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ey & Power/노무현과 한국사회의 변화'에 해당되는 글 19건

  1. 2004.11.21 [노변정담]노-부시회담, 기대도 낙담도 할 것 없다.
  2. 2004.11.16 네오콘, 한반도 전쟁 꿈도 꾸지 마라
  3. 2004.10.07 [알리]를 보고 드는 잡 생각들 1
  4. 2004.10.02 도덕적인, 너무나 도덕적인
盧-부시회담, 기대도 낙담도 할 것없다
2004-11-19 12:03서영석 (du0280@dailyseoprise.com) 정치전문기자
▲ 서영석 정치전문기자
20일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미 대통령이 만난다. 노 대통령이 한미정상회담 전 기착지인 로스앤젤레스에서 부시에게 북핵해결을 위한 북미대화를 촉구한 것을 놓고 극우언론들은 나라가 절단이라도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한 인터넷 매체는 한미정상회담에서 공동성명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둥 회담 성과를 어둡게 전망하기도 했다. 비단 이런 매체들뿐 아니라 모든 언론들은 한미정상회담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면서 낙관적인, 혹은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한미 정상의 일회적 만남이 아니다. 좀 격하게 표현한다면, 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 기대할 것도, 실망할 것도 없다. 극우신문이나 대부분 매체들의 호들갑은 무지나 무식, 혹은 단견의 소치일 뿐이다. 한국과 미국, 북한과 미국, 한국과 북한 간의 관계는 미국의 정권이 바뀌거나 유지된다고 해서, 혹은 한국의 대통령이 ‘감히’ 북미대화를 촉구한다고 해서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날 정도로 간단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부시 2기 내각이 강경파로 바뀌고 있는 것은 확실히 한미관계에 좋지 않은 징후이긴 하다. 북미관계에도 마찬가지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중장기적인 효과로 나타나는 것일 뿐 단기적으로는 별 영향이 없다. ‘영향이 없다’라는 말은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이런 변화가 중장기적으로 움직이는 3국관계에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얘기가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아직 북한 선제공격의 환경 조성은 되지 않았다



왜 그런가. 그것은 한반도를 둘러싼 3국의 관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중국과 러시아 일본을 포함시킨 6국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미국의 새로운 군사전략과 대외전략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며, 그러한 조건을 미리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눈 나쁜 사람이 코끼리 더듬는 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새로운 군사전략과 대외전략 가운데 대북한 전략은 현재 이런 단계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미국은 미국 대통령이 동북아 경영의 필요에 따라 명령만 내린다면, 핵무기까지 동원하는 것도 마다치 않고 북한을 선제공격해서, 영토를 점령하고 김정일 정권을 교체시킬 수 있도록 제반 환경을 구축해가는 시기에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현재 이러한 제반 환경은 아직 구축돼 있지 않은 상태다.



지금은 그러한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우선 주한미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주한미군을 북한 장사정포 사거리 바깥으로 이전시키는 단계에 있다. 오산-평택에 주한미군의 근거지를 마련하겠다는 것은 장사정포 사거리 바깥으로 나가겠다는 미국 정부의 확고한 의지가 개재돼 있다.



또한 지금은 대북 선제공격시 이라크전쟁의 경우에서처럼 전통적인 전쟁 개념에서의 전선을 무시하고 첨단무기 등을 대량으로 투사해 북한을 단기간내에 점령하고 평양의 김정일 정권을 교체할 수 있도록 주한미군은 물론 미국 동북아 전략의 핵심거점인 일본 주둔 미군의 전력 증강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단계다.



사실 미국은 향후 잠재적 적국인 중국을 포위해서 무력화시킬 수 있는 핵심거점으로 일본을 생각하고 있다. 일본의 평화헌법을 개정시키려 압력을 넣고, 새로운 주일미군 기지를 일본 자위대와 공동으로 사용하도록 하는 등의 모든 행위는 바로 이러한 미국의 동북아 전략에서 나오는 것이다.



일본을 핵심거점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사고는 미국 국무성의 반세기 이래의 사고방식이다. 이미 한국전쟁이 벌어지기 직전 미 국무부와 국방부는 일본은 자본주의 체제의 방어를 위해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지역으로 판단했고, 한반도의 남쪽은 유사시 버릴 수 있는 곳이란 판단을 내린 역사도 있다. 유명한 애치슨 라인이 그냥 나온 얘기는 아니다. 그것이 결국 한국전쟁을 유발시키는 원인 가운데 하나로 작용한 바 있다.



2008년 전후한 시기가 가장 위험한 순간



어떻든 미국은 일본의 핵심거점이 완성되면 현재 주한미군사령관 겸 한미연합사령관에게 주어지는 4성장군의 지위를 핵심거점으로 옮길 것으로 보인다. 일본이 미국의 사활적 이익이 걸린 장소가 되는 것이고, 한반도의 남쪽은 약간의 피해를 감수해도 되는 지역으로 변모한다. 쉽게 얘기하면 다소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북한을 공격할 수 있는 준비는 완료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은 그 시기가 대략 2008년을 전후한 시기가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때까지는 지금 미국을 괴롭히고 있는 이라크 전쟁의 늪에서도 벗어날 것으로 미국 전략가들은 보고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정황은, 필자가 전번의 컬럼에서 소개했듯이 미국이 ‘힘에 의한 세계경영’이란 모토 아래 이른바 ‘1-4-2-1 전략’을 채택하면서부터 움직일 수 없는 수레바퀴처럼 굴러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세번째 ‘2’의 대상으로 북한과 이라크를 지목했고, 마지막 ‘1’의 대상으로 이라크를 찍어, 침략을 감행한 이후 사실상 북한 전복을 위한 시계는 작동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미 국무부나 국방부 펜타곤의 어느 구석방에 앉아 있는 하급관리의 볼펜이 1cm 오른쪽으로 가느냐, 왼쪽으로 가느냐에 따라 수십만, 수백만의 인명이 살았다가, 죽었다 하는 것이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의 냉엄한 현실이다. 미국 전략의 큰 틀이 바뀌거나 북한 김정일 정권이 '항복'하기 전까지는 이런 흐름은 변치 않는 진실일 뿐이다.



이런 흐름이 현실로 나타나기까지 시간은 있다. 이 남은 시간 속에서 북한은 벼랑끝 외교를 펼치고 있고, 미국은 심심하면 공갈을 쳤다 달랬다 어르고 있는 중이다. 이름도 그럴듯한 인권법안을 통과시킨다든지, 탈북자들에게는 어렵기로 소문난 미국 망명을 허용한다든지 하는 것은 북한을 향한 일종의 ‘잽’이다.



이 와중에서 한국은 미국의 북한공격이 가져올 남한의 파멸적 결과를 막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김대중 정권시절의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은 이런 몸부림의 결과물이며, 노무현 대통령이 로스엔젤레스에서 한 발언도 그러한 몸부림의 연장선에 서 있다. 가진 자들이 어떡하면 미국으로 재산과 함께 내뺄지 머리 싸매고 있는 것도 이런 상황을 재빨리 간파했기 때문이며, 재벌들이 부지런히 공장을 해외로 빼돌리면서 국내 투자를 망설이는 이유도 사실 이런 배경이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 한미간, 혹은 북미간 오가는 것들은 모두 외교적 수사이며, 립 서비스에 지나지 않는다. 부시 2기 정권에 매가 아니라 독수리들로만 가득 채워놓는다 하더라도 지금 당장 북한을 때려 부술 준비가 덜 된 이상, 말로 하는 공갈 이상의 것은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이러한 미국의 대북한 전략을 막을 능력이 있는가.



진정한 자주, 불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있다고 할 수도 있고,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미국의 세계경영전략에 변경을 가할 만큼 우리의 능력이 뛰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뭐, 그렇다고 부끄러워할 필요까지는 없다. 경제대국 일본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고이즈미가 부시의 베스트 프렌드로 꼽히는 것은, 일본이 이러한 미국의 동북아 경영전략에 적극 협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패전 이후 ‘덴노 헤이까’의 자리를 ‘맥아더’로 대치하면서 별로 부끄럼 없이 미국의 우산 속에 들어갈 태세를 갖춰 왔다. 사실 미국의 동북아 핵심거점으로서, 아시아의 ‘유일한’ 미국 대리인이 되는 것이 일본인의 심성에 맞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고이즈미가 지금은 부시의 베스트 프렌드로 꼽히고 있지만 일본도 미국의 콧털을 건드린 적은 있었다. 1993년 북일수교를 시도했는데, 미국은 제1차 한반도 핵위기를 조성해 무산시켰고, 2002년 9월에는 바로 그 고이즈미가 방북해 두번째로 북일수교를 시도하자 미국은 다시 2차 한반도 핵위기를 조성해 무산시켰다. 미국은 동북아 경영을 국무부나 국방부의 하급관리들 볼펜에 맡길 지언정 일본이나 한국이 숟가락 드는 것은 참지 못한다. 그래서 없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김대중 정권이 미국을 물먹이는 비밀외교를 통해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고, 6·15공동선언을 이끌어냈다. 미국 허락없이 김대중 정권이 남북정상회담을 했다고 지금도 뒷다마 까는 인간들이 있는데, 사실 이런 류는 부시 똥꼬나 빨 인간들에 불과하다. 미국에게 허락을 구했더라면 뺨이나 맞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대북 참모들이나, 핵심적 전략가들은 사실 김대중 정권이래로 봉사해 왔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남북정상회담을 이뤄냄으로써, 그동안 미국과 대립각을 세워왔던 북한이 전매특허로 써 먹었던 ‘자주’란 단어를 남한의 품으로 끌어올 수 있었다. 자주는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로스앤젤레스 발언은 결국 6·15공동선언 정신의 연장이요, 부연에 불과하다.



아직은 시간이 있다



아직도 시간은 남아 있다. 이 시간 속에서 미국의 동북아경영전략 자체를 바꿔놓을 수는 없겠지만,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지 못하도록(공격을 위해서는 남한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물론 협조 없이도 공격은 가능하나 미국의 전략인 영토 점령과 정권 붕괴를 위해서는 남한의 주한미군이 동원돼야 하기 때문이다) 억제하고, 북한에게 '항복'할 수 있는 명분과 체면을 제공해 줄 수는 있다.



지금쯤 한승주 주미대사는 장관급 외교관인데도 불구하고, 미 국무부의 하급관리들을 찾아다니면서 제발 한미정상회담에서 부시가 공격적 발언을 하지 않도록 두 손 싹싹 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부시 역시 내가 앞서 말한 전략의 큰 흐름 자체가 바뀌고 있는 것은 아닌 만큼 공격적 발언이나 북한을 자극할 발언은 자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조짐들은 좀 있다. 크리스토퍼 힐 주한 미대사는 어제 서울대 강연에서 한미정상회딤이 성공적일 것으로 전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대외적인 수사나 표현이 부드럽다고 세상 달라지는 것은 없다. 대외적인 수사나 표현이 좀 껄끄럽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내가 궁금한 것은 정말로 없는 살림에서나마 미국을 억제시킬 수 있는 진짜 얘기들, 결코 언론발표문에서는 나올 수 없는 그런 논의들이 한미 정상회담에서 거론될 수 있을지 하는 점이다.



그것은 ‘협력적 자주국방’이란 이름으로 어제 발표된 우리 국방부의 지침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군사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한번 더 글을 쓸 예정이므로 상세하게 얘기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든지 하는, 국민들에게는 덜 민감하지만, 실제 한미관계에서는 지극히 민감한 얘기들이 오갈 수 있을까 궁금하다. 이종석 NSC 사무차장 등 노 대통령의 대미 참모들은 그런 문제인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내가 앞서 표현했듯이 ‘없는 집안살림’에도 불구하고, 2008년 파괴의 시간을 향해 달려가는 미국 국무부의 시계를 과연 멈추게 할 수 있을 것인가. 20일의 한미정상회담으로 이 모든 것이 해결될 리는 없다. 하지만 다른 누구보다도 노 대통령이야말로 이런 문제의식을 하고 있다고 나는 판단한다. 부시 2기의 날카로운 매의 부리들과 과연 어떤 게임을 벌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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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콘, 한반도 전쟁 꿈도 꾸지 마라"

[심층분석]盧대통령 '자주외교' 선언의 막후 배경과 파장
등록일자 : 2004년 11 월 15 일 (월) 17 : 20

외유중인 노무현대통령의 잇따른 '자주외교' 발언에 대해 국내외가 비상한 관심을 보이며, 발언의 배경과 파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정부, "우리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노대통령의 미국발언은 외교 당국자들도 예상치 못한 '메가톤급'이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15일 "이 정도로 강한 톤의 발언이 나올지는 예상치 못했다"고 토로했다. 상당한 당혹감이 읽히는 반응이다. 다른 관계자는 "앞으로 긴박해질 것으로 예상되는 한반도 정세와 관련, 노대통령 특유의 승부사적 기질이 작동되기 시작한 게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다.

국내 정치권도 상당히 당혹해 하며 발언의 배경에 대해 각기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지지율 급락에 부심하던 노대통령이 이탈한 지지층을 재결집시키기 위한 승부수를 던진 게 아니냐"며 노대통령 발언을 '국내정치용'으로 해석하며 정확한 속내 파악을 위해 부산한 분위기다. 반면에 열린우리당은 "부시 대통령 재집권후 예상되는 네오콘(신보주의자)의 북핵 강공드라이브를 차단하기 위한 우리 정부의 분명한 입장표명"으로 해석하고 있다. "2005년은 '한반도 운명의 해'가 될 것"이라며 네오콘의 준동을 경계해온 민주노동당도 우리당과 같은 맥락의 분석을 하고 있다.

이처럼 노대통령의 '자주외교 천명'은 앞으로 외교-국방-정치 등 국내외에 거대한 후폭풍을 예고하고 있다. 따라서 우선적으로 노대통령 발언이 나오기까지의 전후 과정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북핵협상 국면의 전환, 라이스의 급부상

노대통령의 이번 발언은 우선적으로 미국을 향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지층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부시정부의 요구를 수용, 이라크 파병 등을 강행했던 노대통령은 부시대통령 재선직후라는 민감한 현시점에 왜 이처럼 강도높은 자주외교 선언을 했을까.

이유는 부시 재선을 계기로 향후 부시의 '대북정책'이 강경 일변도로 치달을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에서로 보인다. 그 징후는 여러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우선 부시 재선 성공으로 북핵협상의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부시 미정부는 북핵문제가 불거진 지난해와 올해, 대북정책에서 '강경'을 기조로 하면서도 6자회담이란 유화책을 동시에 사용했다. 이유는 "시간이 없어서"였다. 미대선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이라크전쟁조차 매듭짓지 못한 마당에 북한에 대해 동시에 강경책을 쓸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협상학의 기본원칙중 하나가 "시간에 쫓기는 쪽이 진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재선 여부가 불확실한 부시는 불리했고, 북한은 미대선에서 부시가 패하기를 기대하며 최대한 협상을 질질 끌고 갔다. 그러다가 부시 재선으로 상황이 180도 바뀌어, '4년 임기'를 보장받은 부시가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됐고 부시의 강경한 대북정책은 기정사실화되는 분위기다.

그런 대표적 징후중 하나가 부시대통령의 안보보좌관인 콘돌리자 라이스의 국방-국무장관 기용 움직임이다. 라이스는 네오콘의 한명 정도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국내 누구보다 공화당 본류의 움직임에 밝은 한 의원이 전하는 상황은 그 정도가 아니다.

"라이스는 부시 대통령부자를 모두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던 '킹 메이커'인 조지 슐츠 전국무장관의 핵심측근이다. 라이스는 원래 소련-동구권 전문가로 슐츠가 국무장관이 되면서 발탁해 쓴 인물이다. 슐츠가 1982년부터 1989년까지 레이건-부시정권 시절 국무장관을 지내며 소련붕괴를 주도하는 데 주도적 싱크탱크 역할을 한 보좌관이 다름아닌 라이스였다. 라이스는 대북정책과 관련, '소련도 붕괴시켰는데 북한쯤이야...'라고 생각할만한 인물이다.

라이스가 부시대통령의 안보보좌관이 된 것도 슐츠 작품이다. 슐츠는 부시가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기 직전인 1998년 부시 아버지인 부시 전대통령의 SOS를 받는다. '제발 내 아들을 대통령으로 만들어달라'는 간곡한 부탁이었다. 이에 슐츠는 '부시 대통령만들기' 본부장을 맡으면서 외교에 문외한인 아들 부시 옆에 당시 스탠포드대학 부총장으로 있던 라이스를 붙였다. '외교는 라이스 말대로 따라하라'는 게 슐츠 주문이었고, 실제로 그후 부시는 라이스의 말에 충실히 따랐다.

재선에 성공한 부시는 라이스를 국무장관 또는 국방장관에 기용하려 하고 있다. 이는 대북정책에 있어 '김정일체제 붕괴'를 본격화하려는 시그널로 해석가능하다. 라이스는 한국군의 이라크파병후 감사의 뜻으로 방한한 자리에서 외형상 파병에 더없는 사의를 표명하면서도, 당시 여권 일각에서 추진중이던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강한 반대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라이스가 대북정책을 주무하는 국무장관 또는 국방장관이 된다는 것은 노대통령을 긴장케 하기에 충분한 시그널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참고로 슐츠는 몇달 전 미국을 방문한 모인사에게 작금의 한-미 관계와 관련, "미국은 50년전이나 지금이나 바뀐 게 없다. 바뀐 쪽은 한국이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한-미 관계가 정상화되길 원한다면 한국쪽이 바뀌어야 한다는 냉담한 메시지에 다름아니다. 이는 노무현정부를 바라보는 미국 공화당 본류의 시각이 어떤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에버스타트 발언의 의미

이같은 미국 공화당 본류의 생각을 읽는다면, 부시 재선직후 공화당 싱크탱크인 미국기업연구소(AEI)의 선임연구원인 에버스타트가 최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청와대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누가 부시 낙선을 원했는가 우리는 알고 있다"고 한 '내정간섭적 발언'의 의미는 보다 분명해진다.

AEI는 '비둘기파'인 콜린 파월 국무장관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네오콘이 국무부에 심어놓은 매파인 존 볼턴 국무차관이 몸을 담았던 곳이었고, 에버스타트는 볼턴과 함께 <북한의 종말>이라는 김정일체제 붕괴 시나리오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따라서 에버스타트의 발언은 단순한 일개 연구원의 발언이 아니라, 노대통령과 이종석 NSC사무차장을 직겨냥한 네오콘의 융단폭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에버스 타트는 이에 앞서 지난 8월 <북한의 악몽>이라는 논문을 통해 노대통령에 대해 미국과 북한에 대해 동시에 유화정책을 펴는 '이중적 유화정책론자'라는 강한 불신감을 피력하며, 노대통령이 김대중 전대통령으로부터 승계한 '햇볕정책'을 실현가능성 없는 정책으로 폄훼한 뒤 "남한의 상당한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김정일체제를 붕괴시키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었다. 그는 또 "앞으로 6자회담은 열리더라도 단 한차례만 열릴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6자회담은 들러리에 불과할뿐, 네오콘의 노림수는 대북 강경제재임을 드러낸 것이다.

에버스타트 발언을 접한 청와대는 대외적으로 "일개 연구원의 허튼 소리"라고 일축했으나, 실제 내부반응은 간단치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네오콘의 대준동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청와대는 이에 앞서 부시 재선직후 한나라당 김덕룡 대표가 여러 차례 이종석 NSC사무차장을 겨냥해 '경질'을 압박하고, 국내보수언론들도 같은 맥락의 공세를 편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하는 분위기다.

이어 부시 재선후 전격적으로 성사된 이종석 NSC사무차장의 방미가 '별무소득'이었던 점과, 오는 20일 예정된 부시대통령의 각국정상과의 회담 일정 스케쥴이 고이즈미 일본총리, 하워드 호주총리, 후진타오 중국국가주석 순으로 부시진영의 '호불호' 잣대에 따라 짜여지고 있는 대목 등도 노대통령의 자주외교 선언의 한 배경이 됐을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따라서 노 대통령의 이번 자주외교 선언은 부시대선후 노골화되는 네오콘의 준동 움직임에 대한 쐐기 성격이 강하다는 게 지배적 관측이다.

김대중-정세현, "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같은 상황판단은 김대중 정부관계자들과 공통된 것이기도 하다.

김대중 전대통령은 미 대선 전날인 지난 2일 광주를 방문한 자리에서 "이번 대선에서 누가 되느냐에 따라 북미관계나 남북관계에 많은 영향이 있겠지만 미국과 동맹은 긴밀히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전제하면서도 "남북관계는 우리가 주인인 만큼 우리가 중심이 돼야 한다. 이 점에서는 미국에 대해 할말은 하고 요구할 것은 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전대통령은 이어 부시 재선직후인 지난 10일 이태리 로마 로마시청에서 열리는 '노벨평화상 수상자 세계정상회의'(World Summit of the Nobel Peace Laureates) 개막식 기조연설에서는 "유감스럽게도 그동안 미국은 일방주의적인 태도를 지녀왔고 세계를 협력의 통합체로 이끄는 데 실패하고 있다"며 부시 정부의 일방주의를 공개리에 비판했다.

김 전대통령은 이어 "지금 우리는 핵무기, 테러, 빈부격차 등 많은 난제를 안고 있고 이는 어느 한 나라의 힘에 의해서 해결될 수 없으며 전세계의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며 "미국이 자기의 역사적 사명을 깊이 성찰하고 세계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다자주의적 협력체제의 선두에 설 것을 바란다"고 주문했다.

부시 정부의 북핵 강경화 움직임에 대한 분명한 쐐기였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 실무책임자였던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도 12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포럼에서 “우리 국민 중에는 미국에 대해 ‘NO’라고 말하면 안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며 “미국과 한국의 동북아 평화개념은 다를 수 있으며 대미 패배주의적 관점을 극복하고 설득하면 된다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현재 북한은 개혁개방의 부작용을 해소하기 위한 ‘정리, 정돈의 시기’를 맞고 있고 이것이 마무리되면 다시 나오게 될 것”이라고 분석하고 “북한과는 상호의존성을 더 높여야 하며 남북대화에 힘써야 한다”고 일관된 햇볕정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한국에선 절대로 전쟁 못한다"는 국제메시지

정부기관의 한 관계자는 노대통령 발언 배경과 관련, "사전에 전혀 감지하지 못했던 내용이라 어떤 해석을 하기란 조심스러우나, 미대선후 네오콘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분석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라크 파병결정후 국제사회에서 노무현정부를 부시의 종속물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며 "노대통령의 이번 발언은 '이라크 파병은 한반도 안전을 위해 부득이 결정한 것일뿐 한반도에서의 전쟁 발발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막겠다'는 메시지를 국제사회에 던진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노대통령 발언을 북한에 대한 메시지로도 해석했다. 그는 "북한은 그동안 노대통령의 대북정책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던져왔고 그 결과 남북대화가 교착상태에 빠졌었다"며 "따라서 노대통령의 이번 발언은 '나의 대북정책은 이렇게 분명하니 나를 믿고 즉각 대화에 나서 함께 문제를 풀자'는 메시지로도 해석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노대통령이 자주외교 발언이후 '한반도 주변4강은 누구도 분쟁을 원치 않는다'고 한 말은 부시대통령에게 네오콘에게 끌려가지 말라는 메시지이기도 하다"며 "과연 부시대통령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앞으로 20일 예정된 한미정상회담 등의 과정에 예의주시할 대목"이라고 덧붙였다.

이처럼 노대통령의 이번 자주외교 선언이 갖는 의미는 간단치 않으며, 향후 한반도 및 국내정세에 거대한 후폭풍을 몰고올 전망이다.

노대통령의 이번 발언에 대해 한나라당은 이미 '노대통령 비판-발언 철회'를 당론으로 확정할 정도로 국내 보수세력은 강력반발하는 분위기다. 반면에 이라크 파병 등의 과정에 등을 돌렸던 상당수 지지층에게선 복귀 조짐이 감지되는 등 국내 정치판도에도 적잖은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하지만 단 하나 분명한 것은 노대통령의 이번 발언으로 "한반도에서 절대로 전쟁은 안된다"는 분명한 정부입장이 국내외적으로 천명됐다는 사실이며, 이는 앞으로 북핵협상 과정에 한국이 더이상 무력한 제3자가 아닌 '힘 있는 중개자'로 적극 관여할 것임을 전세계에 분명히 했다는 것이다. 한반도에 일대 격동이 시작된 것이다.


박태견/기자

Posted by 중년하플링 :
알리]를 보고 드는 잡 생각들 (확대)
분류 : 신변잡기 기타 등록 : 박봉팔(Guest) 조회 : 2,218 점수 : 1,404 날짜 : 2004년 10월 06일 (13시 46분)

1.

작년에 개봉한 영화 [알리]를 어떤 이유로 다시 비디오로 눈 여겨 보게 되었다. [알리]는 걸작 [히트]로 유명한 마이클 만 감독의 작품이고 헐리우드의 악동 윌 스미스가 주연을 맡았다.

윌 스미스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으나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항의하는 의미로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은 배우 중 하나이다.

이 영화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좀 재미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감동을 조작하는데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매우 건조하게 찍었기 때문이다.

난 이 영화를 보고 왜 저렇게 재미없고 밋밋하게 찍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마이클 만 감독의 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내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알리의 생애 그 자체가 워낙 드라마틱하기 때문에 다른 효과를 노린 것 같았다.

사실 알리의 생애를 드라마에 집중해서 찍으면 그냥 감동이다.

근데 감독은 나름대로 그런 뻔한 길을 피하고 싶었나 보다.


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매력은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조지 포먼과의 재기전 장면이다.

너무나 리얼한 권투시합의 재현.

윌 스미스 대단하다.

실제 알리의 시합장면과 거의 흡사하다.


알리와 조지 포먼의 이 경기는 어떻게 보면 지루하다고까지 할 수 있다.

알리의 철저한 아웃복싱.

전성기의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는 그런 민첩함은 없다.

하지만 알리의 고단한 인생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런 시합이 알리의 인생과 맞물려 나에게 색다른 감동을 주었다.

실제로 마지막에 알리가 다운 뺐을 때 가슴이 찡 하더라.


조지 포먼의 복부공격을 끈질기게 버티다 포먼이 지친 틈을 타서 8 라운드에서 연타를 성공시키고 결국 다운을 뺏는 알리...

지지부진한, 어떻게 보면 겨우겨우 이긴 시합.

이 마지막 시합 장면은 바로 알리의 인생의 축소판인 것이다.


2.

이 영화를 좀 더 재미있게 보려면 권투도장에 다녀 보시라.

난 지금은 바빠서 못 다니지만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김광선이 운영하는 체육관에 다닌 적이 있다. 아마 다음 달 부터 또 다닐 것 같다.

지금도 나의 꿈은 40살이 되기 전에 신인왕전 데뷔를 하는 것이다.

재작년인가 MBC 신인왕전에서 마흔 살 먹은 신인왕전 출전 선수를 보고 감동받은 적이 있다.


나의 목표는 1승이 아니다. 그냥 신인왕전에 데뷔하는 것이다.

신인왕전에 출전하려면 프로테스트를 통과하고 자격증을 따야 하는데 이 자격증이 목표다.

김광선은 나에게 프로자격증을 따면 평생 프로권투는 공짜로 볼 수 있다고 했다.

난 12라운드를 다 뛰는 권투선수를 무조건 존경한다.

이런 마음으로 [알리]를 보면 몇 배 더 재미있다.


책에 취미를 붙이고 싶다면 서프라이즈를 눈팅하고 글을 올려보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음악감상에 취미를 붙이고 싶으면 동네 피아노학원에 등록하거나 기타학원에 등록하면 도움이 된다.

여자분들이 프로축구나 프로야구에 취미를 붙이려면 아무 팀이나 한 팀만 스토킹하면서 그 팀의 선수 이름을 외워보라. 잘 생긴 선수 있는 팀을 찍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정치쇼를 더 재미있게 관전하려면 한 달에 이 천원 내고 정당가입하면 도움이 된다.


3.

노벨상 후보에도 오른 바 있는 노먼 메일러라는 미국 작가가 있다.

이 작가는 이라크전에 대해“이라크전은 미국 백인남성들의 자존심을 돋궈줄 그 무엇이다”라는 특이한 견해를 피력한 적이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노먼 메일러는 부시를 가리켜 “ 난 ‘악’이란 단어를 10분간 18번 사용하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 노먼 메일러가 알리 전기를 쓰고“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천재는 채플린과 알리”란 말을 했다.

메일러 뿐 아니라 타임지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인물20인에 알리를 포함시켰고 CNN은 알리를 20세기 최고의 스포츠맨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나도 알리의 전성기 때의 경기는 직접 보지 못했고 일본 프로레슬러 이노끼와의 이종 격투기를 TV에서 직접 본 기억이 있을 뿐인데 더욱이 나보다 젊은 사람들은 알리의 스타성을 잘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왜 알리는 위대한가?


알리는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켄터키고향으로 금의환향하지만 어느 날 고향의 어느 레스트랑에서 흑인이란 이유로 입장거부를 당하고 심하게 삐진다.

알리는 식당에서 쫒겨난 뒤 금메달을 주저 없이 강물에 던져버리고 이때부터 반항적이고 비뚤어진 성격으로 고생을 사서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프로로 전향해서 1964년 헤비급 챔피언이 되고 말콤X와의 만남을 전후로 백인들이 준 이름이란 이유로 캐셔스 클래이란 본명을 버리고 이슬람으로 개종하며 알리란 이름을 얻는다.


1967년 알리는 "난 베트콩에게 적대감이 없다"란 말과 함께 참전을 거부하여 법원으로부터 5년간 출전금지 처분을 받는다.

이때부터 알리는 시합을 못하고 취직이 안되서 생계의 위협에까지 시달리고 반역자로 낙인찍혀 주변의 테러까지 걱정해야 하는 기나긴 고난의 길을 걷는다.

자신의 가장 전성기를 자신의 신념과 고집 때문에 희생한 것이다.


(인파이터 천재복서 타이슨이 자신의 방탕한 생활로 복서로서의 전성기를 허비한 것과 대비된다. 근데 난 타이슨도 좋아한다. 귀여워서.

타이슨은 시합 전 날 있는 인터뷰에서 “상대방이 죽을까봐 겁나요”라는 식으로 인터뷰한다. 아무 생각 없다.)


알리는 지난한 법정투쟁으로 3년 반 만에 법원으로부터 기어이 무죄판결을 받아내고 1971년 다시 복귀하지만 조 프레이저에게 지고 1974년 조 프레이저를 꺽은 신예 조지 포먼(당시 팔팔한 24세)을 아프리카 자이레에서 물리치고 챔피언에 오른다.

이때 그의 나이 32세였다. 바로 이 경기가 영화 [알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경기이다.

이후 알리는 레온 스핑크스에게 타이틀을 빼앗겼으나 곧 이은 리턴매치에서 다시 타이틀을 되찾아와 3차례 헤비급 챔피언 등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다.

15년이 넘는 세월동안 현역 챔피언으로 지낸 알리는 명실상부한 영원한 챔프다.


4.

스포츠 영웅은 무수히 많다.

하지만 진정 존경받는 스포츠 영웅은 드물다.


마이클 조던은 미국의 한 인권단체가 나이키의 하청업체인 동남아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한 행사를 후원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자신의 광고주인 나이키사의 심기를 거스를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흑인의 우상으로 떠오른 타이거 우즈는 자신은 "흑인이라기보다 어머니가 태국계이므로 동양인에 가깝다"란 발언을 하여 흑인운동가들에게 지탄을 받기도 했다.


소위 국민타자 이승엽은 선수협 파동 때 굳이 기자회견을 자청해 반대입장을 나타냈다.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는 견해도 있겠지만 선수협은 막 프로생활을 시작하는 대다수 고졸 프로지망생에겐 절실한 문제였다.

난 지금도 이승엽을 좋게 보지 않는다.


선동렬도 선수협지지 선언을 하기로 해놓고 마지막에 배신했다.

삼성의 양준혁은 이를 두고 아직 마음이 풀리지 않는다고 언젠가 [일요신문]의 인터뷰기사에서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다.


위 사람들은 한 분야에서 워낙 큰 획을 그은 사람들이라 스포츠 영웅이라 불릴 만하다.

하지만 이런 인물들에겐 알리에게 주어졌던 그런 영광은 결코 없을 것이다.

무식해서 그렇든 이기적이라서 그렇든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외면한 사람이 어떻게 오래도록 존경 받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신념을 가지기도 어렵지만 지키기는 더욱 어렵다.

불행히도 이 사회에서 신념을 지키려면 알리처럼 개고생을 해야만 한다.


5.

난 알리를 생각하면 지금 개고생을 사서 하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이 자꾸 떠오른다.

말도 안 되는 정몽준의 단일화 조건을 받아들인 것을 비롯해 노무현 대통령은 참모들로부터도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일을 한 적이 많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알리는 자신의 펀치에 다운 된 상대선수에게 “늙은 곰아 빨리 일어나” 따위의 모욕적인 말을 퍼부어대고 (물론 쇼맨쉽이다.) 시합 전 인터뷰 말미에 챔피언이 되라는 덕담을 하는 기자들에게 “난 당신 백인들을 위한 챔피언 벨트는 따지 않는다. 오직 나를 위한 챔피언 벨트를 딸 것이다”라는 삐딱한 멘트를 굳이 날리고야 만다.

시간나면 시합 중 계속 떠드는 알리의 경기모습을 한 번 구해 보시라.

시합 중의 수다 때문에 체력이 저하될까 걱정될 정도다.

지금 돌이켜보면 알리의 수다는 수다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미국사회에서 외로운 돗단배였던 알리는 달리 기 죽지 않고 싸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노무현 대통령의 팬이 된 이유도 일차적으로 거침없는 말에서 느껴지는 그의 솔직성에 끌렸기 때문이다.

물론 노무현 대통령에게 알리의 반항적인 쇼맨쉽은 없다.

모두 정치적 신념에 따른 정당한 발언들이다.

하지만 기질이나 성격은 비슷할 거라고 본다.


“대통령 하겠다고 아내를 버려야 합니까?” 라는 말을 이전의 그 어떤 정치인이 함부로 할 수 있었을까?


재신임표명을 위한 국회연설에서 굳이 송두율씨 문제를 언급하는 게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노무현 대통령은 굳이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말하고야 만다.

알리가 떠오른다.


난 노무현 대통령이 파병과 관련하여 미국과의 줄타기행보를 결심하고 “자신의 국내 정치 입지에 연연한 결정을 하지 않겠다”라고 하는 발언을 듣고 가슴이 아팠다. 그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고 우리나라의 처지가 슬펐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진솔한 행보에 대한 대가는 주위로부터의 엄청난 비난과 질시이다. 심지어 개혁세력이라고 분류되었던 이전의 아군들도 그저 비 현실적인 원칙을 내세우며 무책임하게 노무현 대통령을 씹어대고 있다.

하지만 적당한 진보인사로 남는 노무현 대통령보다 진흙탕에서 개고생 하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에 우리는 진정한 존경을 표시하고 열광한다.


나는 김근태, 천정배 같은 정치인들에겐 마음이 잘 열리지 않는다.

알리나 노무현 대통령처럼 진솔한 짓을 하지 않아 사람냄새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김근태나 천정배는 지금처럼 젊잖게 행동하고 적당히 대인관계 쌓는 것이 지도자가 되는 길이라 생각하겠지만 앞으로의 진정한 지도자는 진흙탕에서 뒹굴어야만 한다.

사람들은 이제 진심을 본다.

사람들이 보는 눈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알리는 '복싱'보다 위대하다." (알리 자신이 한 말이다.)

"노무현은 '정치'보다 위대하다." (박봉팔이 방금 지어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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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인, 너무나 도덕적인

도덕과 정치 사이에서 근본주의자들에게


1

『인물과 사상31』에 실린 김진석의 “‘우충좌돌’하자! 우파 근본주의와 좌파 근본주의 사이로”를 읽었다. 난 그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아마 현정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처럼 김진석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리고 현정권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당연히 자신들의 당파성을 왕성하게 드러내며 비판의 칼날을 세울 것이다.


당파성에 따라서 어떤 사태가 해석되고 가치평가가 행해지는 모습은 자연스럽다. 또한 상대방의 주장은 오로지 당파적 해석에 지나지 않으며 나의 주장은 단순한 당파적 해석이 아니라 ‘객관적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럽다. 하지만 자연스럽다고 해서 올바른 태도가 되는 건 아니다. 만약에 ‘진리’라는 게 있다면, 모르긴 몰라도 그건 자연스러운 태도에 반(反)하지 않으면 찾아내기 힘든 혹은 만들어내기 힘든 어떤 것일 것이다.


약 한 달쯤 전에 난 이라크파병에 대한 생각을 글로 정리하다가 그만 둔 적이 있다. 현정권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이라크 파병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글이었는데, 쓰다 보니 글이 점점 자체의 관성을 띠고 과격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글이 공격적으로 나가면 나갈수록 공허함도 비례해서 커지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든지 상대방에게 결정적인 일격으로 작용할 독한 말을 찾아 머리를 굴리는 치졸한 내 모습에서 난 잠시 기가 막혔다. 도대체 뭘 위한 당파성인가? 당파성의 경계는 어디까진가?


난 지금 당파성을 지워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건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저 너무 굳건하게 당파성을 세워 놓고 모든 걸 거기에 맞춰 환원하는 ‘지독히도 오래된 버릇’의 폐해를 지적하는 것이다. 즉 환원만 하지 말고 사유하도록 노력해보자는 것이다. (자신도 못하는 걸 남에게 요구하다니 나도 참 대단하다) 그래서 당파성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자는 것이다.


당파성을 ‘풍요롭게’ 만든다? (너무 자유주의적인 표현인가?) 얼마 전 서프에서 ‘지하당’과 관련된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하지만, 내 눈에는, ‘서프가 뭐하는 곳이냐, 자위하는 곳이냐 아님 논쟁을 통해 사유를 훈련하는 곳이냐’ 로 읽혔다. 내 생각엔 둘 다 맞다. 서프는 자위하는 곳이다. 그리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프는 일차적으로 중도개혁노선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모여서 노는 공간이다. 그리고 그것이 개혁의 성공을 위해 지지세력을 확장시켜야 하는 정치 공간의 역할을 저해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노는 방식이다. 예전, ‘왕따 현상’이 일반화되기 이전, 아이들의 세계엔 ‘깍뚜기 문화’가 있었다. (언젠가, ‘깍뚜기’에 대해서 써 논 글을 보고, ‘맞아, 그 땐 깍뚜기가 있었어’ 하고 무릎을 친 기억이 있는데, 어디서 봤는지는 기억에 없다) 다방구나 술래잡기를 할 때 예전 아이들은 약하고 어린 아이들을 배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에게 ‘깍뚜기’라는 특권을 부여해서 놀이에 참여시켰다. 그리고 그들이 참여했다고 해서 놀이의 규칙이 흔들리거나 와해되는 일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건, 매번 놀이의 규칙을 창조적으로 변용해서 적용해서 적용할 수 있을 정도로 아이들의 놀이 문화가 성숙했기 때문이다.


풍부함 혹은 성숙함. 이런 모습이 가능하기 위해선 비정상적인 것, 혹은 이질적인 것들을 기꺼이 끌어안는 자신감이 내부에 깔려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기득권층을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을 한 번 보라. 물질적 풍요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의식의 천박함. 내면의 빈곤함. 그리고 개인주의적 여유 대신 또아리를 틀고 있는 조급증의 발작 증세. 여기서 어떤 ‘문화’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이 발붙일 수 있겠는가? 여기서 어떤 ‘스스로를 긍정하는 힘’을 발견할 수 있는가?


자신감은 우리 사회에서 구조적으로 양산되고 있는 피해의식과의 대면을 통해서, 끊임없이 그것과 대결하는 과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방법상 ‘주체’를 세울 필요가 있다. 하지만 ‘주체’를 세우는 것만 가지고는 충분치 않다. ‘주체’를 세우는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그렇게 세운 ‘주체’는 계속해서 흔들려야 한다. 그런데 어떤 ‘주체’는 흔들리지 않는 걸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한다. 자신을 ‘주체’로 형성해 준 외부의 조건과 단절하고 높은 차단막을 친 채 고고한 동어반복만을 되뇌이는 ‘주체’. 이런 모습은 사실 ‘주체’라는 말이 무색한 피해의식의 도덕적 편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피해의식과 자신감의 경계가 뚜렷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구분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그건 그 사람 혹은 집단이 노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요컨대, 자신을 긍정하는 자신감에 찬 집단은 뭔가 ‘문화적인 것’을 창출하는 힘이 있다. 반면에, 도덕적인 너무나 도덕적인 집단은 그야말로 ‘원한’에 찬 뒷다마를 까기에 바쁘다.


난 서프가 지금까지 그랬듯이, 앞으로도 충분히 ‘문화적인 것’을 창출할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서프는, 정치적인 정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파성이라고 다 같은 당파성이 아니다. 서프의 당파성은, 명실상부한 민주공화국을 만들어내야 하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자신의 입장을 정립한 당파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민주공화국을 만들어내는 방법으로 중도개혁노선을 선택한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중도개혁노선을 걷는다는 의미는, 국가와 자본주의체제, 그리고 시민사회를 비롯한 여타 공동체의 관계가 ‘안정되게(혹은 ‘무기력하게’)’ 돌아가는 소위 ‘선진국’에서의 그것과는 다르다. 누구 말대로, 발전된 자본주의체제 하에서는, 국가의 역할을 둘러싸고 사회민주주의 좌파와 우파가 있을 따름이다. (우리들 ‘꼴통 어르신내’들이 보면 거긴 죄다 빨갱이 들이다) 거기에서의 중도노선이란 그야말로 분배 대신 성장을 중심에 놓고 정책을 펴겠다는 의미밖에는 없는 것이다. 허나 우리의 경우에는, 극우 국가주의 세력으로부터 정치적 헤게모니를 빼앗아 국가 자체의 폭력으로 인해 자라지 못한 시민사회와 공동체를 키운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중도개혁노선이란 ‘시민혁명’과 겹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은 ‘문화혁명’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 홍위병? 그래, 홍위병) 앞에서 지적했듯, 사회 각 분야를 ‘꼴통’들이 지배하는 일극체제 하에서의 ‘문화’란 문화라고 부르기엔 너무 처참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대학을 보라. 우리의 인문학을 보라. 그리고 우리의 도서관을 좀 보라.


그런데, “왜 하필 중도개혁노선이냐. 좀 더 ‘래디컬’한 노선이면 더 빠르고 내실있게 ‘시민혁명’의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 아니냐”고 묻는 분들이 있다. 그런데 보통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사회의 청사진을 지극히 흐릿하다. 물론 그건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만 그런 것은 아니다.


김진석의 말을 빌면, “아직 한국사회는 정치경제적으로 어느 정도의 성장과 폭력을 감내해야 하는지 또 감내할 수 있는지, 사회적 정치경제적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또 어느 정도의 국제적 실력을 갖추고 있고 또 갖춰야 합당한지 사회적 정치경제적으로 합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진석을 곧바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이 질퍽한 혼돈 상태에서는 아무리 개혁적인 정당이더라도 제대로 개혁을 하기 힘들 것이다.”


사실 이런 식의 논의를 ‘유신체제’를 기준으로 삼고 국가 정체성을 들먹이는 ‘꼴통’들과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이런 논의는 최소한의 공공성, 최소한의 합리성을 갖춘 ‘좌파 진보세력’과 ‘개혁세력’이 서로 상대가 되서 얘기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우리 사회의 자칭 ‘좌파 진보세력’은 너무 관념적이다. 근본주의적이란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사안을 너무 도덕적으로 접근한다. 그러면서 당파성을 드러내는 데 어찌 그리 ‘철저한가.’


그야말로 우리사회의 ‘좌파 진보세력’의 변증법은 거꾸로 서있다. 밖으로는 정치적이고 안으로 도덕적이어야 하는데, 거꾸로다. 밖으로는 도덕적이고 안으로는 선명성 투쟁을 벌인다. 예컨대, 미 제국주의에 대해, 신자유주의에 대해, 전지구적 자본주의체제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는가? “그건 옳지 않다. 난 반대한다.” 끝, 아니 “그러니 너도 반대해라.”


한국의 ‘좌파 진보세력’이 정말 2012년 집권을 목표로 한다면, 내부에서 득세하는 근본주의적 경향을 걷어내야 한다. 사회주의가 아니라 사민주의를 철저히 해야 흐릿하나마 비전을 그려 보여줄 수 있다. 그렇지 않고 계속해서 근본주의적 경향을 가진 세력들이 상대적으로 온건한 세력을 향해 기회주의니, 수정주의니 하는 도덕적 비난이 행해지고 또 그것이 먹히는 분위기가 바뀌지 않으면, ‘수구 꼴통’들에게 미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래가 없다. 그게 그저 ‘좌파 진보세력’의 불행으로만 끝난다면 이런 말을 하지도 않는다. ‘좌파 진보세력’의 불행은 우리 사회 전체의 불행이기 때문이다. 연속되는 불행 속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소모전, 이젠 방향을 좀 바꿔봐야 하지 않겠는가.


2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김구 선생의 말씀 한 대목이다. 높은 문화적 힘을 가진 나라. 아마 당파를 떠나서 대부분 수긍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소위 ‘사회주의적 이상’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을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경제라는 둔탁한 압력’으로 벗어나 자신의 ‘창조적 충동’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사회〉라고 규정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문화적 힘을 가진 나라가 되기 위해선, “우리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한 부력과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한 강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물론 가난하고 힘 없어도 행복할 수 있지만, 국가 차원에서는 그렇게 될 수 없다. 최소한 수준 높은 문화를 구가할 수는 없다. 그리고 아직 우리 사회는 그럴만한 부력과 강력을 갖추지 못했다.


“그래서? 매번 지배세력들은 그랬지. 아직 분배할 때가 아니라고. 지금은, 그리고 앞으로도 쭉 파이를 키우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고. 현정권도 똑같은 소리를 하지. 몇 십 년 동안 들어 온 똑같은 레퍼토리. 지겹다. 지겨워”


맞다. 지겨운 소리다. 승질 같아서는 확! (그렇다고 ‘홧김에 서방질’을 해서야 되겠는가. 애정에 기초하지 않은 바람질은 볼 성 사납다. 쿨한 거 아니냐고? 그래, 그래 맘대로 생각해라)


분명한 것은, 현정권이 나름대로 사회적 약자를 위해 애를 쓰고 상대적으로 ‘분배’에 신경을 쓴다고 하더라도 뚜렷한 한계를 가지며, 강조점을 역시 ‘성장’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점을 현정권의 보수성 혹은 반동성의 논거로 삼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김진석이 말한 대로 “현 체제가 세계자본주의 체제라면, 더 강한 집단들이 게임의 규칙을 바꾸지 않는 한 주변부 국가들에게 선택의 폭은 좁아”질 수밖에 없으며, “주변 강대국이 많건 적건 모두 팽창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한, 한국사회도 좋건 싫건 일정하게 강자들 사이에서 게임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정권이 ‘성장’에 방점을 찍을 수밖에 없는 것은, 보수성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책임을 다하려는 모습으로 읽어야 한다. 아전인수식 해석의 정수라고? 불륜, 로맨스 논리의 진수라고?


한 번 김진석의 말을 인용하고 진행해 보자. “우리는 ‘세계체제’라는 말의 폭력성을 알 만큼 안다. 좌파근본주의에 가까운 사람들은 그 체제의 폭력성과 비정함을 강조한다. 나도 안다. 그러나 그 말이 무슨 말인가? 그 세계가 그렇게 폭력적이고 비정하다는 말은 거꾸로 거기서 빠져나오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닌가” 도대체 “그 불굴의 폭력성을 끝없이 과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완전히 거기에서 벗어나자는 어처구니없이 공허한 주장을 펼쳐서”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앞서 나는 중도개혁노선이 ‘시민혁명’과 겹쳐진다고 하면서 그 노선의 ‘진보성’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지금은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주변부에 끼인 ‘생존조건’을 부각시키며 ‘성장’에 중점을 둘 수밖에 없다고 강변하고 있다. 이건 모순인가? 좋다. 모순이라고 하자. 그럼 그 모순은 어디서부터 나오는가? 중도개혁세력이 개혁세력이 아니면서 개혁세력이라고 자신들을 오해하는 혹은 거짓말하는 지점에서 나오는가? 아니면 전 지구적 자본주의체제라는 ‘엄중한 상황’ 하에서 어떻게든 더 나은 입지를 구축해보려고 탐색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것인가?


내가 보기엔, 세계자본주의체제라는 조건 자체가 ‘반동적’이다. 물론 자본주의체제가 성립된 이래 그건 조건이 변한 적은 없었다. 아마 자본주의체제가 지속되는 한 세계적 차원에서의 남북문제는 해결이 요원할 것이고, 그것이 가진 근본적인 제국주의적 성격이 약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조건 하에서의 ‘진보성’은 오직 민족국가 내부에서만 담보될 수 있다. 만국의 노동자들이 단결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노동자들이 다 처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소위 ‘선진국’에 사는 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높은 생활수준을 누린다면, 그건 ‘계급투쟁’에 따른 결과보다는 제국주의적 착취의 결과다. 그 착취의 결과를 ‘계급투쟁’으로 나눈 것이다.


즉 어차피 민족국가 단위로 쪼개져 피터지게 경쟁해야 하는 세계자본주의체제에서는, 실질적인 생활의 향상, 혹은 발전을 위해선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도덕성이란 잣대를 괄호에 묶어 놓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조건이 이렇다면, 우리는 선택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다. 도덕성의 훼손을 감수하면서 실질적인 생활의 향상을 위해 나아가든지, 아니면 도덕성을 고수하고 우리끼리 ‘주체적으로’ 살던지. 하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선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지만, 사회적인 차원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선택을 먼저 해놓고 그 다음에 조그만한 여지를 디벼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얼마나 옹색하고 처량한가. (그래, 몇몇 도덕성의 화신들이여, 그렇게 발버둥치는 현정부의 모습이 그렇게 창피한가? 그래, 상황은 어려워도 다 잘 될 거라고 뻥 좀 쳤다. 호기도 부리고 객기도 부리고 하소연도 좀 했다. 그게 그렇게 꼴보기 싫은가?)


물론 그렇다고 현정부가 애쓰고 있으니 잠자코 지켜봐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현정부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내에서 가능성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진보’라는 것을 머리 속에서 체계화된 특정 이념에서 ‘해방시켜’ 노동자, 서민이 실제 생활을 하는 시장 바닥으로 내려놓는다면 그 가능성은 생각보다 넓어질 것이다.


현정권을 비판하는 말 중에, ‘선한 의지가 나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건 내가 보기엔 정확히 좌파근본주의자들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한국의 좌파들이여, 너무 선한 의지로만 무장하지 말아라. 도덕적으로 굳건한 ‘주체’는 자신에겐 약이 될지 모르지만 사회적으로는 독으로 변할 수도 있다. 〈내가 부정하는 ‘주체’란 그 주체 형성에 매개되어 있는 근원에 대해 묻는 일 없이 주체의 직접적 현전성 안에서 자족하는 주체일 뿐이다.〉 좌파의 기본 학문은 정치경제학이 아니던가.


3


중요한 것은 세계를 해석하는 게 아니라 바꾸는 거라고 했다. 이 말이 세계를 엉터리로 해석해도 된다고 한 말은 아닐 것이다. 난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희한한 결합’ 중에 기독교와 좌파의 잘 버무려진 조합을 목도할 때마다 고개가 기울어지곤 한다. 물론 이걸 ‘희한한 결합’이라고 조소하는 게 개운치는 않다. 진보 좌파가 ‘제 이름을 제 이름으로 부르지 못하는’ 시절에 대한 ‘기억의 카타콤’ 때문이다. (말을 너무 비튼 것 같다. 그러나 그냥 둔다. 왜냐하면 ‘친애하는’ 서프 새내개 여러분에게 이성복의 초기시집들을 추천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민주화에 많은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이 쬐금 변했다. 더 이상 우리사회의 좌파들이 비전이 아니라 믿음으로 자신의 신념을 유지해도 좋은 시절이 아니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싸가지 없게’ 지적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사회는 정부가, 기존의 국가주의체제에서 휘둘렀던 과도한 권력을 놓아야하고, 동시에 국가주의체제에 의해 소외되었던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권력을 발휘해야 하는, 일견 모순된 상황에 놓여 있다. 간단하게 말해, ‘통치’에서 ‘정치’로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화를 아주 단순하게, 국가에 모두 집중되어 있던 권력을 시민사회가 빼앗아오는 과정이라고 정의한다면, 시민사회에 권력이 있어야 비로소 ‘통치’가 아니라 ‘정치’라는 ‘합리적 배분’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오랫동안 국가주의체제가 지속되다보니, 시민사회를 구성해야하는 주요 집단들이 ‘꼴통화’ 되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그 체제에 의해 극심한 탄압을 받던 민주화집단은 ‘종교화’ 되었다. 한 쪽은 지독한 탐욕으로 '합리적 과정'을 거부하고 다른 한 쪽은 세속적이라는 이유로 (근본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그걸 무시한다. 즉 ‘정치’는 실종되고 (원래 없었으니까 실종이 아니지), 아니 ‘정치’는 창출되지 못하고 아전인수이전투구만 벌어지게 되어있는 상황인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세계자본주의체제에 끼어들어서 게임을 벌어야하는 조건인 만큼 현정부가 가지는 개혁의 한계는 분명 존재한다. 현정부는 이러한 한계 내에서 ‘진보적인’ 정책을 별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정부의 ‘개혁성’을 원천적으로 부정하진 말자. 비록 한계 내에서지만 개혁의 효과는 무시하지 못 할 것이다. 그러니 잠자코 두고 보자고? 아니다. 개혁의 효과가 확대될 수 있도록 방법을 좀 수정해보자는 것이다.


정부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만큼 정부에 대고 요구하는 목소리에 과부하를 거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문제는 과부하에서 오는 에너지의 소모다. 온통 대정부 정치투쟁이다. 그것보다는 ‘꼴통들’과 직접 대면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제도개혁은 그것대로 당연히 이루어져야겠지만 (열린우리당이 미적미적 댄다고? 내가 알기론 미적대는 열린우리당을 우리 ‘노빠’가 무조건 옹호하지는 않는다. ‘노빠’들은 생각만큼 노빠들이 아니다) 문화를 바꿔가는 투쟁도 병행해야 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김진석의 글에 나오는 우리나라의 ‘엽기적인’ 교회의 행태를 한 번 보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상한 일은 한국 교회가 표면적으로는 정교분리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면서도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선동을 일삼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정교분리 이데올로기는 사회로부터 비판이나 감시를 받지 않은 채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고 이익을 확장하는 데 기여한다.”


이런 현상은 교회가 대표하는 종교계 뿐만 아니라 무슨 무슨 ‘~계’라고 이름 붙여진 여타 집단들에게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대동소이하다. 교회는 자신의 존재이유와 그 행태 사이의 괴리가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얼굴에 깔린 철판 두께만큼이나 벌어져 있어 유독 돋보인다는 특징이 있을 뿐이다. (언론계? 찌라시 얘기는 오늘 안 한다) 한국의 대형 교회들, 이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제도적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답이 잘 안 나온다.


마르크스가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고 했을 때, 그 포인트는 어리석은 민중을 비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에 빨질 수밖에 없는 고통스런 현실 조건을 바꿔야 한다는 데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의 좌파 기독교인들이여, 그러니 열악한 현실 조건을 바꾸는 데 매진하면 교회 문제는 저절로 해소될 거라고 말 할 것인가? 나는 지금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모욕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모욕은 스스로가 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교회가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그저 단지 교회가 사회적으로 너무 많은 해악을 끼쳐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하는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의 대형교회가 높은 성전 짓고 전투적 해외 선교사업하는 돈의 백분의 일이라도 자신들의 형제자매를 위해서 쓴다면 어떨까, 하는 공상을 해본다.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신도들끼리라도, 우리 사회에서 붕괴되어 버린 ‘공동체’의 역할을 한다면 우리 사회가 훨씬 넉넉해 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아마 국가가 교회에 세금을 물리지 않는 것은 이런 ‘공동체’의 성격을 인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공동체의 물질적 교환 방식은 기본적으로 역사 이전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증여와 보답의 형식이다. 예전의 부족장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증여받은 물량의 몇 곱절을 되돌려주곤 했다. 이런 교환 형식은 국가가 세금이라는 이름으로 강제로 걷어서 재분배하는 방식이나,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화폐에 의한 표면적인 등가 교환과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바로 공동체를 구성하는 구성원들 간의 강한 유대와 결속이다.


그런데 우리사회의 교회는 안에서의 유대는 신경 안 쓰고 밖에 있는 국가와 시장과 너무 밀착된 유착관계를 유지하고 성장해서 그런지, 자신이 국가인지, 기업인지 헷갈려 한다. 현금인지, 세금인지 돈을 걷어서는 물질적 보답은 고사하고 재분배도 제대도 하지 않는다. 아마 교회건물을 사회간접자본으로 보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지역주민들이 문화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자리라도 내주던지. 그렇다고 서비스를 제대로 하는가? 그건 서비스를 받는 사람마다 다르게 말하겠지만, 내가 보기엔 ‘파리의 연인’을 보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정말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는 대형 교회 나빠요!”


교회가 공동체의 역할을 포기했다면 당연히 세금을 내야 한다. 그래야 눈꼽 만큼이라도 그 혜택이 사회적 약자에게 되돌려 질 것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세금을 내지 않으면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역할을 충실하게 할 수 있도록 바뀌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누가 바꿀까? 외부에서 손대기도 어렵고, 내부개혁도 어려워 보인다. 아까는 좌파 기독교인을 거론하며 그들이 내부에서 어떻게 싸움을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문화적 방법 운운했는데. 좀 오버한 것 같다. 따지고 보면 그들도 교회와는 직접적으로 관계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무엇보다도 교회의 힘이 너무 세다. 숨이 턱 막힌다. 어쩔 수 없이, 전반적인 사회 개혁을 통해서 우회적으로, 천천히 간헐적으로 압력을 행사하는 방법 외에 특별한 게 없을 것 같다.


애초에, 내가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진보좌파’를 포함해서 우리들이 좀 더 ‘세속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밥그릇을 더욱 챙겨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밥그릇 배분을 좀 더 ‘합리적인 방식’으로 논의해야 한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도덕과 정치의 괴리를 좀 좁혀보자는 말이다.


그 사이가 너무 넓으면 뭔 말인지 모를 주장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신자유주의를 거부하고 (도덕적 주장)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정치적 주장) 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건 사회주의혁명이 성공해도 마찬가지다) 이런 식으로 하면 오히려 노동자들이 손해다. 왜냐하면 사회적으로 ‘합리적인’ 대화의 장이 마련되지 않으면 아쉬울 게 없는 ‘꼴통들’만 좋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각 집단이 근본주의적 성향을 띠는 한 ‘문화’를 창출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문화의 일차적인 적은 교조화된 도덕이다. 주변에서, 경계에서 값어치 있는 문화가 나온다. 아까 잠시 피해의식 얘기도 했지만, 난 솔직히 진보좌파를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이 깨어있다는 착각 속에 편협한 의식을 적잖게 드러내는 것이, 단지 ‘거칠고 투박한 사고’가 정치적으로 요구되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본다. 비록 그들만은 아니겠지만, 전반적인 ‘인문학의 빈곤’이 시야를 가로막고 피해의식을 안으로 뭉치게 해서 배타성만 키운 결과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치고 피해의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일렬종대로 세워진 나라에서. 하지만 상황이 열악하더라도 ‘고귀한 생각’을 품은 사람이라면, 더구나 정치적인 변혁을 열망하는 사람이라면, 인문학 실력을 키워야 한다.


물론 “어느 누구든 불가능한 일을 해야 할 의무는 없다.” 하지만 높은 경지에서 사물을 바라보고자하는 노력이 성공하는 게 꼭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이건 정치혁명가에게도 꼭 필요한 것이다. 이 말을 누가 했을 것 같은가? 폴란드 출신의 ‘불세출의’ 여자 혁명가가 했다는 말이다.


끝으로 내가 자꾸 좌파진보세력에게 자꾸 딴지를 거는 것은 애정이 있기 때문이다. (몇몇 분들은 예외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지만.


ⓒ jamin20

Posted by 중년하플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