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2, 존 업다이크/정영목 옮김
해리 '래빗' 앵스트롬은 고교 시절 잘 나갔던 농구선수. 지금은 임신한 아내(재니스)와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평범한 주방용품 판매원이다. 어느 날 갑작스럽게 차를 타고 집을 나가, 멀리 가버리려다가 실패하고는 고등학교 시절 감독을 찾아간다. 그리고, 우연히 식사를 같이 루스와 함께 살기 시작한다.
'어떤 분야에서 일류가 되면 이류가 되는 게 뭔지 감이 좀 잡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재니스와 내가 해온 그 웃기는 일, 그건 정말 이류였단 말입니다.'
그녀는 래빗의 아내와는 달리 독립적이고, 세상의 관습에 순응하지 않는 고유한 매력이 있다. 청소년 시절부터 많은 남자들과 관계하면서 낭만적인 사랑을 믿지는 않지만, 래빗에게서 뭔가 다른 것을 발견하고 그에게 자신을 맡긴다.
'신비한 것은 없었다. 그것이 그녀가 발견한 위대한 것이었다. 신비한 것이 없다는 것. 그냥 반한 척해서 남자애들을 왕으로 만들어주면 그만이었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오직 1분 전에 그녀가 가졌던 것뿐이다 방 안의 그 사람 착할 때는 그녀를 꽃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 그녀가 살을 벗어버리고 예쁜 공기가 되게 할 수 있는 사람 그는 그녀를 '예쁜 루스'라고 불렀다 만일 그가 방금 그녀에게 "예쁘다"는 말을 했으면 그녀는 대답을 했을지도 모르고 그는 여전히 이 벽들 사이에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녀는 첫날밤부터 부인이 이길 것임을 알았다. 그들에게는 갈고리가 있으니.'
하지만, 래빗은 가족을 버릴 수 없었다. 두달 간의 방황을 끝내고 결국 아내의 출산을 계기로 다시 가족에게 돌아간다.
'래빗은 진실을 느낀다. 그의 삶을 떠난 것은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것. 아무리 찾아 헤매도 되찾아올 수 없다는 것. 아무리 날아가도 거기에는 이를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여기에 있었다. 도시 밑에, 이 냄새와 이 목소리들 안에, 영원히 그의 뒤에. 우리가 자연에 몸값을 내면, 자연을 위해 아이들을 만들어내면, 충만함은 끝이 난다. 그러면 자연은 우리와 관계를 끝낸다. 처음에는 우리의 안이, 다음에는 밖이 쓰레기가 된다. 꽃의 줄기들.'
그렇게 돌아간 가족 안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속물적인 삶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한다.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양육하는 것 만큼 우리 안의 동물성을 절감하게 만드는 일이 있을까? 가족이야말로 우리를 현실로 끌어내리는 가장 무거운 족쇄이다.
'도소매를 위해 사실을 왜곡하는 것을 가볍게 볼 수만 있다면 중고차 판매점 일은 아주 쉬운 편이다. 그러나 래빗은 오후 중반이면 진이 다 빠진다. 13만 킬로미터를 넘게 달리는 바람에 피스톤이 헐렁헐렁하여 오일이 그냥 쏟아져 나오는 고물 차가 들어와도, 세차를 하고 주행기록계를 뒤로 돌린 다음에 정말 싸게 파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는 용서를 구할 것이다.'
하지만 동물적인 본능만으로 살아가기에는 우리의 삶이 너무나 누추해진다. 빛이 없는 본능만으로 사는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가? 본능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빛을 바라보는 삶은 불가능할까?
'그는 교회에 가서 작은 불꽃을 가져왔지만 집 안의 어둡고 눅눅한 벽에는 그것을 둘 곳이 없었다. 그래서 불꽃은 깜빡거리다 꺼지고 말았다. 그는 자신이 늘 그런 불꽃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님을 깨달았다. 그가 하루 종일 이곳에 붙들려 있었던 것은 아기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중고차 매장에서 사람들을 속이는 것보다 더 나은 뭔가가 어딘가에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큰 틀에서 보면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한때 밝은 빛을 알았지만, 어른이 되면서 삶의 동물적인 면에 질려버린 주인공이 겪는 방황. 인간의 삶을 신과 동물 사이의 아슬아슬한 균형을 잡아가는 끝없는 노력이라고 본다면, 래빗의 여정은 바로 그 균형을 찾으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어른의 책임감을 짊어지려 했던 그는 세속의 진창에서 한줄기 빛을 찾았을까? 어떻게 해도 우리는 삶의 동물적인 측면에 눈을 감을 수 없다. 하지만 그에 매몰되지 않고 계속해서 빛을 지향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결말에서 그는 균형을 내다 버린다. 어쩌면 이 소설의 결말이야말로 부조리한 우리 인생의 진실일 것이다.
'그는 모른다. 뭘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그가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무한히 작게, 잡는 것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작음이 광대함처럼 그를 채운다. 상대편이 그가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수비 두 명을 붙이는 바람에 어느 쪽으로 돌든 둘 중 한 명과는 부딪치게 되어 있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패스하는 것밖에 없던 때와 비슷하다. 그래서 그는 패스를 했고 공은 다른 사람들에게 갔고 그의 손은 텅 비었고 그를 막던 사람들은 멍청해보였다. 결과적으로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내가 나 자신이 될 배짱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대신 대가를 치러준다는 거야.'
이 소설이야 말로 최근에 읽은 다른 책(죽음의 부정, 어니스트 베커)에 대한 대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은 죽음의 부정이야 말로 이 소설 '달려라, 토끼'에 대한 완벽한 주석이랄까.
: 우리는 자신에게 필요한 안정감을 얻기 위해, 불안과 고독과 무력함을 덜기 위해 공생 관계를 맺지만, 이 관계가 오히려 우리를 옭아매고 우리를 더더욱 노예로 만든다. -본문 110쪽 〈필수적 거짓으로서의 인간 성격〉
: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속물근성’은 하찮음이었다. 그것은 사회의 일상적 틀에 안도감을 느끼고 거기서 만족감을 느끼는 인간이다. 오늘날의 세상에서 일상적 틀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자동차, 쇼핑센터, 2 주간의 여름휴가 등이 있다. 인간은 사회가 제공하는 확고하고 제한된 대안을 통해 보호받으며, 고개를 들어 자신의 길 너머를 보지만 않으면 막연한 안도감을 느끼며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본문 137쪽 〈키르케고르의 성격학〉
: 사랑하는 대상에게서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자양분을 공급하는 데 필요한 위엄과 완벽함에 못 미치는 모습을 본다. 우리는 그들의 인간적 결점 때문에 우리 자신이 쪼그라든다고 느낀다. 세상 속 인간에게서 드러나는 필연적 비루함을 목격하면 우리의 내면이 공허하거나 고통스럽게 느껴지고 우리의 삶이 무가치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종종 사랑하는 사람을 공격하고 그들을 깎아내리려 드는 데는 이런 이유도 있다. -본문 270쪽 〈낭만적 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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