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25.10 존 업다이크
'달려라 토끼'의 후속작. 4부작인데 나머지 3부작이 한꺼번에 번역된 것을 알고 서둘러 동네 도서관에 주문한 책. 존 업다이크는 하루키가 스스로 영향을 받은 작가라고 말하는데, 내가 지금까지 읽은 어떤 소설보다도 하루키 소설의 원천에 가깝다는 느낌. 읽다가 너무나 하루키스러워서 놀란적이 여러 번.
전작에서의 방황을 거쳐 가정과 사회에 녹아들어간 헤리가 겪는 중년의 위기. 융 이론에 따르면 인생의 전반기는 사회화를 통해 삶을 받아들이는 시기이다. 사회가 원하는 틀에 맞춰 나를 만들어가고, 이를 통해 생존을 보장받는다. 전작에서의 래빗은 이런 사회화 과정을 보여준다. 농구를 통해 삶을 가볍게 만드는 밝은 빛을 만났지만, 인생은 그와 같은 순수한 지복에 머물도록 놔두지 않는다. 아래 구절은 무엇에도 흥미를 보이지 않는 아들을 보며 내뱉는 래빗의 독백이다.
- 뭐든지, 그저 나중에 한동안 버티고 살 수 있게 해주는 것, 어떤 희열을 느낄 수 있는 것이면 되는데. 지금부터 텅 비어 있으면 절대 오래갈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비어가니까.
이제 중년이 된 래빗은 지나치게 단조롭고 평평한 인간이 되어 버렸다. 내면의 빛을 잃어버린 래빗을 남겨두고 아내는 직장 동료와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가버리고, 아이와는 점점 이해하기 힘든 타인이 되어간다. 겉보기에는 안정된 삶을 영위하는 미국의 중산층 가정이지만 그 안에는 빛이 없었다.
- 녹색 나무로 만든 집. 내세에 대한 믿음도 없고 기대도 없다. 똑같은 일이 너무나 자주 되풀이되고 있다. 이미 두 번 산 느낌이다. 제니스에게로 돌아왔을 때부터 두 번째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가엾은 아이는 이제 첫 번째를 살고 있다. 그 멍청이에게 축복이 있기를. 그래도 제니스에게는 밖으로 나가고자 하는 충동이 있었다.
정치적인 관점은 단순하게 주변 사람들에 따라 보수적이 되었다. 왜 베트남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지, 흑인들이 다른 도시에서 혼란을 일으키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는 이해하지 못한다. 갑자기 그의 삶에 난입한 약물중독 히피 소녀인 '질'은 그에게 삶을 다시 돌아볼 것을 요구한다.
- 아저씨의 생각은 얼어붙어 있어요. 본능에 실망하자마자 아저씨는 모든 게 허무하다는, 영이 유일한 답이라는 결론으로 달려가버리기 때문이에요. 그게 우리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거예요. 이기느냐 지느냐, 전부냐 전무냐, 죽이느냐 죽느냐. 생각을 받아들일 여유를 만들어낸 적이 없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이제, 보시다시피, 우리는 그런 여유를 만들어내야만 해요. 이제 행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니까요. 생각이 없는 행동은 폭력이니까요.
하지만 세상을 채 살지 않은 질의 이상주의적인 외침은 공허하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숙제를 마무리하지 못했다. 사회화 과정에서 좌절해버린 아이는 내면에서 시들어버렸다.
- 이제 겨우 열여덟인데. 너는 모든 걸 해봤고 아무것도 무섭지 않은데 왜 그렇게 모든 게 다 죽어버렸는지 궁금하지? 모든 걸 남이 갖다주었기 때문에 그래, 귀여운 아가. 그래서 모든 게 그렇게 죽어버린 거야. 씨발, 넌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데, 왜 사람들은 열심히 뛰어나니고 있는지 좆도 모르겠지? 두려움 때문이야. 그래서 우리 같은 불쌍한 새끼들은 열심히 뛰어다니는 거야. 너는 두려움이 뭔지 모르지, 그렇지, 불쌍한 아가? 그래서 네가 그렇게 죽어버린 거야.
이 소설에서는 60~70년대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 정신적인 빈곤을 겪던 미국 중산층의 삶과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려고 했던 히피와 흑인 인권 운동이 교차한다. 어느 쪽도 이념만으로 선하거나 악하지는 않다. 그때 히피 운동을 미국 사회가 포용했다고 해서 지상 천국이 펼쳐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가 오늘날의 삶에 근본적인 변화를 줄 수 있는 마지막 시점이 아니었을까? '풍요한 사회'에서 주장한 것처럼 생산의 문제를 해결한 문명은 그 다음 과제를 찾아야 했지만, 이후 심화된 물질주의와 소비주의로 향해간 미국은 이제는 가치의 부재로 흔들리고 있다.
- 얼마나 부질없는가. 그 모든 게 얼마나 부질없는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사람들이 힘들게 우리를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사랑해 주고 우리는 가슴이 부풀어 오르고 생리를 하고 남자애들한테 미치고 마침내 한두 아이가 나서서 우리의 몸을 건드리고 우리는 결혼하고 싶어 안달하고 아이를 몇 낳고는 더 낳기를 중단하고 이번에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남자에 미쳐 마침내 너무 깊이 빠져들고 나이가 들수록 몸은 점점 심각해지고 그러다 결국 그런 단계도 틀림없이 끝날 것이고 한동안은 꽃모자를 쓰고 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투손에 가거나 뉴햄프셔에 가서 단풍을 구경하고 손자들을 보러 가고 그러다 가엾은 앵스트롬 부인처럼 침대에 누워 있게 되겠지.
그래서 결론은 무엇일까? 소설은 결론을 내놓지 않는다. 래빗은 우여곡절을 겪고 다시 자신의 아내와 합친다. 그렇지만, 이 결말이 둘 사이 사랑의 복구나 가정의 회복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 난리를 치고서도 어쩔 수 없이 생물학적으로 묶인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되돌아오는, 상처투성이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담담한 묘사?
중년의 방황을 겪는 해리 엥스트롬의 이야기는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에 울림을 준다. 우리나라도 60년대 미국처럼 기독교를 정신적인 동력으로 삼아 고도 성장기를 지나왔고, 이제는 어느 정도 성장을 이루었지만, 모든 공동체는 해제되었고, 개인들은 끝없는 경쟁에 내몰린 채로 삶을 살아간다.
우리의 오늘날이 미국의 60년대와 유사하다면, 우리는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우리에게는 심지어 히피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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