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내가 만난 아시아인들.
강악수백작 | 2005·04·24 14:07 |
배낭 다니면서 제가 만난 외국인들이 갑자기 떠 올랐습니다. 혼자 뺄뺄거리고 돌아다니다보니, 꽤 많은 사람들을 만났었군요. 물론, 다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심심풀이 땅콩으로 함 써 봅니다. 물론, 이야기를 하다보면 삼천포로 빠질수도 있습니다. 따지지 마십쇼.


1. 일본인


유럽, 동남아를 돌아댕기다 보면 발에 채이는게 일본애들입니다. 특히 제가 캄보디아를 갔었던 1999년에는 IMF 이후 회사에서 짤린 젊은 애들이 무지하게 나왔더군요.

알고보니 일본은 회사에서 짤리는게, 거의 인생 조지는 거랑 비슷하답니다. 평생직장 개념이 하도 강해서, 다른 회사에서도 잘 안 받아준다더군요. 그래서 그 때 만난 애들한테 얼마나 여행을 계획하냐고 물으면 대부분


“6개월.”

“1년. 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오는 길이야.”

“5개월째야. 이제 중국 가야지.”



이러고 살더군요.. --;; 전반적으로 일본애들은 되게 소심합니다. 걔네들은 90%이상, 일본애들이 없는 데는 가지 않습니다. 특히 “세계를 간다(이게 원래 세계를 걷는다, 란 일본책 번역본입니다)” 들고 다니면서 거기 소개된 데만 가더군요. 일본애들이 있는 숙소, 식당, 그리고 걔네는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도 딱 오야지가 한 명 생깁니다. (그걸 어떻게 정하는지는 모르지만) 그 오야지가 하자는 대로 대부분 하죠. ‘이예(no)’ 라고 말하면 큰일 나는 줄 압니다.



걔네들은 여행 코스도 똑같아요. 98년 쯔음 당시 태국에서 시작해 라오서-중국-실크로드-인도-터키 코스 여행기가 NHK에서 방송 됐었나봐요. 6개월 이상은 죄다 그 코스더군요. --;;


한번은 되게 천사 같은 일본애랑 보름간 라오스를 같이 돌아다녔습니다. 술 먹고 함 물어봤죠.


“니네는 왜 혼내를 안 내보이는데?”



막 고민하면서 짜증을 내더니, “몰라. 그런 말 많이 듣는데, 나도 왜 그런지 몰라.” 그러더군요.

워낙 깊숙히 뿌리박힌 문화라 지네도 왜 그런지 생각하면 스트레스 받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태국에서 만난 일본 여자애, 라오스 국경도시였는데, (태국이랑 라오스랑 의외로 티격태격하며 살더군요. 따라서 국경도시는 보란듯이 쾌적하게 꾸며놨습니다) 얘는 라오스 ‘내일 가요. 내일 가요’ 하면서 3주째 내일만 외치고 살았다더군요.


동남아 쪽 장기체류 일본애들은 의욕이 없어 보입니다. 일본 돌아가기 싫은 거죠, 뭐. (익숙해지면, $100 로 보름은 버티거든요) 유럽에서 돌아댕기는 일본애들 보면 또 되게 웃긴데, 제가 92년, 2001년 두 번 갔었거든요. 아마 일본애들은 빠리에서 배낭족 몰골을 보이면 되게 쪽팔리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꽤 우아하게 하고 다녀요.

그런데 웃기는 건, 그 옷차림이 죄다 똑같다는 겁니다. --;;; 한국 사람도 옷차림은 비슷하죠. 청바지에 티셔츠. 근데 걔네는 그게 아니라 원피스에 구두, 모자, 스카프, 핸드백 들고 돌아다니는데, 화장한 거까지 똑같아요. 핸드백은 루이뷔통 아니면 프라다.

프라하에서는 꽤 예쁜 일본여자애가 까페에 앉아 책을 보고 있던데, 똑같더군요. 근데 웃기는 건, 그때가 겨울이라 노천 까페에 앉아있기에는 꽤 추웠을 거라 이겁니다. 그래도 악착같이 우아하게 책 읽으면서 앉아있더군요.

참, 이해 못할 애들입니다. 아마 일본에서 올 유럽 패션 경향이 이러타더라, 소개한 모양입니다. 물론, 유럽 패선경향 대로 입고 다니는 유럽 애들 거의 못봤습니다.

근데 99년에 가서 느낀 건데, 일본 젊은 애들도 많이 변하고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대단히 소극적이었는데, 많이 적극적이고 활발해 졌더군요. 프놈펜 선(SUN) 호텔에 있는데, 한 일본놈이 다가와서 막 말을 걸더니 자기 지금 뽕 맞으러가니 같아 가자더군요.

음, 미친척하고 쫓아갈려다 참았습니다. --;; 일본 젊은 애들 하는 얘기 가만히 들어보면, 제 앞에서는 예의 바르고, 아시아가 협력해야 한다느니, 한국 경제성장이 대단하다느니, 뭐 이딴 소리 해 놓고 지네끼리 모이면 일본은 이미 유럽이라느니, 다른 나라는 상대가 안 된다느니, 이딴 소리 합니다.

혹은 ‘일본은 미국의 카피예요’ 하며 괜히 불쌍한 척 하기도 하고, 한국이 일본 싫어한다는 거 알긴 잘 아는 모양입니다. (물론, 그런 일본애들을 싫어하며 혼자 다니는 드문 케이스도 있긴 합니다)


인도 역시 일본애들 판입니다. 오죽 했으면 제가 인도인들한테 일본말을 배웠겠습니까. 그리고 95년도 즈음에 터키 여행 바람이 불어서 일본애들이 터키에 우르르 몰려갔었다고 하더군요. 근데, 일본여자애들이 워낙 성에 개방적이다 보니까, 터키 남자애들한테 가죽잠바 하나 사 주고 가이드 시키면서 밤에는 같이 자고, 놀고, 암튼 ‘돈’이 없는 곳에 갑자기 돈이 흘러 들어가면 100% 나쁜 쪽으로 흘러가게 되 있습니다.

한번은 캄보디아 시아누크빌, 에서 일본인 아저씨를 만났는데, 워낙 관광객이 없는 도시라 서로 반가웠죠. 그런데 친해지니까 사진을 보여주는데, 전 세계 창녀촌만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었더군요. --;;; 그거 가관입니다. 이 인간이 한국에 와서 또 절 불러냈어요. 청량리 가서 찍은 사진 보여주더군요. --;;

암튼 일본 사람들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느낌은, 뭔가 무지하게 순종적이고 체제 순응적이지만 도대체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언제 등에다 칼을 꽂을지 잘 모르겠다는 그런 느낌이 대세입니다.


2. 캄보디아인

제가 잊을 수 없는 곳이 캄보디아입니다. 99년에 갔었는데요.

캄보디아, 졸라 불쌍한 역사를 가지고 있더군요. 10년에 걸친 내전과 베트남의 침공, 태국과의 마찰. 99년은 내전이 끝난 지 몇 년이 지난 후라 그런지 사람들 얼굴이 참 맑아보였습니다.

우선 크메르인(캄보디아사람)과 베트남인들과의 마찰이 의외로 심합니다. 잘 사는 사람들은 주로 베트남인들인데, 상당히 싫어하더군요.

그리고 그 놈의 지뢰 때문에 불구자들이 상당히 눈에 많이 띱니다. 관광객이 몰려들기 시작한지 얼마 안되서 사람들은 되게 착합니다. (99년 기준) 바가지를 씌워볼라고 노력하는데, 그게 얼굴에 다 보여요. ^^;;특히 어린애들이 관광객 상대로 물건 많이 팝니다. 제가 무지한 짠돌이인데, 하도 귀엽고 기특해서 별 필요도 없는 걸 꽤 샀습니다. 제가 만나본 사람들 중에 가장 맑고, 밝고 희망차 보이던 사람들이 캄보디아 어린이들이었습니다.

캄보디아 돌아다니다 보면 ‘**향우회’ 티셔츠라던가, ‘**초등학교’ 책가방이 많이 보입니다. 한국에서 간 원조 물품인거 같아요. 심지어 ‘목포행’ 버스도 타실 수 있습니다. ^^;;

근데 캄보디아 경제는 거의 죽음이더군요. 물가, 태국이랑 비슷합니다. 무슨 소립니까? 소득은 졸라 낮은데 물가는 졸라 비싸다는 소립니다. 살기 어렵다는 뜻이죠. 인건비, 이거 웃깁니다. 앙코르왓은 차나 스쿠터를 타야 둘러볼 수 있는데요


□ 1일 스쿠터 대여비 (운전은 내가) = $5.기름값 별도.

□ 1일 스쿠터 대여비 (기사 포함)= $5. 기름값 포함.

이게 뭡니까. 기사 없이 내가 혼자 운전하는게 더 비싸요… --;;; 자본주의 사회에 뭐 이런 이상한 물가가 다 있답니까. 그리고 또 하나 비참한건, 캄보디아 매춘이 장난이 아니란 겁니다. 얼만지 아십니까? 속칭 숏타임 $4-5, 롱타임 $7 이랍니다.


이걸 어떻게 아느냐고 의심하지 마십시오. 전 세계 남자들 모이면 하는 소리는 다 거기서 거깁니다. 심지어 인도는 더 싸다고 하더군요. (티벳에서 $6에 자기 딸 팔고, 그걸로 중고 테레비 샀다는 부모가 신문에 난 것도 읽어봤습니다)


태국도 마찬가지지만, 아시아 지역에서 ‘관광대국=매춘천국’이라고 보시면 거의 맞습니다. 달러 획득이죠. 아시아의 비극입니다.


캄보디아에서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있는데, 제가 시아누크빌이란 휴양도시엘 갔었거든요. 하루는 수영 할라고 바닷가에 나가서 수영하는데, 그 넓은 바닷가에, 오로지 단 1명의 코리안과 7명의 캄보디아인밖에 없는 겁니다.


이거 재밌더군요. 혼자 바닷가 전세내서, 여권이나 뭐다 해변가에 내팽겨치고 놀았습니다. 처음엔 재밌었는데, 금방 심심해지더군요. 캄보디아 애들하고 놀아볼라고 했는데 안놀아줬어요. --;;


숙소 오다가 구멍가게에서 밀주를 팔더군요. 마셨는데, 눈머는 줄 알았습니다. 술인지 휘발윤지 구분이 안되더군요.


제가 한번은 할 일도 없고 해서 ‘여행자보험’을 한번 테스트 해 봤습니다. 앙코르왓에서 제가 티셔츠를 하나 잃어버렸어요. 상표는 GUESS긴 한데, 세일해서 산거니 한 이만원 했겠죠. 제가 시아누크빌에서 하도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해서 경찰서를 찾아갔습니다. 당당하게 말 했죠.


“나 티셔츠 잃어버렸다.”

“있다 3시에 와.”


3시게 갔습니다.


“나 티셔츠 잃어버렸다.”

“앉어봐. 어디서 어떻게 왜 잃어버렸는지 써.”


썼습니다. 대충 구라쳤죠. 솔직히 티셔츠 잃어버렸다고 경찰서 찾아오는 놈이 세상에 어딨습니까? 걔네도 참 어이가 없었겠죠. 그래서 더 열심히 구라쳤습니다.


“그거 울 어무이가 미국 갔다가 내 생일 선물로 사 온 건데, 게스라고 그거 비싼 거야. 한 50불 할 껄?”

“진짜?”

“당연하지. 게스 비싼 거야. 물어봐.”


게슨지 인디안인지 잃어버리고 없는데 지가 어케 압니까. 우기면 됩니다. 그랬더니 ‘폴리스 리포트’란 걸 써 줍니다. 크메르어로 써 주더군요.


“야, 영어로 써 줘.”

“됐어. 그냥 가.”


한국 와서 크메르어로 된 폴리스리포트를 보험회사에 제출하고 며칠 있으니 통장으로 4만원 입금됐더군요.... ^^;;;; 아무튼, 분실물 생기시걸랑 현지 경찰서 가서 폴리스 리포트만 받아 보험회사에 제출하면 지네가 대충 감가상각해서 돈 입금시켜준다는 걸 몸소 확인했습니다.


다만, 고가의 물건에 대해서는 현지 경찰도 도난을 당한건지 철저히 검사하고 증인 세우고 그런다더군요. 저처럼 한가한 분 아니면 굳이 시도하실 필요는 없는 거 같네요.


크메르 언어는 세계에서 제일 배우기 어려운 언어 중 하나라고 합니다. 뭐, 글씨도 이상한데다 발음이 무지하게 어렵습니다. 코맹맹이 소리를 섞어가며 말을 해야 하는데, 도통 안되더군요.


하루는 어떻게 놀다보니 애들이랑 친해져서 동네 학교엘 갔습니다. 저 거기서 한 시간 수업 받았자나요… --;;;;; 뭘 배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애들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수업이 시작되어서, 스님이 오셔서 일종의 야학같은 거였는데, 뭐, 암튼 그랬습니다.


아무튼 결론은: 강악수백작은 캄보디아인에 대해 대단한 호감을 가지고 있다.


3. 라오스인


한 마디로, 마약의 천국입니다. 라오스 들어가니 오토바이 기사가 한 마디 하더군요.


“원 달러, 원 이어.”


즉, $1만 내면 1년 분량의 대마를 구할 수 있다 이겁니다. --;; 하긴, 여기저기서 자라는게 대마류 나무들인데 오죽 하겠습니까.


라오스 여행의 목적은 보통 고산족, 이라고 하는 북부 산악지대 원주민들의 생활을 보는 게 주목적입니다. 이게, 한 달은 걸려요. 전 보름밖에 안 봤으니 여행이라고 할 수도 없겠죠.


제가 처음 가본 사회주의 국가이기도 합니다. 사회주의 체제가 무섭긴 무서운 거 같습니다. 느낌이 일반 자본주의 국가와 대단히 다릅니다. 사람들은 ‘무지하게’ 순수합니다. 하지만 장사꾼들은 ‘무지하게’ 사람 뒤통수를 내려치죠. 참 기분 나쁘게 못됐습니다. 솔직히 라오스 물가가 얼마인지 정확히 아는 여행자는 없다고 합니다. 무슨 소리냐 하면, 물가가 너무나 싸기 때문에 (즉, 라오스 화폐가 너무 가치가 없어서) 도대체 바가지를 씌워도 바가지를 쓴 건지 아닌지 모른다는 뜻이죠.


사회주의 국가일수록 남녀평등이 더 잘 이루어져 있는 거 같습니다. 그리고 동남아시아가 원래 모계사회여서 그런지 태국, 라오스 등지에서는 여자들 파워가 훨씬 세 보입니다.


라오스 돌아다니면서 두 가지 놀란 사실이 있는데,


첫 번째는 그들이 ‘지독하게’ 가난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찌 보면 가난이라는 개념도 웃깁니다. 한 번 지나가다 라오스 집안을 흘낏 봤는데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농담이 아니라, 방갈로 형태의 집을 짓고 사는데, 집 안 아궁이 근처에 냄비 두 개 주걱 하나 매달려있는 거 빼고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건 완전 무소유 개념입니다.


두번째는, ‘동물’이 도대체 없다는 것입니다. 이건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데, 라오스 북부 지역은 산악지역이거든요? 나무도 많고. 야생동물이야 내가 볼 수 없다고 쳐도 ‘새’는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런데 새도 안보여요. 가끔 돼지를 키우는 집이 있긴 합니다만, 개나 고양이도 못 본거 같습니다. 가이드북을 보니 역시 동물이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별의 별 고기를 다 먹는답니다. 박쥐, 이구아나, 음 어쩐지 시장에서 국수 사 먹을 때 들어있던 고기가 영 찜찜했는데, 아직도 무슨 고기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촌 동네에선 젊은놈이 이구아나를 하나 잡아들고 입맛을 쩍쩍 다시면서 가더군요. --;; 실제로 이구아나를 보면 별로 맛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메콩강의 위력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오스면 강 상류 쪽인데도 불구하고, 강이 거의 바다와 같습니다. 갠지즈, 나일보다는 훨씬 더 웅대한 규모의 강임에 틀림없습니다.


결론적으로 라오스 사람들은, 고산족들은 특산품 바가지 씌우기 일쑤고, 솔직히 인상이 그리 좋지 못합니다. 태국에서 평생 여행만 다니던 한국 아저씨를 만났는데, 그러더군요. “라오스 사람들 착한 줄 알지만 그게 아니라”고. 그 말이 맞는 거 같아요.


음, 너무 길어졌네요.


기회 되면 담 번엔 인도, 이집트 사람들에 대해서 함 말해 볼랍니다.


인도는, 나라라기보다는 대륙이라고 봐야 하겠더군요. 엄청난 다양성 속에 숨어있는 그 기기묘묘한 생활과 사고방식,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시스템과는 거의 무관한 독자적인 시스템으로 굴러가고 있는 나라였던 거 같습니다.


이집트는, 제가 여기서 고생한 거 생각하면… --;;; 며칠 밤을 새도 말 못합니다. 그만큼 골 때린 경험도 많았지요. 특히 룩소르의 한 숙소, 주인장이 자기 숙소에 한국 사람들 많이 오고간다고 자랑하며 방명록을 내 밀었는데, 방명록에 선명한 글씨로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이 숙소에 절대 묵지 마세요. 이 주인 정말 이상한 변탭니다.”


이상의 글은 편견이 가득한 대단히 주관적이 느낌이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고럼.
Posted by 중년하플링 :
[잡담] 내가 만난 유럽인들.
강악수백작 | 2005·04·24 14:11 |
안녕하세요, 또 강악수백작입니다.

걍 내친김에 유럽쪽도 함 써볼랍니다.


난생처음 배낭여행을 가 본건 92년 여름이었습니다. 89년부터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작되고, 붐이 일기 시작하던 때였죠.

전 유럽이 너무너무 가 보고 싶었습니다. 말로만 듣던 박물관을 돌아댕기는게 꿈이었거든요. 그래서 박물관에 쳐박혀 살았더랬습니다… 졸라 피곤해요. --;;

게다가 영어회화라고는 해 본 적도 없습니다. 물론, 고딩때 재미교포인 사촌누나가 와서 한 며칠 말도 안되는 영어 씨부려본거 외에는 전무하죠.

그런데, 사람이 너무너무 하고싶은 일을 하게되니 그게 다 되더라구요. 참 신기해요. 그래서 제가 깨달았죠. ‘아, 역시 배고프면 뭐든 하게 된다.’



여행을 가 보신 분들은 한번쯤은 서툰 영어 때문에 실수하신 기억 있을겁니다.

저도 마찬가진데…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였죠.

코벤트 가든은 대학로 같은덴데… 거리공연, 뭐 이런거 하고.

뺄뺄거리며 돌아댕기다가 왠지 만만해보이는 여자애들을 발견했습니다. 백인 여자애들 넷이었는데… 그때가 여행 시작한지 삼일째쯤 됐나… 아무튼 너무너무 이야기가 해 보고 싶은겁니다. 서양인들의 사고방식이 너무 궁금했어요. 도대체 서양이 앞서가는 이유가 뭘까, 걔네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 하나… 이런것들.

그래서 큰 맘먹고 다가갔습니다. 인사했죠. 하이.



몇 년 후에야 깨닫게 된 건데, 아마 92년까지만 해도 동양애들이 유럽으로 여행오는게 흔한일은 아닌거 같았어요. 대한민국이 89년도에 여행 자유화가 되었으니까, 아시아에서는 일본애들을 뺀다면 물가나 이런걸 따졌을 때 20대 초반의 애들이 유럽을 돌아다니는게 흔치는 않았겠죠. 그래서 당시 전 꽤 많은 호의를 받으며 돌아다녔습니다. 나이 먹고 가니까 이젠 지겨워하는 눈치가 역력하긴 하던데..



암튼, 걔네들도 내가 신기했는지 친근하게 대해주더군요. 16살이래요. 독일.

카, 16살… 강악수백작, 여기서 작업 들어가기로 결심합니다.

말보로 라이트 피더군요. 16살 짜리가… 한 대 얻어피웠습니다. 이런저런, 중학교 수준의 영어를 늘어놓고 있는데 걔가 왜 자기한테 걸었냐고 하더군요.

분위기 호의적이었으므로 따지는건 아니었습니다. 걔도 영어 잘 못하니, 뭐 서로 세련된 표현을 하지 못했던거 뿐이죠. 왜 말을 걸었느냐… 말씀드렸다시피 전 서양인의 사고방식을 한번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서양 문화를 몸으로 느껴보고 싶었죠. 그래서 말했습니다. “아이 원투 삘 유.”



분위기 썰렁해지더군요… --;;;

저도 제 실수를 그때서야 깨달았습니다. 아… 같이 자자는 소리로 알아들었을거예요. 그게 아닌데… --;;;

잠시 후, 여자들 넷은 “아이 원투 삘 유.”의 정체성에 관해 쑥덕이며 토론을 하더니 오른 팔을 우아하게 들어 중국집 간판을 가리키며 한 마디 하더군요.

“저 차이니즈 글자가 무슨 뜻이야?”

“맛 미, 자야. 테이스트란 뜻이지.”

“아하…”

“…… 나 갈게. 안녕.”

이렇게 첫번째 작업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





두 번째 작업.



빠리… 이름은 잊었는데 룩상부르 공원 맞은편의 게스트하우스 였죠.

제가 원래 혼자 돌아다니느라, 한국사람이라고는 한명도 없었어요. 그런데 거기서 브라질 여자애를 만났습니다. 예쁘더군요. 아시아 피가 섞였는지, 친근한 동양인의 외모에 귀여운 스타일이었습니다. 근데 걔가요, 와이셔츠만 입고 밑에는 빤스만 입고 돌아다니는 겁니다… 고마웠죠.

사실 배낭가서 저 서양 여자애들 빤스차림 많이 봤습니다. 걔네 크게 신경 안쓰고 돌아댕기더군요. 하긴, 저도 신경 안씁니다. 엉덩이가 제 가슴둘레보다 넓은데 신경써서 뭣하겠습니까… 깔려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래서 얘랑 얘기 했는데요… 브라질이 당시 경제는 별로였는데, 걔 말 들어보니 살기는 좋은나라더라구요. 사람들이 졸라 널럴하게 사는 겁니다. 우리처럼 박터지게 일하고, 공부하고, 이런 개념이 없어요. 그래서 얘기하다가… 같이 니스에 안 가겠녜요.

오… 사실입니다. 제가 제안을 받은겁니다.

뭘 망설입니까? 오케이 했죠. 걔 그때까지 와이셔츠에 빤스 차림이었거든요… 그래서 어떤 결과가 벌어졌을까요?

기차역에서 바람맞았습니다… --;;; 그새 더 좋은 남자 만난 모양입니다. 세상 사는게 만만치 않더군요.





세 번째 작업.



이탈리아 볼로냐에서였죠. 볼로냐는 대학 도시로 유명하고, 움베르코 에코가 그쪽대학 교수로 있었죠. 근데 관광객은 안 가요. 거서도 저 거의 유일한 관광객이었습니다.

암튼… 거기서 누굴 만나기로 했는데 헛탕치고 (아는 선배였습니다. 작업과는 상관 없는.) 삐질삐질 돌아댕겼습니다.

관광지가 아니다보니 싼 숙소가 없어요. 유스호스텔은 시 외곽에 위치해서 교통비가 더 나올고 같고… 하룻밤을 재워줄 먹잇감을 찾아 볼로냐 중심가를 배회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20대 초반의 동양인이 간땡이가 부은거죠.. --;;



역시, 하면 됩니다. 적당한 대상을 찾아낸 것입니다. 동양인 여자 두 명.



심호흡을 하고 다가갑니다. 굉장히 순진한 미소를 띠며 인사를 건넵니다. ‘하이.’



걔네는 태국 국비유학생이었습니다. 태국 엘리트 여성이었죠. 저는 먼저 싼 숙소가 있냐고 묻습니다. 근처 호텔을 가르쳐줍니다. 나 돈 없어, 그럽니다. 유스호스텔을 가르쳐줍니다. 뭐라고 뭐라고 막 그럽니다. 다 듣고 나서 한 마디 합니다.

‘아… 나 영어를 못해서 어딘지 모르겠다. 하는 수 없지… 근처에 공원이라도 있니?’

‘공원은 왜?’

‘거기서 잘라고.’



굉장히 불쌍한 표정, 바로 그것이 포인틉니다. (사실 공원에서 며칠 잤는데… 새벽에 춥더라구요.) 그랬더니 지네끼리 쑥덕입니다. 한참을 그러더니 재워주겠답니다. 강악수백작 표정 관리하며 묻습니다.

‘괜찮겠니? 나 폐 끼치고 싶지 않은데…’

‘괜찮아. 내 남자친구네 집이야.’

음… 그럼 그렇지… 하지만 유럽에서 하루 공짜로 잘 수 있다는게 어딥니까. 오케이 했습니다. 있다 저녁 6시에 이 자리로 나오랍니다. 강악수백작, 봉 잡은걸까요?



나중에 알게되지만.. 그 남자친구란 놈, 게이였습니다. --;;;



아무튼 그 사실을 모르는 강악수백작은 5시 반부터 기다립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정말 놀라운 터키놈을 만나게 됩니다.



그 터키놈이 저에게 말을 겁니다. 저도 심심했는데 반가웠죠. 한참 말을 나눕니다. 무슨 대화를 나눴겠습니까? ‘맑스’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

이게요… 가능해요. 둘 다 영어를 못 할 경우에는 가능합니다… 참 신기하죠? 그러니까… 뭐 굉장히 기초적인 단어를, 굉장히 심오한 생각을 하는 듯 하면서 내뱉으면… 아 글쎄 그게 토론이 되더라구요… 못 알아들었을 경우에는 그냥 ‘흠…’ 하며 생각하는 척 하면 됩니다. 사실 나도 내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는데.. 그 쪽에서 알아들었다고 할 때는… 대략 황당하죠. 그러니까 그 새끼도 영어 못하는거 들키고 싶지 않았던거예요. 게다가 맑스, 하면 왠지 지적인 대학생 같지 않습니까??



아무튼.. 당시 터키도 학생운동과 탄압이 장난이 아니었답니다. 여자애들 성고문(그놈의 표현을 빌리자면, 바이브레이터.) 하고, 데모하던 여자애를 학교 옥상에서 던져버리기도 했다더군요. 80년대 한국이랑 거의 유사하죠?



암튼, 그건 두번째 문젠데… 이 놈이 슬슬 마각을 들어냅니다. 나보고 오늘 어디서 자냡니다. 음.. 아는 사람이 재워주기로 했는데… 그랬더니 자기는 그리스로 오는 배편에서 돈을 반이나 잃어버렸다며 굉장히 불쌍한 표정을 짓습니다. (나랑 똑 같은 놈입니다.) 그랬더니 재워줄수 있녜요…. 나도 빈대 붙는데, 나한테 빈대 붙으려하다니…

대략 난감했습니다. 어쩌나… 사실대로 말 했죠.

‘나도 빈대야. 나 재워주기로 한 사람 여기서 만나기로 했어.’

‘그럼 그 사람한테 물어보지, 뭐.’

결국 그 놈도 그날 같이 잤습니다.. --;;;



아, 이제 게이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볼로냐대학 법학과랍니다.

이탈리아 남자들 잘 생긴거 아시죠? 잘 생겼습니다. 같은 남자인데도 부럽더군요. 그런데 이탈리아 놈은 영어를 못합니다. 터키놈은 영어, 불어를 합니다. 이탈리아어랑 불어랑 비슷해서 잘 통하더군요. 게다가 태국 여자애 둘은 영어, 태국어, 이탈리아어를 합니다. 강악수백작은 한국말과 영어를 합니다.

다섯이 모여서 밥먹는데… 5개 국어가 돌아댕깁니다. 한 마디 하면 즉시에서 2-3개 국어로 번역이 됩니다. 솔직히 난 웃고만 있었습니다. 졸라 어지러워요. 터키놈 없었으면 졸라 썰렁한 자리가 될 뻔 했었죠.

이제 자러 갑니다. 밥도 얻어먹고, 커피도 얻어마시고, 그 놈은 아는 사람 아파트가 비었다고 그리로 데려가더군요. 근데 그 전에 제게 묻습니다.

“두유 스모크?”

“응, 나 담배 펴.”

“아니, 그거 말고. 스모크.”

“응. 담배 핀다니까.”

“아니, 그거 말고… 아 참…”



아하, 무슨 뜻인지 그제서야 알았습니다. 전 겁도 없이 웃으며 “오케이. 우린 좋은 친구야.” 그랬죠… --;;;

그러니까 그 놈의 은밀한 계획은… 약간의 대마를 흡입한 후 몽롱한 상태에서 저를 유혹해보려는 거였죠. 물론, 뜻대로 될 리는 없습니다.



그놈 아파트를 가니까… 마리화나를 집에서 키우더군요… --;;; 거 왜 락스탁 앤 투 스모킹배럴즈, 라는 영화보면 집에서 키우쟈나요… 그거 진짜 그렇더라구요.

음… 전 뭐 공짜로 하룻밤에 눈이 어두워 별 생각 없었습니다. 먼저 샤워했죠. 남자들끼리 있는데 귀찮아서 웃통 벗고 나왔습니다. 절 보더니 ‘음… 굿… ‘ 하더군요.

전 제 체격이 좋다는 뜻인줄 알고 계속 웃통 벗고 있었습니다… --;;; 그게 아니였어요..

아시겠지만, 서양애들 피부는 정말 안좋습니다. 동양인 제 피부가 얼마나 미끈덩하고 예뻐 보였겠습니까?

암튼, 그 놈 마리화나 피우길래 대충 구경만 하다가 자러 갔습니다. 이때까지도 전 이놈이 게이인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잘려고 눕는데, 이 놈이 바지를 벗더군요. 그런데 빤스를 안입었어요. --;;; 그러고 하루종일 돌아댕긴겁니다… 지독한 놈… 큰 수건을 허리에 둘둘 말더니 그러고 잡디다…



졸라 피곤했습니다. 막 잠이 들었는데 기분이 이상해서 눈을 떠 보니… 이놈이 한 손을 내 팬티 위에 척, 하니 올려놓고 자고 있더군요.



아, 그때 알았죠. 역시 공짜는 없다… 원하는게 이거였군…

그런데 사람이 참 웃기는게, 무지하게 피곤하니까 무섭다거나, 화가 난다거나, 피해야 한다거나, 이런 생각이 드는게 아니었습니다.



‘야.., 나 졸려…’



이러면서 그 놈 손을 툭, 쳐내고 그냥 잤습니다. 얼마쯤 후에 또 그놈 손이 내 팬티 위에 올라와 있더군요. 또 툭, 쳐내고 그냥 잤습니다. 그 다음엔 접근 안하더군요.

상당히 예의바른 게이였습니다. 역시 개인의 성적 취향성에 대해서는 뭐라고 안하더군요.



아침이 되었습니다. 상쾌하게 웃으며 “굿모닝” 하며 인사했습니다. ^^;;;



그 뒤로 그 놈 집에서 이틀을 더 잤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뭔 배짱으로 그랬는지 참 웃겨요. 그땐 오로지 “숙박비를 아껴야한다.”라는 생각밖에 없었거던요.



참 친절한 게이였는데… 헤어질땐 친해져서 서로 주소 나눠주고, 그랬는데 그 주소록을 암스텔담에서 도단당하는 바람에… 지금쯤 잘 지내고 있겠죠?



뭔 소린지도 모르는 맑스에 대해서도 토론했으니 (순전히 기죽기 싫어서였습니다.) 뭐, 못할 말이 없다는 자신감이 생기더군요.



부다페스트에서 오스트리아 빈까지 히치하이킹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사람들한테 물으니까 그런거 하지 말래요. 위험하다고… 사실 그때 네오 나찌즘 때문에 동양인이 피살당했네, 뭐 이런 기사 나올때였거든요. 그래서 다들 말리는데… 영화에서나 보던 히치하이킹이 너무나 하고 싶은겁니다… --;;;

혼자 하기는 무섭고… 그래서 순진한 한국 남자애 하나 꼬셨습니다. 걔는 유레일패스도 1등석이었는데… 제가 허파에 바람집어넣어서 절 쫓아오게 만들었습니다.



근데 어디서 히치를 하죠????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모르더군요… --;;

택시기사에게 물었습니다. 히치 하이킹 하는데까지 얼마냐구… 히치를 하겠다는 놈이 택시를 타고 가??? 이거 영 이상합니다. 아무튼, 빈 가니까 빈 가는 고속도로만 찾으면 히치를 할 수 있겠다 싶어 물어물어 갔습니다.



가니까 애들 많더군요… --;;; 젠장, 나만 히치하러 온 줄 알았는데 서양애들 되게 많았습니다. 죄다 종이에 목적지를 써서 들고 있었습니다. 저도 “WIEN” 이라고 써서 들고 있었죠. 그런데 안태워줍니다… 동양인이라 그래요. 서양애들은 즉각즉각 태워가지고 가더군요.. 해는 지는데… 젠장… 몇 시간을 기다리는데, 드디어 차 한대가 섭니다.



역시, 하고자 하면 안되는 일이 없습니다. 치과의사 아저씬데, 직장은 빈에 있고 고향은 헝가리랍니다. 그 아저씨는 5개 국어를 하더군요… 러시아어까지…

기 죽기 싫어서 동양의 “기”에 대해 설명해줬습니다. 도사가 되면 장풍도 나가… 이런 소리도 했다니까요… --;;; 그땐 어리니까 귀엽다고 봐줬겠죠… 나 참.





그리고… 유레일패스 분실했다고 뻥쳐서 폴리스리포트 받고, 유레일패스 한장 더 발급받고… 93년 부터는 재발급 안해준다고 하더군요… --;; 죄송해요, 저 땜에 그래요…



빠리 대학가 지하철역 자동문 고장내고… --;;; 죄송해요, 표값 아낄라고 앞에 놈 바싹 붙어 쫓아가다가 배낭이 껴버렸쟎아요… 근데 그거 프랑스 아저씨들이 날 구해주느라고 망가뜨린거예요…



생각해 보니, 참… 유럽 대륙에 못 할 짓을 많이 했군요.

아무튼, 92년 유럽 사람들은 제게 참 잘해줬어요.

근데 2001년에 잠시 들렸었는데… 이젠 걔네도 동양인이 지겨운건지, 아니면 내가 나이가 들어서 험악해졌는지… 슬슬 인종차별을 느낄 수 있게 되더군요. 저도 나이가 들어서인지 이제는 ‘도사가 되면 장풍도 나가.’ 이런 헛소리 안하고 다닙니다…--;;

대신 왠지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하고… 그러다보니 내가 먼저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되고… 걔네들도 나한테 다가올 이유를 찾지 못하고… 이래서 배낭은 젊었을 때 가야해요.



추억은, 그저 추억일 분이죠??


Posted by 중년하플링 :

원본 : http://www.mediamob.co.kr/yeorim/Blog.aspx

완전한 페어 플레이란 없다

아쉽게도 오늘 새벽은 사방이 고요하다. 산 너머 월드컵 경기장에선 경기 시작때 터진
불꽃이 끝이었고 아파트 건너편 동의 창문들도 조용하다.

후반 31분에 들어간 스위스의 두 번째 골. 오프사이드 기가 올라간 상태에서 스위스
선수, 흔히들 그렇듯 헛 골일지라도...하는 심정으로 차넣었다. 그걸 본 주심, 기다렸
다는 듯 골 인을 선언하고, 이에 항의하는 태극전사들 옐로 카드를 받는다.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혹 내가 KTX 역방향 좌석에 앉아 남들과반대 방향으로 관전하다
오프 사이드가 아닌 걸 오프 사이드로 본 건 아닌가 싶어... 잠시 이 새벽에 내가 졸다
헛 걸 봤나 싶기도 하고...그런데 뭐야, 제기랄, 전반전어째 좀 과하게 우리 선수들한
테 불리한 판정을 준다 싶더니... 주심이란 놈, 잦은 방귀끝에 똥 싼다고, 결국은
한 건 크게 올리는군. 아르헨티나 출신이라고? 헹. 그 쪽에 이민 갔다온 방송인에게
들었는데 니네도 웬만한 건 맨 입으로 잘 안 해주나보더라. 초등학교 입학을 교장이
허락해준다는데 하도 허가를 안 해 주기에 동네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아르헨티나
교사들은 선물을 무척 좋아한다더란다. 그래서 교장에게 선물을 하나 갔다 줬더니
다음날로 바로 아들내미 입학을 허락하더라나. 물론 우리네도 선물 좋아하는 사람들
좀 있지만, 적어도 입학 정도는 맨 입으로 시켜준단 말이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그런 사회 분위기라면 주심과 스위스 출신의 FIFA 회장과의 염문설이 터진다 해도
난 하나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다구.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는지, 아님 바로 앞
의 대형 사고를 슬쩍 물 타버리려는 의돈지, 그 다음부터는 간간히 스위스에도 파울
을 선언, 주심다운 척 하려고 꽤 시늉은 하더라만. 그것까지 안 했음 국제전화 땡땡1
광고에 나오는 고릴라처럼 나도 TV를 창밖으로 던져버리려고 했는데 말이다.

열광으로 시작해 허탈 모드로 끝난 월드컵 경기를 보면서 남자들이 왜 이따금 자기들
에게 너무도 소중한 신체의 일부를 욕에다 끼어넣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같은'.


오래 전 기억이 떠오른다. 중, 고등학교 시절 '교내 영어 말하기 대회'.
교내 대회에서 뽑힌 한 명이 시 대회로, 그리고 시 대회에서 도 대회, 전국 대회로
나가게 되어 있던 '영어 말하기 대회'. 비록 다른 학과에선 큰 두각을 드러내지 못
했지만 중학교때부터 나는 영어를 무척 좋아했다. 요즘에야 뱃속에서부터 엄마가
배에다 대어주는 이어폰으로 영어를 듣고 큰다지만, 우리 때 FM도 잘 들리지 않던
구석탱이 지방에서는 대부분 영어라고는 중1때 받게 된 영어교과서가 첫 경험이다.
첫 수업시간, 거의 필리핀 따갈로 발음에 가까운 영어를 자랑하시는 영어 선생님 왈,
"내 발음을 들음 혼란이 오니 부디 혼자 집에 가서 열심히들 읽어라."
하여 나는 이 촌구석에서 영어는 결국 자가발전, 즉 독학이라는 외롭고 험난한 길
임을 직감, 서점으로 달려가 교과서 영어를 녹음한 테잎을 사서는 매일같이 앵무새
처럼 테잎 속의 톰과 제인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분식집 개 삼 년이면 라면을 끓인다
고... 이 단순무식과격한 따라하기도 오래 하다 보니 어느덧 적어도 발음에 있어선
필리핀 따갈로 영어 발음 선생님을넘어이제는영어 말하기 대회에 도전장을 내밀
경지에 이르게 된 것.하여, 중학교때 한 번, 고등학교 때 한 번, 두 번에 걸쳐교내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두 대회 모두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은 미미했다.예선전에서는 늘 영어 선
생님들과 청중인 학생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본선에선 늘 순위권 밖이었
던 것. 1,2,3 등은 언제나 육성회장, 자모회장, 혹은 지역 유지 딸들의 몫이었다.
심지어 그 중엔 발음은 고사하고 원고를 못 외워 본선에서 까지 원고를 들고 떠듬거
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말이다. 중학교때는 어려서 뭐가 뭔지를 몰랐지만 고등학교땐
슬그머니 분한 생각이 들었다. 1등을 한 친구는 육성회장인지 부회장인가 하는
병원장의 딸로서 장관의 조카이기도 했는데, 그래도 그 친구는 서울에서 살다와서
인지 발음부터가 세련되었고 표현력도 풍부했다. 그래도 예선에선 내 점수가 더 높
았다고 영어선생님께서 귀띔을 하셨는데... 그래도 그 친구가 본선에선 컨디션이
더 좋아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으니 그래, 1등 할 만 했지. 그런데 2등, 3등들은
사정이 좀 달랐다. 발음도 시원치 않았지만 소리조차 작았고 원고를 제대로 이해
하거나 전달하지도 못 하는 듯 했는데... 식구들이 모두 잠들었을 때 혼자 방 한
구석에서 영어 원고를 소리내어 읽고 또 읽었던 것도, 마침내 원고를 다 외워선
엄마 화장대 앞에서 서툰 손짓 발짓을 연습하고 연습했던 것도... 다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순간이었다. 대회가 끝나고 허탈한 마음으로 화단 앞에 혼자 앉아있
을 때였다. 평소 영어선생님들 중 가장 말씀이 적고 내게 별로 관심도 안 보이셨
던 선생님께서 다가와서는 넌지시 말씀하셨다.
"영어를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봐라."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선생님이셨다. 순간, 나는 'read between the linees'
라고.... 그 속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 내가 떨어진 건 내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난 '백'이 없어서, 운이 없어서였어. 비록 대회에서 떨어졌다고 해서 내가
영어를 싫어할 이유는 없는 거야. 그때부터 나는 더욱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고
마침내 그토록 어려웠던 문법의 장벽도 넘어설 수 있었다. 그리고 내 경험을 토대
로 영어 말하기 대회의 요령을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동생에게 전수, 동생은 드디어
교대 대회를 석권하고 마침내 시 대회에서도 1등을 하게 되었다. 음...한 가지 웃지
못할 일은, 동생은 그 나이에 아이들이 그렇듯 엄청난 암기력과 모방 능력이 우승의
열쇠였던 듯, 자기가 그렇게 유창하게 외워서 연설한 영문 원고의 내용을 실제로는
이해는 커녕, 당시 알파벳도 쓸 줄 몰랐다는 것이다. 그 시절, 초등학생들로선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었지만...

축구 90분은 인생 90년(이건 우리 아버지께서 설정해놓으신 희망수명이다.)과
닮았다.세상에 '페어 플레이'는 없다.

아무리 규칙이 있고 심판이 다섯이나있어도부심은 오프 사이드 깃발 올리고
주심은 오프 사이드 아니라 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제 아무리개인기가 뛰어나도
다른 선수들의 헤딩과 발놀림이 없으면 골을 성취할 수 없다. 개인기도 결국은
팀 웍이 있어야만 빛날 수 있는 것이다.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생각해야 할 것이
'행운의 여신'의 미소이다. 장신의 날렵한 골 키퍼나 이따금 황금같은 슛을 어이
없이 튕겨내는 저 잔인한 골대같은 것들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주여, 제게....
뿐인가. 상대 선수의 비열한 반칙, 정당하지만 섬찟하기 그지없는 태클도 극복해
야 한다.그리고토고의 경우처럼 상대방의 국가가 두 번 울려퍼지거나 상대방의
압도 적인 응원 숫자, 그리고 왕서방이 경기 끝나면 출연료 떼먹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약소 국가라는 비애도 극복해야 한다.


세상살이도 그렇다. 법이 있고 법 집행 기구가 있다 해도 때로는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있다. 내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내 주변의 가족, 사업의 파트너들이 협력해
주지 않음 안 된다. 이따금 멋 모르고 산 논밭이 고속도로가 되거나 행정수도 구역
이 되어 땅값이 껑충 뛴다든가, 아이엠에프때 전세가없어 울며 겨자먹기로 산 아
파트가 나중에 미친 듯이 값이 뛴다거나, 아님, 우리 동네 편의점에 붙은 '1등 로또
당첨 두 명 배출'이란 플랜카드의 영예의 주인공이 된다면 더더욱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따금 입사 면접을 볼 때 웬일인지 면접관들이 내 옆자리 수험생에게만
상냥하게 여러 번 질문할 때, 그리고 결혼 후 첫 명절에 수십 명의 시댁 군단에
포위된 채 홀로 찌짐을 부칠 때, 그리고 결혼 몇 년만에 첫 월급 봉투를 기다리고
있는데, 밤늦게서야 술 취한 남편이 전화를 걸어와 이 봉투 이대로 어딘가에 올 인
하겠다고 할 때의 충격도, 빽 못 가진 자로서의 비애도 극복해야 한다.

축구도, 인생도 온전히 실력만으로 승부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겉으로는
그나마 규칙과 상식이 통하는 합리적인 필드같지만, 그 필드는 사실 살기 위해
물 밑에선 서로 발을 동동거리는 백조의 호수와 같다. 이천수가 그라운두에 주저
앉아 우는 걸 보니 가슴이 아팠다. 마음같아선 소파를 박차고 잠옷 바람으로
'피터팬'의 웬디처럼 훨훨 날아가 위로라도 해주고 싶다. 이왕이면 그가 좋아하는
세레모니처럼 상의를 펄럭거려 나의 이니셜인 석 삼자, 가로줄 뱃살 무늬라도
보여줘 웃겨주고 싶다. 하지만, 천수여, 눈물을 닦고 일어나 다시 다음 경기를
준비하자. 그대는 축구로, 나는 인생으로, 우리는 이 수많은 장애물 경기에서
최선을 다해야 할 사람들이 아닌가. 세상이 아무리 더티 플레이 할지라도 슬퍼하거
나 노여워 말라. 우리의 마지막 goal은 슬픔과 노여움같은 감정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가 가리키는 곳이러니...
Posted by 중년하플링 :
시베리아 횡단열차, 지겹게 달리다보면...
[서평] 김선욱·마동욱·김매쇠가 함께 쓴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달린다>
텍스트만보기 김준희(thewho) 기자
▲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달린다> 표지
ⓒ 한얼미디어
배낭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꿈꾼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를 연결하는 총길이 9000km가 넘는 이 열차는, 글자 그대로 시베리아를 가로지르는 세계에서 가장 긴 열차구간이다.

이 열차가 배낭족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시베리아'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외경과 신비, 그리고 기차여행의 낭만과 여유로움이 합쳐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아직 미지의 지역인 시베리아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가장 적당한 방법이 바로 이 열차를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배낭여행자들이 선뜻 택할 수 있는 아이템이 아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기차 안에서만 보내는 시간이 일주일이고, 주요 도시마다 내려서 하루 이틀 머물며 구경을 하려면 여행의 예상 기간은 20일을 훌쩍 넘어버린다.

게다가 언어의 소통이 어려운 러시아 땅인데다가 까다로운 경찰들, 소문으로 떠도는 대도시의 스킨헤드와 마피아까지 상상을 해보면, 이 열차로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비용 이외에도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위험을 무릅쓴다 하더라도 장거리 열차여행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교통수단에 비해서 열차는 싸고 안전하고 시간도 잘 지켜지는 편이지만, 열차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하루 이틀을 넘어가면 그때부터 기차가 지겨워지는 현상이 시작된다.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몽골의 울란바토르에서 러시아의 이르쿠츠크로 가는 장거리 기차를 탔던 적이 있다. 중간에 몇몇 역에서만 잠시 내릴 수 있고 나머지 시간을 모두 기차 안에서 보냈던 그 2박3일. 출발할 때만 하더라도 왠지 모를 기대와 두근거림이 있었지만 그것이 지겨움으로 바뀌는 데는 채 이틀이 걸리지 않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비슷한 벌판의 풍경, 매번 기차 안에서 때워야 하는 간단한 식사, 제대로 씻지도 못하는 기차 안에서의 생활은 극히 단순해진다. 배고프면 대충 밥을 먹고 심심하면 책을 읽고 그러다가 졸리면 자고. 좁은 기차 안에서 그렇게 있다 보면 열차가 작은 역이라도 정차해서 바깥에 내릴 수 있기만을 바라게 된다.

게다가 기차는 또 왜 그렇게 느리게 달리는지. 좁은 한반도에 사는 우리는 KTX니 뭐니 해서 빠르게 이동하려고 하지만, 넓은 러시아 땅덩어리에 사는 사람들은 느리게 느리게 움직인다. 그 차창에 붙어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면 새장 속에 갇힌 새가 연상될 정도였으니, 그 2박3일 이후로 난 '러시아도 좋고 시베리아도 좋지만 횡단열차만큼은 사양하겠다'라고 말을 할 정도였다.

이런 어려움을 무릅쓰고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러시아를 여행한 사람들의 책이 나왔다. 소설가와 사진작가, 기자가 함께 시베리아를 횡단하고 그 여정을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달린다>라는 제목의 책으로 만들었다.

이들의 여정은 속초시 동명항에서 시작된다. 그곳에서 배를 타고 러시아의 자루비노 항을 거쳐서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이들은 이곳에서부터 기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가로지르기 시작한다. 하바로프스크와 이르쿠츠크, 예카테린부르크를 거쳐서 모스크바로.

이 중에서도 동시베리아에 해당하는 이르쿠츠크 동쪽 지역은 역사적으로도 우리나라와 많은 연관이 있는 곳이다. 일본강점기에 소련에서 독립운동과 공산당 활동을 했던 많은 한인들의 무대가 이 지역이고, 게다가 바이칼 호수는 한민족의 발원지라고까지 알려진 곳이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동시베리아의 도시에 머물 때마다 이곳을 거쳐간 한인들의 과거를 생각하고 우리 문화와의 유사성도 언급하고 있다.

물론 이들의 여행이 속 편한 여행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시설이 안 좋은 기차 안에서 더위에 시달려야 하고, 기차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닫힌 공간'인 기차 속의 고독과 맞서는 시간을 치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창밖으로 보이는 시베리아의 광활한 풍경을 지면과 사진을 통해서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원래 이들은 모스크바를 거쳐서 다시 기차를 타고 유럽으로 넘어갈 계획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페테르부르크에 머무는 도중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이들의 거침없는 행진은 여기서 끝이 나고 만다.

현지정보를 포함한 꼼꼼한 여정이나 여행 중의 에피소드, 현지인과의 만남보다는 여러 도시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현지에 얽힌 한인들의 이야기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이런 면이 조금 딱딱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책에 실린 풍부한 사진과 생생한 묘사가 횡단열차를 상상하기에 충분하다.

시베리아와 러시아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바이칼 호수나 예니세이 강, 우랄산맥 같은 지명만으로도 가슴이 설렐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동경하지만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곳 시베리아. 섣불리 떠날 수 없다면 이 책을 읽고 사진을 보면서 시베리아 여행의 대리만족을 느껴보는 것도 좋은 간접경험이 될 것이다.
Posted by 중년하플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