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1.2, Liaquat Ahamed

 

최근의 양적완화와 이에 따른 자산거품을 생각하면 궁금해진다. 역사에서 배울 수는 없을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그 유명한 1929년의 월스트리트 대폭락, 일명 '검은 목요일'. 엄청난 거품에 뒤이은 주식시장 폭락이 장기간의 대공황으로 이어진 사건이다. 이 시대를 잘 살펴보면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대공황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 전에 발생했던 1차대전을 빼놓을 수 없다. 간략하게 개조식으로 정리해 보자.

  • 1차 대전 이전까지는 영국 주도의 Pax Britannica로 인해 장기간의 풍요를 누렸던 시기

  • 당시 영국은 월등한 산업생산성에 바탕을 둔 유휴 자본을 활용하여 국제적인 금융의 중심지가 됨

  • 그러나, 1차 대전은 장기간의 소모전으로 서구 열강의 유휴 자본을 모두 소진(미국 제외)

  • 종전 이후 독일은 거액의 배상금으로,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에 진 전쟁부채 형태로 국제적인 채무관계가 형성됨

 

대공황을 만들어낸 근본 원인은 바로 저 채무관계로 인한 국제적인 유동성의 축소였다.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든 것은, 당시 국제 금융 질서의 기반은 금본위제였다는 것. 즉, 금의 공급이 갑자기 늘어나지 않는 이상, 유동성을 증가시키는 것이 불가능한 구조. 더군다나 이런 문제점은 19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던, 미국의 부상과 영국의 생산성 저하로 인해 더욱 심화되었다.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국제 금융의 중심은 영국의 파운드화였고, 파운드화의 가치는 영국이 가진 금에 기반을 두었다. 전쟁 이후 생산성 격차에 의해 대부분의 유휴자본이 미국으로 흘러들어갔지만, 영국의 중앙은행은 금본위제를 포기할 수 없었고 이로인해 영국수출품의 경쟁력 하락을 감내할 수 밖에 없었다. 파운드화의 가치를 재조정하지 않고 국내의 유동성을 늘일 수 있는 방법은 해외로부터의 투자가 유일했다. 이를 위해서 미국이 자국의 이자율을 인위적으로 낮춰야 했고, 결국 주식시장의 거품이 발생했던 것.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금본위제를 고수했던 당시 중앙은행장들은 어리석은 노인네 처럼 과거에 집착한 셈이다. 화폐와 금의 관계를 끊고, 화폐 발행량을 늘려 유동성을 공급했으면 쉽게 공황을 극복할 수 있었을텐데...라는 생각이 들수도 있다. 당시 중앙은행장들의 공포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려면, 중세시대를 겪으면서 자주 발생했던, 화폐가치의 인위적인 조작으로 인해 빈번했던 인플레이션의 역사를 고려해야 한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중앙은행의 최우선 과제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화폐가치 하락의 방지이다. 이런 측면에서 작년에 미국중앙은행에서 어느 정도의 인플레이션은 용인할 수 있다는 '제롬 파월'의 발언은 역사적인 맥락에서 볼때 엄청나게 이례적인 말이며, 우리가 겪고 있는 팬데믹이 얼마나 유래없는 상황인지를 알려준다.  

 

전후 배상금을 둘러싼 국제금융인들의 협상과정과 독일이 겪었던 하이퍼인플레이션에 대한 설명을 읽으면서, 독일인들이 나찌를 선택한 이유가 납득이 갔다. 다음은 이 책의 주요한 인물이기도 한 독일의 중앙은행장 Schacht 가 한 발언이다. 

 

“ Don’t forget what desperate straits the Allies drove us into . They hemmed us in from all sides — they fairly strangled us ! Just try to imagine what a cultured people like the Germans has to go through to fall for a demagogue like Hitler . . . . All we wanted was some possibility for export , for trade , to live somehow . . ."

 

왜 독일인들이 히틀러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추대하고 따랐는지를 물을 것이 아니라, 당시 독일인들의 상황이 나찌든 누구든 경제적인 안정을 가져다주는 정치세력을 선택할 정도로 필사적이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2차 대전 당시 독일인들의 집단적인 정서 보다는, 현대인의 소비생활을 분석하는데 유용한 툴로 보인다. 장기간의 경제적 어려움과 이를 초래한 서구열강들에 대한 분노를 느끼고 있던 독일인들에게 국가사회주의가 보여준 비전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었을지 쉽게 이해가 간다. 

 

1차 대전 이후 세대가 유동성 부족으로 대공황을 겪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경기침체는 다른 원인을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유동성은 이미 차고 넘치므로... 가장 그럴듯 한 설명은 'Secular Stagnation'이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사람들이 소비하지 못할 만큼 풍족하게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이것은 최소한 발전한 선진국에 대해서는 황당한 이야기가 아니다. 'Bullshit Job'의 근본원인도 이미 공급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미디어와 SNS를 통해서 사람들의 소비를 유도하지만, 이미 사람들은 남는 시간을 모두 바쳐도 충분히 소비하지 못할 만큼 많은 '물건'을 가지고 있다. 최소한 일부 국가의 일부 계층에서는 그렇다. 그리고 그 일부국가의 일부계층이 가장 구매력이 높은 집단이다.

 

월러스틴이 이야기한 장기 자본이득 저하현상과 피케티가 이야기한 자본소득이 노동소득 대비 높은 상승률을 보이는 현상은 모두 같은 이야기한다. 즉, 세계 경제가 소비능력을 넘어서는 공급 능력을 확보했다는 것. 이제 경제의 문제는 공급능력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소비능력을 늘리는데 있다. 우리 세대는 그야말로 새로운 세계를 향해가고 있다. 노예 없이도 전체 사회의 물질적인 필요를 충족할 수 있게 된, 그러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직장이 없어 빈곤한 삶을 살아가는 기이한 SF와 같은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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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중년하플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