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토끼

2025. 2. 16. 15:24 from Lectura

- 2025.2, 존 업다이크/정영목 옮김

 

해리 '래빗' 앵스트롬은 고교 시절 잘 나갔던 농구선수. 지금은 임신한 아내(재니스)와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평범한 주방용품 판매원이다. 어느 날 갑작스럽게 차를 타고 집을 나가, 멀리 가버리려다가 실패하고는 고등학교 시절 감독을 찾아간다. 그리고, 우연히 식사를 같이 루스와 함께 살기 시작한다. 

 '어떤 분야에서 일류가 되면 이류가 되는 게 뭔지 감이 좀 잡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재니스와 내가 해온 그 웃기는 일, 그건 정말 이류였단 말입니다.'

그녀는 래빗의 아내와는 달리 독립적이고, 세상의 관습에 순응하지 않는 고유한 매력이 있다. 청소년 시절부터 많은 남자들과 관계하면서 낭만적인 사랑을 믿지는 않지만, 래빗에게서 뭔가 다른 것을 발견하고 그에게 자신을 맡긴다.  

 '신비한 것은 없었다. 그것이 그녀가 발견한 위대한 것이었다. 신비한 것이 없다는 것. 그냥 반한 척해서 남자애들을 왕으로 만들어주면 그만이었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오직 1분 전에 그녀가 가졌던 것뿐이다 방 안의 그 사람 착할 때는 그녀를 꽃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 그녀가 살을 벗어버리고 예쁜 공기가 되게 할 수 있는 사람 그는 그녀를 '예쁜 루스'라고 불렀다 만일 그가 방금 그녀에게 "예쁘다"는 말을 했으면 그녀는 대답을 했을지도 모르고 그는 여전히 이 벽들 사이에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녀는 첫날밤부터 부인이 이길 것임을 알았다. 그들에게는 갈고리가 있으니.'

하지만, 래빗은 가족을 버릴 수 없었다. 두달 간의 방황을 끝내고 결국 아내의 출산을 계기로 다시 가족에게 돌아간다. 

 '래빗은 진실을 느낀다. 그의 삶을 떠난 것은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것. 아무리 찾아 헤매도 되찾아올 수 없다는 것. 아무리 날아가도 거기에는 이를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여기에 있었다. 도시 밑에, 이 냄새와 이 목소리들 안에, 영원히 그의 뒤에. 우리가 자연에 몸값을 내면, 자연을 위해 아이들을 만들어내면, 충만함은 끝이 난다. 그러면 자연은 우리와 관계를 끝낸다. 처음에는 우리의 안이, 다음에는 밖이 쓰레기가 된다. 꽃의 줄기들.'

그렇게 돌아간 가족 안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속물적인 삶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한다.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양육하는 것 만큼 우리 안의 동물성을 절감하게 만드는 일이 있을까? 가족이야말로 우리를 현실로 끌어내리는 가장 무거운 족쇄이다.

 '도소매를 위해 사실을 왜곡하는 것을 가볍게 볼 수만 있다면 중고차 판매점 일은 아주 쉬운 편이다. 그러나 래빗은 오후 중반이면 진이 다 빠진다. 13만 킬로미터를 넘게 달리는 바람에 피스톤이 헐렁헐렁하여 오일이 그냥 쏟아져 나오는 고물 차가 들어와도, 세차를 하고 주행기록계를 뒤로 돌린 다음에 정말 싸게 파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는 용서를 구할 것이다.'

하지만 동물적인 본능만으로 살아가기에는 우리의 삶이 너무나 누추해진다. 빛이 없는 본능만으로 사는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가? 본능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빛을 바라보는 삶은 불가능할까?

 '그는 교회에 가서 작은 불꽃을 가져왔지만 집 안의 어둡고 눅눅한 벽에는 그것을 둘 곳이 없었다. 그래서 불꽃은 깜빡거리다 꺼지고 말았다. 그는 자신이 늘 그런 불꽃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님을 깨달았다. 그가 하루 종일 이곳에 붙들려 있었던 것은 아기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중고차 매장에서 사람들을 속이는 것보다 더 나은 뭔가가 어딘가에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큰 틀에서 보면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한때 밝은 빛을 알았지만, 어른이 되면서 삶의 동물적인 면에 질려버린 주인공이 겪는 방황. 인간의 삶을 신과 동물 사이의 아슬아슬한 균형을 잡아가는 끝없는 노력이라고 본다면, 래빗의 여정은 바로 그 균형을 찾으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어른의 책임감을 짊어지려 했던 그는 세속의 진창에서 한줄기 빛을 찾았을까? 어떻게 해도 우리는 삶의 동물적인 측면에 눈을 감을 수 없다. 하지만 그에 매몰되지 않고 계속해서 빛을 지향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결말에서 그는 균형을 내다 버린다. 어쩌면 이 소설의 결말이야말로 부조리한 우리 인생의 진실일 것이다. 

 '그는 모른다. 뭘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그가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무한히 작게, 잡는 것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작음이 광대함처럼 그를 채운다. 상대편이 그가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수비 두 명을 붙이는 바람에 어느 쪽으로 돌든 둘 중 한 명과는 부딪치게 되어 있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패스하는 것밖에 없던 때와 비슷하다. 그래서 그는 패스를 했고 공은 다른 사람들에게 갔고 그의 손은 텅 비었고 그를 막던 사람들은 멍청해보였다. 결과적으로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내가 나 자신이 될 배짱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대신 대가를 치러준다는 거야.' 

이 소설이야 말로 최근에 읽은 다른 책(죽음의 부정, 어니스트 베커)에 대한 대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은 죽음의 부정이야 말로 이 소설 '달려라, 토끼'에 대한 완벽한 주석이랄까.   

 : 우리는 자신에게 필요한 안정감을 얻기 위해, 불안과 고독과 무력함을 덜기 위해 공생 관계를 맺지만, 이 관계가 오히려 우리를 옭아매고 우리를 더더욱 노예로 만든다. -본문 110쪽 〈필수적 거짓으로서의 인간 성격〉
 :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속물근성’은 하찮음이었다. 그것은 사회의 일상적 틀에 안도감을 느끼고 거기서 만족감을 느끼는 인간이다. 오늘날의 세상에서 일상적 틀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자동차, 쇼핑센터, 2 주간의 여름휴가 등이 있다. 인간은 사회가 제공하는 확고하고 제한된 대안을 통해 보호받으며, 고개를 들어 자신의 길 너머를 보지만 않으면 막연한 안도감을 느끼며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본문 137쪽 〈키르케고르의 성격학〉
 : 사랑하는 대상에게서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자양분을 공급하는 데 필요한 위엄과 완벽함에 못 미치는 모습을 본다. 우리는 그들의 인간적 결점 때문에 우리 자신이 쪼그라든다고 느낀다. 세상 속 인간에게서 드러나는 필연적 비루함을 목격하면 우리의 내면이 공허하거나 고통스럽게 느껴지고 우리의 삶이 무가치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종종 사랑하는 사람을 공격하고 그들을 깎아내리려 드는 데는 이런 이유도 있다. -본문 270쪽 〈낭만적 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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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2025. 2. 9. 12:30 from Lectura

- 2025.2, 천명관 

 

한국 소설을 자주 읽는 편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왜 이 책을 집어들게 되었는지는 다소 불분명하다. 어디선가 이 소설이 재미있다는 이야기를 본듯도 하다. 어쨌든 거의 2년 전에 제주도의 한 서점에서 집어든 책을 오늘에야 다 읽었다. 짧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봐야 이야기책 하나를 읽는데 이렇게 오래걸린 이유는, 사놓고 시작을 늦게 한 탓도 있지만 한동안 읽기를 멈춘탓이다. 기구한 주인공의 삶을 따라 가기가 힘들었을까? 금복의 삶이 바닥에서 높이 솟아오르는 과정을 지켜보는 과정은 나름 견딜만했으나, 정점에서 추락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기 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소설도 하나만 제대로 하면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이다. 영화로 치자면 매드맥스나 존윅 같은 소설이랄까? 오로지 이야기의 힘으로 주인공의 삶에 공감하고 감동하게 만든다. 사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확실히 '백년 동안의 고독'이 연상된다. 원래 이야기는 사실과 거짓 혹은 과장이 뒤섞여야 재미있는 법. 천명관 작가는 어떻게 하면 독자의 관심을 유지시키면서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다 읽고나서 삼대에 걸친 흥망성쇠를 차분하게 되돌아 보면 그게 우리네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처럼 극적이거나 드라마틱하진 않을 지라도, 우리의 삶도 이 소설에서 이야기된 모든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집착, 모험, 세속적인 성공, 욕망, 사랑, 잔인함, 복수, 배신. 소설이 현실의 반영이듯, 현실 역시 소설이라는 렌즈를 통해 재구축 될 수 있다.

 

삶은 의미를 찾기 힘든 건조한 순간들의 연속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재미있는 이야기의 한토막이 될 수도 있다.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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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2 무라카미 하루키/유유정 옮김

어떤 이야기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그것이 원형(archetype)적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다. 확실히 어떤 이야기가 왜 원형적인가하는 설명을 듣다 보면 무척이나 그럴듯하게 느껴지는데, 사실은 훌륭한 이야기를 사후적으로 짜맞춘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늘 마음 한구석에 가졌더랬다.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는 지금까지 세번쯤 읽었던듯 싶다. 처음 읽었던 것은 대학교 1학년때의 일로 기억하는데, 읽을 때마다 어쨌든 재미는 있었고,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해도 뭔가가 더 있다는 생각을 했던것 같다. 이제 오십이 되어서 읽은 이 소설은 최근 알게 된 융심리학에 비추어 봤을때 원형적인 구조가 너무나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는 이야기였다.  

융은 아니마(anima)와 투사(projection)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모든 남자의 무의식에는 인류가 집단적으로 만들어낸 이상적인 여성의 원형이 존재한다. 이를 아니마라고 부르는데, 아니마는 한 남자의 내적 성장에서 무척이나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남자의 무의식과 의식을 연결하는 다리와 같은 것으로, 의식에 존재하는 남성적인  자아(ego)를 깊고, 광활한 무의식의 세계와 연결하여 삶의 의미를 만들어낸다. 남자들의 의식 세계는 어디까지나 남성적인 원리에 기반하여 돌아간다. 일상적인 삶에서 생존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남성성의 원리를 바탕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 세계에서는 부드럽다던지 친절하다던지 동정심을 가진다는 것은 있으면 좋은 부차적인 역할에 그친다. 하지만, 한 남자가 일상 세계에서 성장하고 자리를 잡기 위해 남성성에만 의존해서 살아가게 되면 세상은 의미를 상실한 잿빛이 되어간다. 세상에서 자리잡기 위해 추구한 그것으로 인해 의미가 살아져버린 세상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때 다시 한번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마이다. 아니마는 지나친 남성성 추구로 인해 잃어버린, 살아가야 하는 의미를 다시 한번 삶으로 되돌릴 수 있는 무의식이 선물이다. 

하지만, 아니마는 무의식에 영역에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인식할 수가 없다. 의식화를 위해 아니마가 사용하는 전략은 투사이다. 즉, 실제세계에 존재하는 다른 이성에게 무의식의 아니마가 겹쳐지면서 그 여자는 세상에는 존재할 수 없는 여신의 역할을 하게된다. 이때 그 남자는 특정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 내면의 아니마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이것이 로맨스의 경험으로 나타난다. 이 로맨스는 지상의 세계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원형적인 여성과의 사랑이다. 결국은 로맨스에서 깨어나 현실의 여자와 마주하거나, 다른 여자에게 투사를 옮겨여 또 다른 로맨스에 빠지는 형태로 일이 진행된다. 내적 성장을 위해서는 아니마에 의한 투사는 내적 성찰을 위해 활용하고, 현실의 여자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분리가 필요하다. 현실의 여자와의 사랑은 로맨스처럼 광휘에 휩쌓여있지도 않고 천상적이지도 드라마틱하지 않다. 그것은 찬밥에 물을 말아 김치를 먹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일들로 이루어진다. 애정의 대상을 여신으로 만들지 않고, 그/그녀의 인간적인 단점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관계이다. 내면의 아니마는 그대로 여성적인 원리로 존중하며, 자신의 무의식과 대화를 계속 해나가면서 여성적인 원리들을 자신의 자아에 통합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큰 틀에서 상실의 시대는 성장 소설이다. 주인공 와타나베는 나오코와 미도리 사이에서 갈등한다. 만일 와타나베가 나오코의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고, 성장하지 못했다면, 그는 죽음의 세계에 홀리게 되었을 것이다. 대신 그는 삶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성장하는 편을 선택했다. 나오코는 아니마이고 미도리는 현실의 여자이다. 아니마는 원형이기 때문에 삶의 세계가 아닌 죽음의 세계(무의식)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와타나베는 나오코와는 섹스를 할 수가 없다. 

와타나베는 나가사와 선배와 함께 하면서 많은 여자와 잠을 잘 수 있지만, 그 무의미함에 권태를 느낀다. 남성적인 자아는 더 많은 여자와의 섹스가 더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이때 중요한 것은 얼마나 효율적으로 원하는 바를 얻을 것인가이다. 나가사와는 이 같은 남성적인 원리에 극단으로 치우친 인간이다. 그는 나름 친절하고, 남에게 상처를 입히고 싶어하지는 않지만, 옆에서 보기에 비뚤어진 인간이다. 그는 누구와도 진정으로 연결될 수 없다. 내면적인 여성성의 원리에서 너무나 멀어져버린 극단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비록 멋진 여자친구가 있지만, 의미를 찾지 못하면서도 계속해서 많은 여자들과의 섹스를 '해치워나간다'. 외부의 사물/사람은 그 자체로 내재적인 가치를 갖고 있지 않다. 우리가 내부에서 가치를 부여했을때만 외부의 사물과 인간은 가치를 갖게 된다. 나가사와는 함께 잠을 자는 여자들과 내면적으로 연결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그녀들과의 섹스에 아무런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그가 여자들과 잠을 자는 이유는 단순하게도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황량한 세상은 오로지 남성적인 원리로만 이루어진 세상이다. 와타나베는 나가사와 보다는 '성숙'하다. 하지만, 그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아니마 투사. 즉, 나오코를 극복해야 한다. 이는 나오코의 죽음과 상실감으로 방황하는 와타나베를 통해 표현된다. 이때 도움이 된 것은 의외로 나가사와가 해준 이야기이다. '자기 자신을 동정하지 말것'. 그리도 나오코와의 또 다른 연결고리인 레이코 여사와의 섹스를 통해서 일상적인 인간 여자와의 친숙함을 되찾는다. 레이코 여사는 어떤면에서 성숙한 아니마이다. 나오코가 자신의 아픔을 극복했으면 될 수도 있었을, 성숙하고 사려깊은 여성성을 표현한다. 이는 나오코가 죽으면서 그녀의 옷을 레이코 여사에게 전달하는 것을 통해 상징된다. 즉, 레이코는 또다른 나오코인 것이다. 그녀와의 관계를 통해 와타나베는 미숙한 아니마 투사를 멈출 수 있게 되었고, 미도리에게 돌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이런 면에서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표면적인 인상과는 다르게 희망적이다. 우리는 아무리 성장하더라도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단지, 조금 더 나아지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할 뿐이다. 그 노력이 결국 성장의 핵심이다. 계속 상처를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것. 상처 받을 것을 받아들이면서 좌절하지 않는 것. 

 'Sing like no one is listening, love like you've never been hurt, dance like no one is watching, and live like it is heaven on earth'.   - Mark Tw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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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Value of Others

2024. 8. 17. 13:37 from Lectura


- 2024.8, Orion Taraban

유투브에서 Psychacks라는 채널로 유명해진 '오라이언 타라반' 박사가 최근 출간한 책. 문장은 장황하고 중언부언을 반복한다. 아마도 편집자가 적극적으로 수정했다면, 더 나은 책이 되었으리라. 유투버라는 후광 때문인지 저자가 쓴 원문에 별로 손을 안댄 모양. 소프트웨어로 치면 스파게티코드라고 해야 하나, 여기저기 줄일 수 있는 부분이 많이 보인다. 2/3에서 1/2 분량으로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있다. 글이 촘촘하게 씌여졌는가와는 별개로 저자는 전혀 새로운 아이디어를 이야기 해준다. '(남여) 관계란 가치가 교환되는 방식이다. 이때 교환되는 가치는 서로 동일하지 않은 종류의 것이지만 상대방에게는 비슷한 수준의 효용을 줘야한다'. 가장 간단한 남여관계의 교환은 바로 섹스와 자원(돈, 관심, 시간 등)의 교환이다. 사랑에 의지해 영원을 약속하는 남녀 관계의 속성이란 이처럼 이성적이며 이기적인 것이다. 경제적 연예인간론이라고나 할까? 전제를 이렇게 잡고 생각하면 남녀 관계의 많은 미스터리가 설명된다. 왜 남자는 여자의 외모에 혹하고, 한 사람에게 정착하는 걸 어려워할까? 왜 심순애는 사랑하는 이수일을 버리고 돈 많은 남자와 결혼을 해야 했을까? 왜 오늘날의 연애 시장은 과거와 달라졌을까?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자들이 정작 결혼하기 힘들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의문들이 기본 전제를 바꾸는 것으로 놀랍도록 간단하게 설명된다. 

남녀의 연예관계는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Attraction/Negotiation/Maintenance.

Attraction은 상대방에게 끌리는 단계이다. 이때 여자들은 대상과 직접적인 접촉을 하기 훨씬 전부터 상대방을 평가한다. 이에 비해 남자들은 여자들에 비해 늦게 상대방을 인식한다. 

 - Most attraction is not spontaneous. It is responsive, which means that it arises in the presence of certain stimuli.
 - Seduction functions through the manipulation of desire.
 - men increase their optionality by being visibly competent, whereas women increase their optionality by being visibly attractive.
 - The most successful wanters in the Game are like water: they flow. They’re not committed to any given strategy, and they’re responsive to the feedback they receive in their rejection.

Negotiation 단계는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지를 정하는 단계이다. 말로 협상하지는 않는다. 흔히 말하는 밀고 당기기를 통해 결정. 

 - The necessity of negotiating sexual opportunity is the fundamental driver of self-improvement.
 - We manipulated ourselves when we narrowed our focus to exclude all other possibilities for action beyond those presented by the other party, which is what limited the effectiveness of our response. And we manipulated ourselves when we refused to tolerate the painful emotion aroused within us, which is what motivated us to surrender to the impulse or consent to the behavioral alternative.
 - the more powerful player is the one more tolerant of emotion.

이렇게해서 관계가 성립되면 그 다음은 Maintenance 단계이다. 일반적으로는 결혼단계인데, 이 단계에서는 위기가 찾아온다. Disillusion/Attempted Mutiny(주도권 다툼)/Doldrums(권태기). 저자는 각각의 단계마다 극복할 수 있는 방안과 여러가지 팁을 제시해주고 있다. 

다 읽고나면 너무나 냉정한 분석에 정이 떨어지기도 하지만, 현실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점수를 줄 수 밖에 없다. 꽤 오래전부터 인기를 얻기 시작한 'red pill' 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훨씬 과학적이고 중립적인 관점에서 설명을 해준다. 이런 측면에서도 남자와 여자 모두 일독을 권할만 하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할 수 있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 우리는 현실을 모사할 수 있는 너무나 효율적인 도구인 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주 쉽게 현실을 왜곡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생물이라는 혹은 동물이라는 점은 우리 존재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합리화는 할 수 있겠지만, 생물로서의 근본적인 본능이 차지하는 중요도가 낮아질수는 없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인 배우자를 찾는 일에서도 이 본능과 이성의 균형이 늘 중요한데, 요즘은 대체적으로 지나치게 이성적인 결정을 하는 경향이 있는듯 싶다. 다시 한번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 생각난다. 우리 문명이 겪고 있는 위기는 남자들이 남자같지 않기 때문이라는 문장. 이 책도 본질적으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단지 남녀관계가 예전과는 달라질 것이라고 보고 있는듯.

앞으로의 남녀관계는 과거와는 달라질 것이라는게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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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중년하플링 :

채털리 부인의 연인

2024. 4. 20. 19:02 from Lectura

 

- 2024.3.24,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지음/이미선 옮김

 

로맨스 소설을 가장한 문명 비평서. 야하다기 보다는 어른을 위한 로맨스 소설? 사용되는 단어가 다소 직접적이어서 그렇지 파격적으로 야한 내용은 없다고 봐도 좋을듯. 

작가가 이야기한 그 시대의 문제는 현대의 우리에게도 여전한 문제이다. 

 - 문명사회는 미쳐 있었다. 돈과 소위 사랑이라는 것이 사회의 두 가지 큰 광증이었다. 돈이 단연 첫 번째 광증이었다. 개인은 각자 따로따로 미쳐서 돈과 사랑이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자신을 주장했다. 
 - 암캐 여신을 차지하려고 다투는 개들은 크게 두 무리가 있었다. 하나는 암캐 여신에게 오락과 소설과 영화와 희곡을 바치는 아첨꾼 무리였고, 다른 하나는 훨씬 덜 화려하지만 훨씬 더 야만적인 족속으로 고기, 즉 돈이라는 진짜 알맹이를 바치는 사람들이었다. 
 - ‘돈만 생가카지 맘씨다. 필요한 것들로 마라자면 우리에게는 거의 다 이씀니다. 돈 때문에 살지 맘씨다’

작가가 일찌감치 예상한 바와 같이 산업화 이후 다른 삶의 목적을 갖지 못한 현대 문명은 맹목적으로 돈을 추구하고 있다. 가정이라는 말은 따뜻한 의미를 잃고, 그냥 모여사는 곳을 지칭하는 말이 되어 버렸다. 부모는 돈을 벌기 위해 쥐어짜이고, 그렇게 번 돈을 아이가 원하지도 않는 교육을 시키기 위해, 천정부지로 올라가는 아파트를 사서 한몫 잡기 위해 소비한다. 그리고, 미래의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한 지출이라며,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하고 있다며, 위에 서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앞서 나가야 한다며, 그렇게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정당화 한다.
 
  - 코니가 보기에 좋은 말은 전부 그녀 세대에게서 소멸되어 버렸다. 사랑, 기쁨, 행복, 집, 어머니, 아버지, 남편 같은 역동적이고 근사한 말들은 지금 반쯤 죽어 있었고 날마다 죽어 가고 있었다. 집은 우리가 사는 곳일 뿐이고, 사랑이란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기쁨이란 즐거운 찰스턴 춤에 쓰는 말이고, 행복이란 점잔을 빼며 남들에게 허풍을 떨기 위해 사용하는 위선적인 말이며, 아버지는 자기 자신의 생활을 즐기는 개인일 뿐이고, 남편이란 함께 살면서 정신적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게 만들어 줘야 하는 남자였다. 
 
이런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작가에 의하면 남자는 다시 한번 남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여자들도 여성스러워질 것이다. 모든 돈을 쫓는, 암캐 여신을 쫓는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 일그러져 있다. 보기 흉하게 돈의 노예가 된 삶. 이것을 극복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남자와 여자의 성적인 결합을 통해, 관능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 전혀 논리적이지 않고 황당한 소리처럼 들린다. 

보노보와 침팬지의 차이를 아는가? 두 유인원 종류는 지구상에 현존하는 어떤 동물보다 인간과 가깝다. 처음에 학자들은 둘을 같은 종으로 구분했다. 둘다 무리를 이루어 생활하며 식습관이나 외양이 비슷하기 때문인데, 사회적 협력을 위한 행동전략에서 차이를 보인다. 침팬지는 인간과 비슷하다. 폭력, 위협, 외교 등의 전술을 활용한다. 이에 반해 보노보는 섹스를 상호 협력의 수단으로 삼는다. 

로렌스의 주장이 그렇게 황당하기만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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