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의 노심초사

2005-03-03 13:50 하재근 컬럼니스트

전에 청와대에서 근무하는 분을 우연히 만나 잠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내가 인터넷을 통해 글을 쓰는 처지인지라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종종 나에게 어떤 어떤 이슈를 다뤄달라, 이런 건 좀 문제 삼을 만 하지 않느냐는 주문을 하곤 한다.

그 때 만난 분도 역시 그랬는데, 그 분은 나를 붙잡고 하소연을 했다. 노대통령이 매우 비분강개해하며 속을 끓이고 있는 문제가 있는데 왜 이런 게 시민사회에서 공론화가 안 되느냐는 거다.

그 문제가 뭐였는고 하니 바로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기도였다. 그 당시 국내 정치에 여러 가지 정략적 문제거리들이 있었지만 우연히 만난 청와대에서 근무하는 그 분이 나를 붙잡고 하소연한 것은 ‘일본문제’였다.

그 후 노대통령은 순방외교를 위해 출국했고 세계를 한 바퀴 돌았다. 한나라당은 노대통령의 유례없는 적극적 순방외교에 “대통령이 없으니 나라가 조용해서 좋다”는 둥, “우리나라 신경 안 쓰고 너무 밖으로만 도는 것 아니냐”는 둥 비아냥댔지만 항상 그렇듯이 초점을 놓쳤다. 국내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의 순방외교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역사적 의의가 있는지 큰 맥락에서의 진실을 밝히는 언론은 없었다.

국내에도 여러 가지 문제들이 산적해 있는데 왜 외국에를 그렇게 열심히 다녔을까. 각각의 나라들과 경제협력을 증진시키려는 목적은 당연한 것이고, 대통령이 세계를 돌아다닌 목적을 큰 틀에서 보자면 그건 ‘세계 체제 다원화의 포석’으로 귀결된다.

노대통령은 아르헨티나에서 UN 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국 확대를 통해 안전보장이사회의 민주성, 대표성, 효율성을 증진시키는 UN개혁에 보조를 맞추기로 키르츠네르 대통령과 합의했다. 또 브라질에서는 “EU 성공 국제정치적으로 대단히 중요하다“며 ”이 같은 성공이 다른 지역에서도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룰라 브라질 대통령과 "균형된 다극체제, 국제법에 따른 세계질서 유지"의 입장을 공유하고 "우리나라도 2007-2008년 유엔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출마 계획을 갖고 있는 데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고이즈미도 역시 중남미를 돌며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을 위한 우군확보에 열을 올린 바 있다. 외교전쟁이다. 태평한 건 한나라당 뿐인가. 또 법사위에서 뭉갰다지?

현실사회주의권이 망한 후 세계는 일극체제로 재편됐고 우리나라는 미국한테 ‘꼼짝마라’ 신세가 됐다. 이 상태에서는 미국의 종속국 신세를 벗을 길도, 신자유주의의 거센 공세에 저항할 길도 요원하다. 우리의 살 길은 오직 하나, 세계체제가 다원화하는 것이다. 노대통령의 말마따나 EU의 성공은 그래서 우리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것이고, UN은 민주성과 대표성의 원리에 따라 개혁돼야 한다.

유엔의 민주성과 대표성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2차대전 전승국과 백인선진국에 편중돼 있는 유엔의 주도권을 다른 집단의 대표가 나누어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유럽의 패전국인 독일, 그리고 중남미, 남아시아, 동아시아 등의 권역대표가 함께 주도권을 갖는 것이 곧 유엔의 민주화고 대표성 제고다. 이것은 세계 일극체제의 다극화를 상징한다.

다극화는 미국의 일방체제를 깨는 첩경이다. 그런데 문제는 동아시아에서 걸린다. 누가 동아시아 대표가 될 건데?(이미 나라 그 자체가 일종의 대륙인 중국은 빼고)

일본의 전략은 이거다. 일본은 동아시아 문제를 국제문제로 가져가려 한다. (북핵, 독도...) 그러는 한편 국제적 주도권을 장악한다. 동아시아 쟁점이 일본의 국제적 주도권에 의해 일본에 유리하게 판결이 나면 그 국제적 정당성 뒤에 숨어 일본은 동아시아에 자기들 이익을 관철시키고 동아시아를 주도한다는 거다.

일본이 이런 전략을 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동아시아 내부에서는 일본의 발언권이 씨알도 안 먹히기 때문이다. 백인들은 일본을 자기들과 같은 급의 문명국이자 동양의 대표선수로 대우해준다. 반면 동아시아 홈그라운드에서 일본은 ‘악랄한 쪽발이’놈들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일본은 자꾸 밖으로 나갔다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려 한다. 백인들을 등에 없고.

노대통령은 여기에 정면으로 브레이크를 건 거다. 그것이 바로 ‘민주성’과 ‘대표성’이다. “어떻게 일본 니들이 우릴 대표한다는 건데?” 이 거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동아시아 권역을 누군가 유엔에 나가 대표한다면, 그리고 전승선진국 위주의 일방체제에서 후발주자들까지 포괄하는 민주적 다원성을 구현한다면, 그건 바로 식민지경험을 한 우리가 돼야 하지 않겠어?”라는 거다.

그것이 노대통령이 룰라에게 "우리나라도 2007-2008년 유엔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출마 계획을 갖고 있는 데 도와달라"고 당부한 이유다. 일본은 지금 미국을 등에 업고 있다. 큰형님을 등에 업고 하향식으로 내려오는 마름에게는 민주가 쥐약이다. “너한테 어떤 민주적 정당성이 있는데?”라는 거다.

대통령이 3.1절에 일본의 과거 범죄 사실을 친 건 일본이라는 나라한테는 동아시아를 대표할 자격이 없으며, 우리가 그것을 묵과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대외적으로 천명한 사건이다. “니네 주제를 알렴. 일본에겐 자격이 없어.” 이것은 일본을 향한, 그리고 세계를 향한, 그리고 일본을 감싸고도는 미국을 향한 일성이다.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 기도에 대해 북한은 대놓고 “웃기지 마라”고 말했지만 우리 정부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당시 신문기사 타이틀은 이렇다.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우리정부) 우회적 반대’. 북한에 비해 우리는 잃을 것이 많기 때문이다. 일단 미국의 심기를 살펴야 하는 것은 우리를 항상 새가슴으로 만든다.


그때 그때 눈에 띄는 나쁜 무리들에게 “예끼 이놈들아 물렀거라”라고 호통친다고 세상이 바뀔 것인가. 대통령의 노심초사는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고 추측한다. 독도로 난리굿을 떨면서 국제문제엔 신경끄고 사는 수구집단들은 속시원해서 좋겠으나 독도문제가 시끄러워지면 질수록 독도이슈를 국제분쟁이슈로 만들려는 일본극우파의 장단에 놀아날 뿐이다.

문제의 핵심은 과연 우리가 세계체제의 다극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가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그 다극화된 세계에서 동아시아의 대표 링크가 될 수 있는가다. 여기에 통일이 걸렸고 나라의 백년대계가 걸렸다.

평소엔 잘 안쓰는 말이지만 요즘 같아선 ‘왜놈’, ‘쪽발이’ 소리가 절로 난다. 왜들 그렇게 사니. 니들이 잘하면 중화패권주의에 맞서 한국-일본 동맹 구도도 생각해보련만, 쯧쯧쯧...
Posted by 중년하플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