SW산업의 여건이 열악해 높은 개발능력을 보유한 기술인력에 대한 처우가 미흡하고, 창의적인 인재를 SW분야로 유도하기 어렵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LG경제연구원은 임베디드 SW 산업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SW와 하드웨어(HW)를 두루 이해하는 고급 인력의 공급이 원활히 이뤄져야 하지만 국내 IT산업의 부가가치가 주로 HW 분야에만 치우쳐 왔고, SW 전문인력을 흡수할 수 있는 기업이 대부분 영세해 제대로 된 인력 육성 환경이 조성되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정부 대책상반기 정통부가 SW를 비롯한 각 분야 IT 전문협의회의 의견을 분석한 결과, 대다수 중소기업은 첨단인력 부족을 가장 큰 고충으로 호소했다. 중소업체들은 특히 자체적인 인력확보가 어렵기 때문에 IT 벤처기업를 위한 전문인력 양성에 정부가 적극 나서줄 것을 촉구했다.

정부도 SW 산업의 인력부족 문제가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정통부는 이 달 초 발표한 SW산업 발전전략을 통해 각종 SW 인력 양성 방안을 내놓았다.

우선 산업계에서 필요로 하는 전문인력 양성을 위해 대학교육을 강화키로 하고, 석ㆍ박사급 인력양성을 위해 대형 SW 개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대학 IT연구센터(ITRC)를 올해 11개에서 2010년 20개로 확충키로 했다.

또 경험이 풍부한 SW 개발자에 대한 체계적인 SW 신기술 재교육을 위해 내년에 SW전문대학원 과정을 개설하고, 현행 8단계인 SW기술자 분류체계를 세분화해 분석ㆍ설계 등의 아키텍트급 고급인력에 대한 노임단가를 적정화할 방침이다.

이와 함께 SW 인력 수급의 질적 불일치를 해소하고 SW 개발자의 체계적인 성장을 위해 SW 직무능력표준(Skill Standard)을 개발ㆍ보급하고, SW기술인력에 대한 객관화된 경력관리를 위해 SW 기술자 경력수첩을 발급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또 북한의 우수 SW 인력에 대한 교육과 활용을 지원하기 위해 남북SW교류협력센터를 설치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SW 관련업체들은 정부가 그동안 여러 차례 SW 인력양성 계획을 추진했지만, 여전히 SW 인력난이 대두되고 있는 것이 근본적으로 SW 관련기업이 제대로 수익을 내지 못해 고급 전문인력들의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 때문으로 보고 있다.

즉, 인력양성 정책과 함께 `SW 제값 받기'와 같이 경쟁력 있는 업체들이 충분한 수익을 낼 수 있는 환경 조성 정책을 병행 추진해야 자연스럽게 인력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동식기자@디지털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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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경제학과 비즈니스의 시작

안윤호(아마추어 커널해커) 2006/02/07
충동과 조갑증
디카를 새로운 종류의 눈으로 보던 필자는 진지하게 각 메이커의 디카들을 써보기로 마음먹었고 1년 정도 진지하게 디카들을 사서 모으고 일부는 없애곤 했다. 리뷰 사이트의 글들과 디카의 실제 감성을 비교해 보기도 했다. 종류가 다양한 디카들을 한번 순례해 보겠다고 했던 필자의 소박한 바램은 얼마 전 소품과 액세서리를 모으는 일의 중요성을 자각하게 되는 순간 크게 흔들렸다.

니콘의 브라켓
요 즘은 값이 떨어진 구형 디카 1대 정도의 가격이다. 그러나 회전렌즈와 브라켓의 조합은 중고 디카 한 대를 포기하더라도 놓질 수 없을 정도로 효과가 있었다. 촬영의 그립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좋아진다. 문제는 필요한 액세서리의 종류가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포토그래피에 대한 눈높이는 다른 사진과 사용기들을 검토하는 와중에 자꾸만 높아졌다. 400-500만 화소대까지 사람들이 명기라고 생각하며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디카를 어느 정도는 써 보았다고 생각되는 시점이 되자 예정보다 빠른 지름신의 강림으로 갑자기 DSLR를 한 대 갖게되었다(구형의 DSLR중 일부는 도저히 유혹을 참을 수 없을 만큼 가격이 내렸다. 앞으로 가격이 더 하락하면 다른 기종과 액세서리도 걱정된다.).

하이엔드 디카들도 다양한 액세서리에 눈을 뜨게 되자 도저히 한정된 예산과 시간으로 유지와 감당이 불가능한 사태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미치자 가지고 있던 디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너무 흐르기 전에 집중적으로 즐기고 싶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지만 몇 가지는 꼭 해보고 싶었던 일들이 있었다. 정말 시간과 비용이 문제였지만 한정된 시간 안에서 무언가를 해보는 것이 문제였다.

결정이 서자 곧바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소품들과 액세서리들을 사서 모으기 시작했다. 결국 디카를 사서 모으는 일에 비교해서 상황이 크게 변한 것은 없었다. 대상이 디카에서 소품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 동안 포토그래피에 대한 안목과 경험이 조금 늘었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지 않으면 그동안 해왔던 일들이 허망할 정도였다. 정말 즐겁게 빠져있던 일들이 아니었더라면 많이 후회했을 지도 모른다. 사진에 대한 내공이 크게 증가한 것도 물론 아니다. 그러나 갖고 있던 디카의 숫자는 크게 늘었다.

생각이 바뀌자 갖고 있는 디카의 숫자가 너무나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화의 시간이 온 것이다. 점차 예전에 자동차에 미쳐 있었을 때와 유사한 패턴을 자각하기에 이르렀다. 한 때 자동차의 광으로 몇 대의 오래된 차를 가지고 있었을 때 결국 몸은 하나 뿐이라는 사실을 자각한 적이 있다. 누구나 한 순간에는 한 대의 차를 몰 수 있을 뿐이다. <한번에 한 대의 차>라는 것이 당연한 이야기지만 하나의 만트라처럼 머릿속에서 이 단어는 사라지지 않았다. 여분의 엔진이나 변속기도 주행되는 차에 적재되지 않는 한 의미가 없다. 그리고 몇 년이 더 지나면 차들도 별로 쓸모가 없다. 퇴역할 시기가 다가오기 때문이다(결국 마니아들이 모아 놓았던 파츠들은 다 정리해야 한다.). 그 다음부터는 다른 사람이 기증하다시피 하는 차도 모으지 않게 되었다.

역시 아주 저렴하지는 않은 광각렌즈

기본적인 아이템이지만 외경 72mm의 렌즈는 카메라보다 커 보여서 부담감이 있다.

사람의 몸은 하나 뿐이고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며 바로 그 시간의 작은 테두리 속에서 즐기고 낙담하는 사건들이 일어난다. 절대로 멀티태스킹 될 수 없다. 운전을 하는 순간에는 이러한 사실을 명확히 알게 된다. 그러면서 약간의 후회와 함께 파츠들을 없애거나 팔아대기 시작했다. 카라이프의 원래의 목표는 즐거운 드라이빙과 내공이라고 부르는 운전스킬의 향상이었다. 그것은 어느 틈엔가 사라지고 수단이 목적을 대신하고 한다. 장비탐닉증은 하나의 본성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충동이 생기자 캐논의 인기있는 기종이었던 G2와 G3를 같은 날로 정리한 적도 있고 니콘의 쿨픽스 4500같은 기계를 하루에 2대를 정리한 적도 있었다. 많은 애착을 가졌던 기종들이었다. 언젠가 마음이 바뀌면 또 사들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보다 지명도가 떨어지는 사소한 디카들은 손해를 보더라도 빠르게 팔아치우기 시작했다. 논리적인 일들은 아니었다. 디카들은 액세서리와 장비로 바뀌었다. 이들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증가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사소한 장비들은 시간도둑에 가깝다.

컴퓨터도 여러 대가 되면 신경을 분산할 위험이 있었다. 보조 컴퓨터, 서브 컴퓨터, 안 쓰던 기종이지만 써보고 싶던 과거의 기종 .. 이런 물건들이 테이블 앞에 모여 있으면 즐겁기는 하겠지만 현재는 너무나 바쁘다. 시효가 한참 지난 울트라 스팍이나 서버들을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만져서는 안 된다. 오래된 노트북들도 마찬가지다. 시간에 쫓기면 이런 일들은 금기에 가깝다. 이런 물건들에 너무 시간을 빼앗기면 안되는 것이다. 무심하게 구기종들을 쓰고 있으면 차라리 좋으련만 새로운 장비가 들어오고 구기종이 폐기되지 않으면 시간과 관심의 적체를 일으킨다.

한때 “우리는 너무나 바빠서 칫솔을 고를 시간조차 없다“라는 말이 있었다. 실제로 아웃렛 같은 곳에 가보면 수십 종류의 칫솔이 있을 것이다. 현대의 마케팅은 이들 모두를 팔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단순한 생필품이 아니라 사람들의 감성과 연관이 있는 물건이 되면 선택은 복잡해진다. 핸드폰 같이 항상 들고 다니는 물건이 되면 선택은 조금 더 미묘하다. 기능은 일정하나 선택은 복잡하다. 아울러 상품가치의 스판은 한시적인 마케팅 시간 속에 있다. 이러한 제품들에 집착하는 것은 신경을 빼앗기고 시간을 빼앗기는 것이며 결국 어느 순간이 오면 실망까지는 아니더라도 집착은 끊어진다. 그리고 새로운 무엇인가에 다시 홀리면서 정신없이 살게 된다. 매니아의 끼를 가진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몸소 체험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집착과 열망이 매우 강할 때에는 이성적인 판단을 포함해서 다른 일들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이 “폼뿌질”이라고 부르는 강렬한 충동이 그리고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상한 열정이 지배하면 예측하지 못한 강렬한 에너지가 나온다. 이러한 순간들이 사실은 가장 즐겁고 시간이 잘 흐르는 때라는 것은 알고 있다. 동호회나 동질의 집단에 가면 이런 충동은 증폭된다. 더 자주 볼수록 충동은 강화된다. 다른 사람들이 빠져들고 집착할수록 더 좋아 보이고 중요해 보인다. 싫증이 날 때까지는 그렇다. 싫증이 나거나 생각의 방향이 바뀌면 흐름은 달라진다. 워크맨이건 디카이건 컴퓨터이건 일정한 시간의 스판 속에서만 경제성을 갖는다. 메이커의 마케팅은 사람들의 주관적이고 변덕스러운 판단 속에서 많이 팔리는 것으로 심판을 받는다. 시간이 흐르면 매니아가 얼마가 남아있건 단종이나 기종 변경을 하게된다.

접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링 플래시
이 플래시는 고휘도 LED로 만든 이상한 물건이다. 구할 수 없어서 필자는 비슷한 것으로 새로 만들어야 했다.

어떤 디카들은 불과 3-4년 만에 가격이 1/10로 떨어진 기종도 있었다. 컴퓨터의 부품은 아무리 가격이 빠르게 인하해도 이 정도까지 떨어지지는 않는다. 사람들의 감성과 변덕을 담는 제품은 패션제품처럼 가격이 수직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디카가 그랬다. 값이 1/10로 떨어진 제품들의 성능은 아무리 나쁘게 보아도 신품과 별 차이가 없었다. 오로지 시간이 지나 유행에 뒤졌다는 것과 신품들의 가격의 하락이 엄청난 압박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것 정도는 미루어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예상보다 빠르게 싫증을 내지 않는다면 2-3년 만에 1/10이나 그 근처까지 하락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물론 가격이 별로 떨어지지 않은 기종도 있다. 이상스러울 만큼 애착을 갖는 추종자들이 많은 기종들이 해당된다.). 즐겁기는 하지만 희생이 큰 얼리 어댑터가 아니라 나름대로 목적을 가지고 중요한 카메라들을 비교 검토하던 필자도 변덕과 충동에 빠져버렸다.

충동이 생기면 기계들은 뜯어볼 수 밖에 없다.

니콘에서 2000년도에 2000대 한정 생산한 950 기종의 밀레니엄도 어느 날 실험을 위한 테스트 파츠를 기다리다가 따분해진 필자에 의해 분해되는 운명에 처했다. 결국 복구되기는 했으나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기술적으로 950은 sparc 컴퓨터에 ccd와 스텝모터를 달아놓은 니콘의 테스트베드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DSLR은 중요한 디지털 카메라의 시장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얼마 전 삼성도 펜탁스의 istD* 베이스의 디카를 생산한다고 발표했다.). DSLR의 메이커들은 과거에는 비싼 카메라바디와 렌즈를 팔아서 이윤을 남겼고 바디의 가격이 하락한 요즘은 렌즈에서 이윤을 내고 싶어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2-3개 정도의 렌즈는 갖고 싶어하기 때문에 이 전략은 설득력이 있다. 갖고 있던 렌즈나 바디는 나중에도 재사용 가능하므로 과거의 SLR처럼 소비자들의 제품군에 대한 충성도는 상당히 높을 것으로 보인다. 가격도 잘 떨어지지 않는다. 이런 시장은 별로 없다.

SLR클럽(www.slrclub.com)과 같은 DSLR 동호회들은 얼리어댑터의 끼가 있는 사람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는데 당연히 이들은 집요하면서도 충동적이다. 장비를 구입한 사람들은 마음에 드는 영상을 위해 많은 돈을 지불했고 아직도 지불중이다. 이곳의 장터는 생각보다 훨씬 과감하고 활발하다. 마음에 드는 장비가 어떤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장비를 샀다가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팔아버리고 다시 기종을 변경한다. 이런 일들을 몇 번 되풀이하면 사람들은 결국은 많은 비용과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이른바 <손해 보는 되팔이>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마음에 드는 영상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강력한 욕구가 있고 장비의 교체나 업그레이드는 욕구에 대한 현상이다. 그리고 어떤 기종을 한번 체험해 보았다는 것이 유일한 이유다. 사실 이것은 뻔한 것이지만 그 속에서 자기에게 맞는 무엇인가를 발견하기도 한다. 많은 문화활동의 출발점은 이런 이유에서 출발한다.

만약 많은 사람들이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이 말한 것처럼 장비를 최소화하고 결정적인 순간을 잡아내고 해석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나 상징을 찾아서 자신을 사람들의 삶의 텍스처 안으로 섞어서 다가가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내공을 찾아 수도에 들어가면 카메라 업체들은 먹고 살 기가 힘들겠지만 그런 일은 없다. 사람들은 다양하고 의외로 많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맞는 장비에 빠져든다.

이곳에서 좋은 사용기는 펌프질에 해당한다. 누군가 플래시나 스트로브 조명에 대한 좋은 사용기나 글을 올리면 관심이 쏠린다. 유행이 지난 기종에 대한 사용기는 갑자기 그 기종을 상당 기간 인기 있게 만들며 구형 렌즈가 대상이 되면 몇 개 없던 관심 없던 렌즈를 갑자기 희소가치 높은 물건으로 만들기도 한다. 애착과 관심이 있던 대상들이 글의 주제였으므로 글쓴이의 비전은 읽는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해진다. 20여대가 넘는 DSLR을 써본 사용자의 글이 포스팅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사이트들에서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지름신이다. 사람들은 한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충동적으로 빠져든다. 열정과 낙담이 교차되는 이상한 사이트에서 초보자들도 예상보다 훨씬 넓고 깊이 있는 바탕에서 출발할 수 있다. 지름신과 열정에 새로운 디지털 경제학을 쓰려면 이런 사이트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곳에는 열정과 시간을 장비와 사진으로 바꾸어대는 새로운 문화 경제학이 있다.

물벼룩
시간의 경제학을 생각할 때마다 필자는 물벼룩을 떠올린다. 물벼룩의 수명은 수온에 의해 정해진다고 한다. 물의 온도가 낮으면 물벼룩은 조용히 살면서 오랜 세월을 산다고 한다. 물의 온도가 높으면 물벼룩은 놀랍도록 빠른 심박동으로 격렬히 움직이다가 수명이 짧아진다. 시간은 상대적이다. 사람들은 격렬한 체험과 강렬한 경험을 원한다. 어떤 면에서 보면 수명을 논외로 하고 수온이 높은 물의 물벼룩을 닮았다. 어떤 것이 더 좋은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많은 것들을 경험하기를 원하며 강렬한 체험을 원한다는 점에서 필자는 물벼룩을 생각하곤 한다. 그것도 욕심이 많은 물벼룩을 떠올린다.

무어의 법칙의 지배를 받는 디지털과 전자의 세상에서 가로축이 시간이라면 속도라는 세로축은 점차 수직에 가까운 변화를 보여주고 있으므로 시간의 축의 작은 변화는 속도의 축에 큰 변화를 의미한다. 작은 시간동안 큰 변화가 일어나므로 작은 시간의 가치는 커졌다. 물벼룩의 심박동은 아니지만 디지털의 심박동인 클럭은 18개월마다 2배로 빨라진다. 시간은 점차 비싸진다. 그러나 사람은 디지털 기계가 아니라 생물이다.

시간의 경제학에서 일반적으로 시간은 몇 가지로 구분하여 생각할 수 있다. 명백한 구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생물학적 시간, 물리적 시간 그리고 행사적 시간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고 한다.

현실에서 세 가지의 시간 중에 어떤 것이 더 중요한지는 알 수가 없다. 우리는 학교의 교육에서 물리적인 시간을 교육받았다. 시계에 의해 지배받는 시간을 교육받은 것이다. 시간의 감각은 그렇게 훈련되었다. 주입된다. 시간의 가치 역시 학교에서 배운 시계에 의해 왜곡된다. 어떤 시각에 어떤 일을 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역사적으로 철도가 도입되면서 표준시간과 함께 도입되었다고 한다. 시간의 압박과 심리학은 눈에 뜨이지 않게 우리들의 잠재의식 속에 주입된 것이다.

대략 하루에 맞추어지는 생물학적 시간은 많이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시간대에 따라 변화가 많은 이상한 시계에 의해 지배된다. 능력이나 조건이 시간대마다 다르다. 생물학적 시간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자리 잡은 것으로 쉽게 바꿀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시간은 눈에 들어가는 빛의 양에 의해 컨트롤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크린의 빛이나 강한 광원만으로도 교란되거나 조절될 수 있다.

행사적인 시간은 문화권마다 다르겠지만 사람들은 원할 때 자고 필요하면 식사를 할 수도 있다. 어떤 일이 있으면 그 일을 처리하기 위해 며칠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원하는 만큼 공부를 하거나 책을 볼 수도 있으며 놀 수도 있다. 행사적인 시간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실은 물리적인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 사람들이 쉬고 자는 동안에도 물리적인 시간은 사람들을 압박한다. 시간은 그래서 희소한 자원이 되었다. 사는 것도 바쁘지만 즐기는 일에도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비즈니스를 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자기의 시간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시간도 필요하다. 산업체(industry)에서 시간을 임금으로 맞바꾸기도 하지만 여가(leisure)라는 것도 시간과 돈을 체험으로 맞바꾸는 것이다. 여가산업(leisure industry)은 이러한 요소를 모두 갖고 있다. 모든 매체와 미디어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눈길을 한번 주지도 않는다면 대부분의 신문이나 방송 그리고 인터넷 사이트들은 문을 닫아야 한다. 사람들이 빠져드는 시간을 먹이 삼아 이들은 살아간다. 사람들의 관심(결국은 시간과 체험)을 필요로 하며 많은 사람 때문에 인기에 집착하고 통제력을 얻어가는 이상한 산업이다. 미디어들의 조작에 의해 길어지기도 하며 정신없이 무엇인가에 빠져 놀면서 지나가기도 한다. 많은 경우 이들은 통제되고 조작된다. 비즈니스는 이렇게 조작된 시간대를 잘 이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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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젠틀’하지 않아요

2005년 대한민국 남자와 여자들을 사로잡은 매력남 다니엘 헤니를 만나다
“올 한 해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 탱크에 쓸 돈 지진피해 복구에 썼으면”

<한겨레21>은 2005년을 보내며 ‘올해의 남자’로 배우 겸 모델 대니얼 헤니를 선정했다. 대중의 욕구에 부응하는 남성성은 미디어 속에서 끊임없이 만들어졌지만, 대중의 욕구를 일깨운 남성성의 등장은 주목할 만한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인기리에 방영됐던 문화방송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사려 깊고 다정한 헨리 킴 역을 맡으며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앞에 나타난 그는 대한민국 사회의 남성성, 혹은 남성적인 기존 질서를 순식간에 무장해제시켰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그에게 끌리는 이유는 잘생기고 영어 잘하는 백인 혼혈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능력 있되 전능하지 않고, 배려하되 지배하지 않고, 존중하되 의존하지 않는 남성성을 지녔다. 트렌드란 이름으로 건너뛰던 대한민국의 남성성은 그의 등장과 함께 ‘진화’했다. 그 결과 ‘내실 있는 경쟁 체제’를 갖추게 됐다. 남성성의 조건으로 꼽혀온 돈, 능력, 외모, 성격, 학벌, 집안 같은 ‘자원’에 안주했다가는 이제 어떤 남자도 온전하게 사랑받을 수 없게 됐다. 많은 여성들이 그 덕분에 행복했고, 적잖은 남성들이 편협한 성역할의 틀을 넘어서는 계기를 얻었다. 올 한 해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 이상을 행복하게 해준 남자, 대니얼 헤니를 만났다. 편집자

▣ 글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대니얼 헤니(26)를 만나기로 한 날인 12월12일 오전, 그의 매니저인 정원석씨가 시간과 장소를 정하느라 전화를 걸어왔다. 저녁에 서울 강남 청담동 쪽에서 보는 게 좋겠다고 했다. 무심코 “그 동네를 잘 모르니 편한 곳으로 정해보시라”고 했다. 그럼 언제 어디가 편하냐고 묻기에 “사실 오늘 부서 송년회가 있어서 너무 늦지는 않았으면 좋겠고, 평소에는 회사 근처 마포나 홍대 쪽이 편하긴 하다”고 했다. 매니저는 의논해보고 다시 연락하겠다고 하더니 2시간 뒤 “(대니얼이) 원래 메이크업은 안 하지만 하루 종일 모자를 쓰고 다녀 머리를 만질 시간이 없는데 (그런 몰골을) 양해해준다면 홍대 쪽으로 가겠다”고 전해왔다. ‘젠틀’하리라 짐작은 했지만 정녕 그가 <한겨레21> 송년회 장소인 홍대 근처 꼬불꼬불한 골목 안, 테이블 예닐곱 개의 작은 카페에 나타날 줄은 몰랐다. 베이지색 비니를 눌러쓴 대니얼은 청바지에 흰 면티를 받쳐입고, 평범한 검은 재킷 위에 목도리를 두른 채 들어섰다. 그는 카페라테를 주문했다. 한국말은 기본적인 것을 알아듣는 정도로만 늘었다고 했다. 기자의 짧은 영어에 그는 쉽고 반복적이고 큰 목소리의 영어로 답했다. 커피잔이 녹음기를 가리지 않게 위치를 바꿨고, 인터뷰 직후엔 직접 녹음기를 끄며 칭찬받고 싶은 아이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는 생각보다 ‘여성스럽지’는 않았고, 생각 밖으로 정치·사회·국제적 이슈에 민감했다. 덕분에 인터뷰는 꽤 ‘헤비’한 얘기로 시작했다.


미국은 정치적으로 매우 심란

올 한 해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였나?

=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이었다. 올 초 한국에 왔을 때에는 대단히 조심스러웠다. 말도 잘 안 통하고, 내가 혼혈인 것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염려되기도 했다. 심리적인 면을 말하자면, 사실 여전히 지금 내가 있는 자리가 실감이 안 난다. 언론이 인터뷰하는 사람이 됐다는 것도 낯설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세상에, 대체 내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한다. 정치적으로 볼 때 올 한 해는, 솔직히, 미국에서 일어난 일들이 걱정됐다. 루이지애나 대홍수는 충격이었고 미국 정부의 대처도 적절치 않았다. 이라크 전쟁의 경우… 나는 더 이상 전쟁을 믿지 않는다. 군인들의 노고는 존경하지만, 전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보지 않는다. 게다가 그 엄청난 달러라니. 탱크와 비행기와 미사일에 쓴 돈을 대홍수나 대지진 피해 복구 같은 데 썼다면 훨씬 유용했을 것이다. 나는 이라크 전쟁이 제2의 베트남전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자꾸 그렇게 되는 듯해 두렵다.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당신은 광고에서 0순위로 알고 있는데, 경제적으로는 어땠나?

=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은 아닐 거다. 솔직히 말해 뉴욕에서 지낼 때까지만 해도 나는 돈을 그리 잘 벌지는 못했다. 그래서 돈 없이 지내는 데 익숙하다. 내가 엄청난 부자라면 모르지만 막 얘기할 정도는 아니다. 어떤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지만, 큰돈을 버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돈을 갖고 올바른 일을 하는 것이다.

올 한 해 당신에게 개인적으로 가장 기뻤던 일과 끔찍했던 일은?

= 홍콩에 사는 친구가 암으로 오랫동안 투병했는데 지난 8월 세상을 떠났다. 모델로 활동하면서 만났던, 사람들에게 아주 친절하던 멋진 친구였다. 부음을 듣고 장례식을 도우러 갔는데 그 많던 친구들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죽음과 그 뒤의 일들이 안타까웠다. 기뻤던 것은… 한국에서 지낸 모든 경험이 좋았다. <내 이름은 김삼순> 이후 굉장히 많은 팬이 생겼다.

당신이 주목했던 올해의 이슈는?

= 문화방송 에서 파키스탄 대지진을 보고 많이 괴로웠다. 그 많은 사람들이, 여성들과 아이들이 죽어가는데 우리는 무력했다. 종교·인종 분쟁, 극단적인 폭력, 자연의 역습 같은 것들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한국 내의 이슈에 대해서는… 음, 난 솔직히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는 않다. (웃음) 최근에는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연구 논란이 아주 흥미로웠다. 여러 추측은 있지만, 진실을 좀더 많이 알고 싶다. 내가 아직 말이 짧아 한국 뉴스를 꼼꼼히 들여다보지 못한다. 미국 상황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올해 정치적으로 미국은 매우 심란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젊은이들이 투표를 많이 해서 상황을 바꿨으면 좋겠다.

어릴 땐 뚱보, 농구 잘해서 킹카

여성들이 당신을 좋아하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왜 남성들도 당신을 좋아할까?

= 안 그랬다면 여자친구들이 죽이려 들까봐? (웃음) 나는 남자다. 그것도 평범한 남자다. 얼굴은 알려졌지만, 차림새를 봐도 알 수 있듯이, 티셔츠와 청바지 입고 다니는 게 좋다. 머리를 만지고 옷을 잘 차려입고 사람들 접근이 막히는 스타처럼 지내지는 않는다. 나에게 익숙지 않은 일이다. 남자들은 내게 다가와 농구 얘기를 한다. 혹시 그들이 날 미워하지 않는다면 농구 때문이 아닐까? (옆에서 잠깐 그의 매니저가 “싫어하는 사람이 왜 없겠나. 하지만 대니얼은 누가 자기를 싫어한대도 안 믿는다. 대단히 낙천적인 성격이다”고 말했다.)


△그는 생각보다 여성스럽지 않았고 생각 밖으로 정치·사회·국제적 이슈에 민감했다.

그는 미국 미시간주 작은 시골마을에서 영국계 아버지와 한국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1958년 두 살 때 ‘황해즐’이라는 이름과 사진 한 장만 지닌 채 부산의 이사벨라 고아원에서 미국으로 입양됐다. 대니얼의 표현에 따르면 아버지는 “전형적인 블루칼라” 기계공으로 일했고, 어머니는 간호사다. 그의 어머니는 지난 여름 45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지만 간호사 일 때문에 보름 남짓만 머물렀다. 혹시나 한국의 가족을 수소문했지만 찾지 못했다. 그는 열두 살 전까지는 먹는 걸 밝히는 ‘뚱보’였고, 청소년기에 농구를 하며 친구들이 많이 생겼다고 한다. 백인들이 주로 거주했던 동네라 ‘다른 얼굴’ 때문에 놀림을 받고 상처가 될 만한 차별을 겪기도 했지만, 농구를 잘해 고교 시절에는 학교 ‘킹카’가 될 수 있었다. 시카고 일리노이대(경영학 전공, 연극 부전공) 시절 “가난했고, 공부를 마치기 위해 돈이 필요하던 차에” 우연히 모델 지망생인 친구를 에이전시에 데려다주고 주차장에서 기다리다가 더 큰 에이전시 관계자에게 발탁됐다. 2001년이다. 덕분에 학교를 마치고 뉴욕, 밀라노, 파리, 홍콩 등지에서 모델활동을 했다. 지금 그의 매니저가 속한 회사도 연예인 매니지먼트사가 아니라 모델 에이전시다. 대니얼의 성향도 “시시콜콜 관리되고 통제되고 만들어지는 매니지먼트 시스템에 맞지 않는다”고 한다.

뉴욕과 유럽, 홍콩 등지에서의 활동과 한국에서의 활동에서 큰 차이를 느끼는지.

= 아주 큰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는 엄청난 환대를 받았다. 한국은 다른 나라에 견줘 대중문화의 수준이 높다. 영화, 드라마, 광고 수준도 아주 높다. 또 아주 빠르다. 잡지 촬영을 하면 불과 이주일 뒤에 나오고 방송 인터뷰는 바로 그날 나오고. 광고 일도 그렇고. 그게 좀 스트레스를 주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에서는 일하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진짜로 친절했다. 드라마 할 때도, 광고 일 할 때도 모두들 어떻게든 나를 도와주려고 했다. 언어 문제 탓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인 것 같다. 내가 코리안이라서 그런 거 같다.

당신이 경험한 한국 사람들의 특징을 꼽자면?

= 음… 워커홀릭들이다. 일을 너무들 많이 한다. 전날 자정까지 일하고 다음날 또 일찍 일어나고. 잠도 거의 안 잔다. 또 다른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서로 존중한다는 걸 느꼈다. 논쟁하고 싸울 때에도 존중하는 것 같다. 존댓말 문화 덕분인가.

때론 존댓말 문화가 엉뚱한 위계를 만들기도 한다.

= 나이 든 사람이 무조건 옳다는 태도 같은 거. 나도 안다.

다르다는 것은 때로는 힘!

혼혈이라는 특징은 어떤 이익과 불편을 주나?

= 한국에서? (잠깐 자세를 고쳐 앉으며) 다르다는 것은 때론 힘이 된다. 다르다는 경험은 그것이 상처라 할지라도 큰 깨달음을 준다. 한국에도 혼혈인들이 많은데, 그건 잘못된 것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된 결과일 뿐이다. 내가 혼혈이라서 혼혈 어린이들에게 용기를 주는 역할을 할 수 있어 좋다. 꿈을 갖는다면 그걸 언젠가는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할 기회를 얻는 것도, 차별적인 시각과 태도도 깨뜨리는 데 일조할 수 있다는 것도 좋다. 내 성장기를 떠올리면 가장 큰 보람이다. 불편한 것은 아직 없다. 아직까지는.

당신을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것은?

= 엄마와 통화할 때. 일주일에 1∼2번 통화하는데 제일 행복하다. 그리고 음악 들을 때(그는 학창시절 록밴드 활동을 하기도 했다. 노래 실력은 “테러블하다”고 했다). 일을 잘 끝냈을 때도, 결과가 좋을 때에도 행복하다.

살면서 마음이 바닥을 쳤던 적이 있나? 깊은 절망이나 좌절 같은.

= 있다. 열아홉, 스무 살 무렵까지 내겐 농구가 세상의 전부였다. 매일 서너 시간 이상 미친 듯이 농구만 했다. 농구를 잘해 시골을 벗어나 도시의 대학에 가는 게 간절한 꿈이었다. 그런데 내 시골 마을 주변 사람들은 거의 모두 “넌 안 돼. 할 수 없어”라고 말했다. 용기를 준 분은 부모님밖에 없었다. 기회가 닿아 농구 장학생으로 대학에 가게 됐다. 그런데 잘 안 풀렸다. 첫 번째 코치는 나쁜 사람이었다. 그는 나를 혐오했고 나도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학교를 옮겨 만난 두 번째 코치는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썩 유능한 코치는 아니었다. 세 번째로 학교를 옮겨야 했다. 그곳에서, 딱 한 경기가 나를 바꿨다. 시즌의 마지막 경기였는데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 한 경기로 모든 게 끝났다. 농구도 끝났다. 나는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아니었다. 그리 잘하지 못했다. 마지막 경기에서도 불과 5분을 뛰었던 것 같다. 그나마도 잘하지 못했다. 당혹스러웠다. 어머니가 그 경기를 보셨는데, 내게 다가와 “얘야,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는구나” 하셨다. 나는 순간적으로 무너져내리듯 엉엉 울었다. 세상이 다 끝난 것 같았다. 농구를 더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모든 꿈과 희망이 부스러져 사라졌다. 막막했다. 학교를 마치기 위해 시카고(일리노이대)로 가야 했다. 농구를 계속할 실력이 안 됐던 것, 내가 겪은 가장 큰 좌절이었다.

어떻게 극복했나?

= 시간. (잠깐 호흡을 가다듬은 뒤) 난 더 이상 경기를 하지 않지만, 여전히 농구를 사랑한다. 시간은 이제 털고 일어날 때가 왔다는 것도,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도 알려준다.


△그는 "혼혈이라서 혼혈 어린이에게 용기를 줄 수 있어 좋다"고 말한다. 지난 7월26일 '혼혈아동 희망 나누기! 펄벅 여름 캠프'에 참여한 대니얼 헤니. (사진/ 한겨레 김진수 기자)

그는 미국 뉴욕의 디나극단에서 연기수업을 받았고, 오프 브로드웨이 무대에도 종종 섰다. 모델로 활동할 때 주 거처는 뉴욕이었다. 지난 가을 그는 뉴욕의 거처를 친구한테 넘기며 정리했다. 한국에서 오래 살 집을 구하고 있다. 지금 살고 있는 서울 삼성동 집은 “모든 게 구비된” 월셋집이라 전세를 얻더라도 자기만의 취향을 살린 공간을 안정적으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는 혼자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500㎖의 물을 마신다. 그러고는 적당히 진한 커피에 우유와 설탕을 약간씩 타서 마신다. 그런 다음 을 켜서 뉴스를 듣고, 책이나 잡지를 읽다가 스케줄이 없으면 운동을 하러 나간다. 동호대교 하단 한강둔치를 달리거나 헬스클럽에 간다. 식사는 직접 해먹는데, 산낙지처럼 “살아 꿈틀대는 것” 빼고 회를 포함해 아무거나 잘 먹는다. 요즘에는 설렁탕이 제일 맛있다고 했다. 밥과 빵 중 밥을 더 즐기고, 음식은 미국식과 한국식을 짬뽕으로 만들어 먹는다고 했다. 치킨 요리랑 감자 요리, 특히 스파게티에 자신 있다고 자랑했다.

터프하고 우아하고 지적인 캐릭터?

조깅을 하면 사람들이 알아볼 텐데, 변장하고 뛰어야겠다.

= 그냥 뛴다. 달리니까 쫓아오지 못한다. (웃음) 나는 사람들이 나를 아는 척해주는 게 즐겁다. 조깅을 할 때는 손 흔들고 그냥 막 달리면 된다. 공공장소에는 혼자 가기 어렵지만 운전은 즐긴다(매니저가 다시 거든다. “대니얼은 가끔 자기가 유명한 사람이라는 걸 잊는데, 네티즌이 뽑은 올해의 스타니, 청소년 스타 같은 데 선정됐다고 알려주면 ‘진짜? 진짜?’ 하고 캐묻는다. 어떤 행사 때 시간이 없는데 사람들이 자꾸 몰려오면 우리는 ‘죄송합니다’ 하고 막아서는데 이미 혼자 저쪽에 가서 일일이 사진 찍고 사인해주고 있다.”)

당신은 오만해지지 않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나?

=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냥 나 그대로 지낸다. 나는 두 얼굴을 한 사람이 가장 싫다. 굳이 애써 겸손하려 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힘든 사람도 만났고 좋은 사람들도 만났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여주는 사람들 덕분에 잘 지낼 수 있었다. 부모님은 경제적으로 풍족한 환경은 아니었으나 넘치는 사랑을 주셨다. 그게 내 밑천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연기 의지가 강하다고 들었다.

= 나는 연기자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 뭐가 되겠다는 말은 쉽게 못하겠다. 지나치게 멀리 내다보려 들면 정작 오늘을 못 볼수 있다. 원하는 것은 있지만 구체적인 계획이나 목표를 일년, 이년 단위로 세우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면 오늘에 충실해질 수 없으니까. 계획이나 목표만 위해서만 오늘이 존재한다는 건, 아까운 일 아닌가. 곧 발표하겠지만 새해에는 드라마를 할 거고 영화도 논의 중이다.

어떤 캐릭터를 맡는가?

= 글쎄, 깊이 있는 캐릭터? 약간 터프하기도 하고 우아하고 지적이고…. 하하, 내 바람이다.

Posted by 중년하플링 :
월러스틴이 프랑스 소요사태에 대해서 쓴 글입니다. 프랑스 소요사태를 문화나 종교갈등이 아닌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보고 있군요. 생각해보면 이쪽이 더 맞을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세계적으로 20:80의 양극화가 진행되면서 80에 속하는 누군가는 있어야 하는것이고, 결국 그 누군가는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 나라도 지금과 같은 양극화와 외국인 근로자 유입이 지속된다면 10~20년 안에 동일한 문제를 겪을 가능성이 크겠죠. 출산율 저하와 함께 쉽게 해결되지 않을 문제입니다.


France had a rebellion of its underclass in November 2005 that lasted for about two weeks. Groups of young people across France, mostly of North African or Black African descent, set fires to cars and hurled rocks at police. In some ways, this was the kind of uprising that has been occurring throughout the world in recent decades. But it also had particular French explanations. It exploded like a phoenix. It has been suppressed by the force of the state. It is far from over.

The immediate story is very simple. Three young men saw police stopping other youths and asking for identity cards. This happens routinely in France to young people of "color" who live in the de facto segregated high-rise dilapidated housing of "les banlieues" (the suburbs, which is where France's ghettos are located). These housing complexes are home to largely unemployed, undereducated youth who have few prospects for jobs, for upward mobility, or even for non-work activity (sports, cultural centers). These youth run away from identity checks primarily because they are often pointlessly taken into custody, where they are frequently harassed and remain in police stations for many hours until their parents come to bring them home.

In this particular case, the youths jumped a wall and landed in an electrical complex, where two of them were electrocuted. This was the spark to the rebellion. It was a rebellion against poverty, joblessness, racist behavior by French police, and above all lack of acceptance as the citizens they mostly are and as the cultural minority they feel they have the right to remain. The French government seemed primarily concerned with repressing the rebellion, and eventually it succeeded. The fact that the Prime Minister and the Minister of the Interior are fierce rivals for the future candidacy for president of the governing party ensured that neither of them was going to seem soft on rebellion and thereby give an advantage to the other.

It always amazes me that people are surprised when underclasses rebel. The surprising thing is that they do not do it more often. The combination of the oppressiveness of poverty and racism with lack of visible short-term or even medium-term hope is surely a recipe for rebellion. What keeps rebellion down is fear of repression, which is why repression is usually swift. But the repression never makes the anger go away. Prime Minister Dominique de Villepin says that this uprising was not as bad as that in Los Angeles in 1992 in which 54 people died and 2000 were hurt. Perhaps not, but that is hardly a basis for boasting.

Throughout the world today, the metropolitan areas are filled with people who match the profile of the rebels in France: poor, jobless, socially marginalized and defined as "different" - and therefore angry. If they are teenagers, they have the energy to rebel and the absence of even the minimal family responsibilities that might restrain them. Furthermore, the anger is reciprocated. Those who are in the more comfortable majority fear these young people precisely for the characteristics they have. The better off feel that the poor youths tend to be lawless and well, "different." So, many of the better off (perhaps not all) tend to endorse strong measures to contain these rebellions, including exclusion totally from the society, even the country.
France in some ways is an exaggerated version of what we find elsewhere - not only in North America and the rest of Europe, but throughout the South in countries like Brazil, Mexico, India, South Africa. Indeed, it is hard to think of a country where this issue does not exist. The problem with France is that too many of its citizens have long denied to themselves that this is a French problem as well.

France defines itself as the country of universal values, where discrimination cannot exist because everyone can become a French person if they're ready to integrate fully. The reality is that France has always (yes, I said always) been a country of immigration. In the days of the Ancien Regime and even in the first half of the nineteenth century, the non-French speakers (50% up to the French Revolution) migrated to Paris and other northern cities. Later it was the Italians, the Belgians, and the Corsicans. Then came the Poles, and then the Portuguese and Spaniards. And in the last 40 years or so, massively the North Africans, the Black Africans, and the Chinese from what was formerly French Indochina.

France is a multicultural country par excellence still living the Jacobin dream of uniformity. The number of practicing Catholics is zooming down while the number of practicing Muslims is increasing daily. The major consequence of this has been a hallucinatory debate for over a decade about what to do about young Moslem girls who wish to have their hair covered when they go to school. The racist right saw the wearing of the foulard as an affront to Frenchness, and if truth be told, to Christianity. The classical left (or at least a large part of it) saw it as a challenge to sacrosanct laicite. Both sides combined to outlaw the foulard (and in order to be balanced, Christian and Jewish "large" symbols too). So, a certain number of Moslem girls were expelled from school. And the matter was thought to be solved, somehow.

What was remarkable about this rebellion this time in France is that it did not focus on religious issues. For example, it did not result in anti-Semitic tirades. Because France has a large number of poor Jews who live in the same housing complexes, there have been Muslim-Jewish or rather Palestinian-Israeli tensions for the last two decades. But that issue was shelved. The French rebellion was a spontaneous class uprising. And like most spontaneous uprisings, it could not be sustained for too long. But also like most rebellions, the possibility of recurrence will not disappear unless the gross inequalities are overcome. And it does not seem that too much effort is being made by French authorities (or for that matter by authorities elsewhere in the world) to overcome inequalities. We are in an epoch of accentuating, not alleviating, inequalities. And therefore, we are in an epoch of increasing, not decreasing, rebellions.

by Immanuel Wallerstein
Posted by 중년하플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