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g'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25.01.02 '상실의 시대' - 아니마와의 로맨스
  2. 2021.06.13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3. 2021.05.14 융 심리학 입문
  4. 2019.11.13 Man and His Symbols

 


 - 2025.1.2 무라카미 하루키/유유정 옮김

어떤 이야기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그것이 원형(archetype)적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다. 확실히 어떤 이야기가 왜 원형적인가하는 설명을 듣다 보면 무척이나 그럴듯하게 느껴지는데, 사실은 훌륭한 이야기를 사후적으로 짜맞춘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늘 마음 한구석에 가졌더랬다.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는 지금까지 세번쯤 읽었던듯 싶다. 처음 읽었던 것은 대학교 1학년때의 일로 기억하는데, 읽을 때마다 어쨌든 재미는 있었고,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해도 뭔가가 더 있다는 생각을 했던것 같다. 이제 오십이 되어서 읽은 이 소설은 최근 알게 된 융심리학에 비추어 봤을때 원형적인 구조가 너무나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는 이야기였다.  

융은 아니마(anima)와 투사(projection)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모든 남자의 무의식에는 인류가 집단적으로 만들어낸 이상적인 여성의 원형이 존재한다. 이를 아니마라고 부르는데, 아니마는 한 남자의 내적 성장에서 무척이나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남자의 무의식과 의식을 연결하는 다리와 같은 것으로, 의식에 존재하는 남성적인  자아(ego)를 깊고, 광활한 무의식의 세계와 연결하여 삶의 의미를 만들어낸다. 남자들의 의식 세계는 어디까지나 남성적인 원리에 기반하여 돌아간다. 일상적인 삶에서 생존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남성성의 원리를 바탕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 세계에서는 부드럽다던지 친절하다던지 동정심을 가진다는 것은 있으면 좋은 부차적인 역할에 그친다. 하지만, 한 남자가 일상 세계에서 성장하고 자리를 잡기 위해 남성성에만 의존해서 살아가게 되면 세상은 의미를 상실한 잿빛이 되어간다. 세상에서 자리잡기 위해 추구한 그것으로 인해 의미가 살아져버린 세상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때 다시 한번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마이다. 아니마는 지나친 남성성 추구로 인해 잃어버린, 살아가야 하는 의미를 다시 한번 삶으로 되돌릴 수 있는 무의식이 선물이다. 

하지만, 아니마는 무의식에 영역에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인식할 수가 없다. 의식화를 위해 아니마가 사용하는 전략은 투사이다. 즉, 실제세계에 존재하는 다른 이성에게 무의식의 아니마가 겹쳐지면서 그 여자는 세상에는 존재할 수 없는 여신의 역할을 하게된다. 이때 그 남자는 특정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 내면의 아니마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이것이 로맨스의 경험으로 나타난다. 이 로맨스는 지상의 세계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원형적인 여성과의 사랑이다. 결국은 로맨스에서 깨어나 현실의 여자와 마주하거나, 다른 여자에게 투사를 옮겨여 또 다른 로맨스에 빠지는 형태로 일이 진행된다. 내적 성장을 위해서는 아니마에 의한 투사는 내적 성찰을 위해 활용하고, 현실의 여자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분리가 필요하다. 현실의 여자와의 사랑은 로맨스처럼 광휘에 휩쌓여있지도 않고 천상적이지도 드라마틱하지 않다. 그것은 찬밥에 물을 말아 김치를 먹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일들로 이루어진다. 애정의 대상을 여신으로 만들지 않고, 그/그녀의 인간적인 단점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관계이다. 내면의 아니마는 그대로 여성적인 원리로 존중하며, 자신의 무의식과 대화를 계속 해나가면서 여성적인 원리들을 자신의 자아에 통합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큰 틀에서 상실의 시대는 성장 소설이다. 주인공 와타나베는 나오코와 미도리 사이에서 갈등한다. 만일 와타나베가 나오코의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고, 성장하지 못했다면, 그는 죽음의 세계에 홀리게 되었을 것이다. 대신 그는 삶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성장하는 편을 선택했다. 나오코는 아니마이고 미도리는 현실의 여자이다. 아니마는 원형이기 때문에 삶의 세계가 아닌 죽음의 세계(무의식)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와타나베는 나오코와는 섹스를 할 수가 없다. 

와타나베는 나가사와 선배와 함께 하면서 많은 여자와 잠을 잘 수 있지만, 그 무의미함에 권태를 느낀다. 남성적인 자아는 더 많은 여자와의 섹스가 더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이때 중요한 것은 얼마나 효율적으로 원하는 바를 얻을 것인가이다. 나가사와는 이 같은 남성적인 원리에 극단으로 치우친 인간이다. 그는 나름 친절하고, 남에게 상처를 입히고 싶어하지는 않지만, 옆에서 보기에 비뚤어진 인간이다. 그는 누구와도 진정으로 연결될 수 없다. 내면적인 여성성의 원리에서 너무나 멀어져버린 극단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비록 멋진 여자친구가 있지만, 의미를 찾지 못하면서도 계속해서 많은 여자들과의 섹스를 '해치워나간다'. 외부의 사물/사람은 그 자체로 내재적인 가치를 갖고 있지 않다. 우리가 내부에서 가치를 부여했을때만 외부의 사물과 인간은 가치를 갖게 된다. 나가사와는 함께 잠을 자는 여자들과 내면적으로 연결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그녀들과의 섹스에 아무런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그가 여자들과 잠을 자는 이유는 단순하게도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황량한 세상은 오로지 남성적인 원리로만 이루어진 세상이다. 와타나베는 나가사와 보다는 '성숙'하다. 하지만, 그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아니마 투사. 즉, 나오코를 극복해야 한다. 이는 나오코의 죽음과 상실감으로 방황하는 와타나베를 통해 표현된다. 이때 도움이 된 것은 의외로 나가사와가 해준 이야기이다. '자기 자신을 동정하지 말것'. 그리도 나오코와의 또 다른 연결고리인 레이코 여사와의 섹스를 통해서 일상적인 인간 여자와의 친숙함을 되찾는다. 레이코 여사는 어떤면에서 성숙한 아니마이다. 나오코가 자신의 아픔을 극복했으면 될 수도 있었을, 성숙하고 사려깊은 여성성을 표현한다. 이는 나오코가 죽으면서 그녀의 옷을 레이코 여사에게 전달하는 것을 통해 상징된다. 즉, 레이코는 또다른 나오코인 것이다. 그녀와의 관계를 통해 와타나베는 미숙한 아니마 투사를 멈출 수 있게 되었고, 미도리에게 돌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이런 면에서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표면적인 인상과는 다르게 희망적이다. 우리는 아무리 성장하더라도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단지, 조금 더 나아지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할 뿐이다. 그 노력이 결국 성장의 핵심이다. 계속 상처를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것. 상처 받을 것을 받아들이면서 좌절하지 않는 것. 

 'Sing like no one is listening, love like you've never been hurt, dance like no one is watching, and live like it is heaven on earth'.   - Mark Tw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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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융 기억 꿈 사상

2021. 6. 13. 16:19 from Lectura

  • 2021.5.29, 칼 구스타프 융 지음/

 

칼융 본격 읽기 두번째 책. 먼저 읽은 '융 심리학 입문'의 말미에서 추천하길래 선택하였다. 형식은 자서전에 가깝지만, 서문에서 스스로 이야기하고 있듯이 외부적인 사건이 아닌 내면적인 사건을 주로 이야기한다. 그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설명해주지는 않지만, 인간 융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책. 

 

과거에 태어났으면 샤먼이나 무당이 되었을 수도 있을만큼, 융은 심령현상이나 초자연적인 현상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보기 시작한 환상과 우연의 일치들을 보면, 그가 정립한 ‘무의식’이라는 개념과 그 하위 개념들은 그런 초자연적인 경향을 이론화 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 나는 '무의식' 이라는 용어를 선호하는 편이다. 물론 신화적으로 표현하고자 할 때 '신'이니 '데몬'이니 하는 말을 똑같이 잘 쓰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신화적으로 표현할 경우에도 '마나' '데몬' 그리고 '신'이 무의식이라는 말과 동의어라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그런 용어들을 사용한다. 

 

그에게 있어서 무의식이란 인류가 오랜 세월 반복적으로 접했던 '신'의 다른 이름이다. 그가 이야기한 무의식은 단지 의식되지 않은 경험의 저수지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동물이던 시절부터 축적한 거대한 정보의 보물창고에 가깝다. 사람은 무의식이라는 원천으로부터 현재 삶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지혜를 건져올릴때 더욱 풍성하게 살아갈 수 있다. 

 

  • 무의식이 의식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은 기정 사실이지만, 그것은 특별한 종류의 앎으로 영원속의 앎, 대개 '지금 여기'와 관계가 없고 우리의 지적 언어도 고려하지 않는 앎이다. 오직 우리가 무의식으로 하여금 스스로 확충하여 진술할 수 있는 기회를 줄 때에만, 앞에서 수를 예로 들어 제시했듯이, 그것이 우리 이해의 범위 안에 들어오게 되고 새로운 측면이 우리에게 지각된다. 
  • 사람들이 이미 있던 무의식 내용을 의식에 통합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은, 아마도 말로 표현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단지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논의할 필요가 없는 주관적인 사건이다. 나는 나 자신을 어떤 일정한 양식과 방식으로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나에게 하나의 사실이며, 그 사실을 의심한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합당하지도 않다. 

 

이 같은 무의식과의 통합은 결국 현재를 살아가는 나에게 의미를 던져준다. 

 

  • 우리의 내적인 평안과 만족은, 개체를 통하여 인격화된 역사적 가족이 우리 현재의 덧없는 상황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거의 대부분 좌우된다. 
  • 인류에게 결정적인 물음은 "당신이 무한한 것에 관련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시금석이다. 무한한 것이 본질적이라는 사실을 내가 알 때에야 비로소 나는 결정적인 의미가 없는 하찮은 일에 관심을 쏟지 않을 것이다. 
  • 나는 사람들이 인생문제들에 대해 불충분하거나 잘못된 해답으로 얼버무릴 때 신경증이 되는 경우를 자주 보아왔다. 사람달은 지위, 결혼, 명성, 외적인 성공, 재물을 추구한다. 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것들을 소유하게 되었을 때조차 사람들은 여전히 불행하고 신경증을 앓는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너무나 좁은 정신적인 한계에 갇혀 지낸다. 그들의 삶에는 흡족한 내용과 의미가 없다. 그들이 좀더 폭넓은 인격으로 발달할 수 있다면 신경증은 보통 사라진다. 

 

하지만, 이성만을 중시하는 현대 문명은 사람들이 무의식과의 통합을 원활하게 이루는데 도움이 되기 보다는 방해물이 되고 있다. 

 

  • 발전에 대한 맹신은 그것이 우리의 의식을 과거로부터 멀리 떼어놓을수록 더욱더 유치한 미래의 꿈에 매달릴 위험에 처하게 된다. 
  • 비판적 이성이 우세할수록 인생은 그만큼 빈약해진다. 그러나 무의식과 신화를 의식화할수록 우리의 인생은 그만큼 통합을 이루게 된다. 과대평가된 이성은, 그것이 지배하면 개인이 궁핍해진다는 면에서 독재국가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 이성은 우리로 하여금 매우 좁은 한계에 매여 있도록 하며, 오직 이미 알고 잇는 범위 안에서 이미 알고 있는 삶(이것 역시 조건부이긴 하지만)을 살도록 요구한다. 마치 사람들이 삶의 진정한 범위를 알고 있기나 한 것처럼 말이다!
  • 합리주의와 교조주의는 우리가 앓고 있는 시대병이다. 그것들은 모든 것을 아는 체한다. 

 

어떤 측면에서는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에서 제시한 문제점을 훨씬 먼저 깊게 연구한 결과물이다. 조던 피터슨 교수가 얼마나 많은 부분을 융에게서 빌려왔는지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다. 인류와 오랫동안 함께했던 검증되지 않은 '비합리적'인 신이 사라진 이후, 인간은 어떻게 삶에서 의미를 찾아야 하는가? 융의 답변은 과거에 우리가 신이라고 하는 것은 무의식이고, 이 무의식 안에는 우리가 인생의 가치를 만들어냈던 많은 유산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라는 것이다. 이를 의식의 표면으로 끌어올려서 통합하는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 삶에서 마주치는 실존적인 문제들에 대한 해답이라는 주장이다. 

 

돈, 명예, 소유물과 같은 외부적인 조건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되면 어디를 둘러보아야 하는가? 바로 나 자신의 내면으로 관심을 돌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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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 심리학 입문

2021. 5. 14. 20:04 from Lectura

 

  • 2021.5, 캘빈 S. 홀 지음 / 김형섭 옮김

 

내가 찾은 융 심리학 입문서 중 가장 간결하게 융의 이론을 설명해준 책. 

 

  • 인간은 이미 하나의 전체로 태어난다. 일생을 통해 해야 할 일은 이 전체성을 최고로 분화시키고 발전시키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풍요로운 학습과 교육의 기회가 필요하다. 
  • 인격 체계는 의식화되어야만 개성화 될 수 있다. 아마도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의식적인 것을 의식화하는 데 있을 것이며, 또 교육은 마땅히 그래야 한다. 
  • 정신은 '의식', '개인 무의식', '집단 무의식' 이라는 세 가지 수준으로 구분될 수 있다. 
  • 정신은 네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사고', '감정', '감각', '직관'이다. 
  • 자아는 인격의 동일성과 지속성을 규정하며, 유입된 경험을 의식할 수 있도록 조절한다.
  • 자아와 그림자가 서로 사이 좋게 조화를 이루면 인간은 삶의 충만함과 활기를 느낀다. 자아는 본능에서 비롯되는 모든 힘을 방해하지 않고 통과시킨다. 의식은 확대되고 정신 활동이 생기발랄해진다.
  • 자기는 인격을 통일하고 거기에 '하나 됨'과 ' 불변성의 감각을 준다. 누군가가 자신 및 세계와 조화되어 있음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자기의 원형들이 그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 음식물이 신체에 의해 소비되어 생물학적 에너지 또는 생명 에너지로 바뀔 수 있는것과 마찬가지로, 경험은 정신에 의해 '소비되어' 정신 에너지로 바뀐다. 
  • 인생의 여러 단계

 

융을 읽으려는 사람들을 위한 가이드

  • 추억, 꿈, 사상
  • 무의식에로의 접근(Approaching the Unconsc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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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 and His Symbols

2019. 11. 13. 13:09 from Lectura
  • 2019.11, Carl G. Jung
 
프로이드의 제자였다가 이론적으로 달라져 스승과 결별한 융, 집단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낸 학자, 이름을 많이 들어온 융이라는 학자의 이론이 궁금해  읽기 시작한 책. 무의식이라는 개념이 프로이드를 통해 널리 알려진 오늘 날에는 오히려 융부터 읽기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은 책을 읽고 내 나름대로 이해한 융의 이론. 
 
융에 따르면 우리가 상징(Symbol)이라고 부르는 것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활용을 넘어서는 함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이름이나 그림이다. 이것은 기호(Sign)와는 다른데, 기호의 경우 항상 그것이 지칭하는 것보다 작은 것을 내포하는데 반해, 상징의 경우 표면적으로 나타내는 것을 넘어선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상징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이 현실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해하거나 개념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말하거나 글을 쓸때, 가능하면 명료하게 사용하기 위해 노력한다. 가끔은 이런 노력이 피로한 경우가 있다. 떠오르는 자유로운 생각을 표현하기에 내 언어 구사 능력이 뒤쳐지기 때문인데, 상징을 좀더 활용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식이 합리적이라면 무의식은 상징적이다. 인간의 합리적인 면이 주로 나타나는 의식과 대별되는 무의식은 본질적으로 상징적이다. 때문에 꿈에서 나타나는 상징들이 그 처럼 논리적이지 않은 것이다. 심리적인 안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의식과 무의식이 조화롭게 작용해야 하는데, 이 둘 사이에 부조화가 발생하거나 서로 반목할때 심리적인 동요가 발생한다. 때로 이런 동요는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의 변화, 기억의 손실, 말실수와 같은 형태로 표면에 떠오른다. 의식적으로는 원하고 있는데, 무의식은 거부 한다거나 반대의 경우 무의식은 꿈 속에서의 상징을 통해 의식에 메세지를 전달한다. 이런 메세지를 이해 혹은 해석하는 행위는 의식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고 이 책에서 융은 주장한다. 
 
이런 주장의 근거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우리가 본능이라고 부르는 것은 감각에 의해 인지되는 생리적인 욕구이지만, 인간이 의식을 발전시키면서 무의식의 영역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배고픔과 배변과 같은 생리적인 수준의 본능도 있지만, 보다 상위의 본능이라 부를 수 있는 경향성은 모든 인간 사이에서 공유되고 계승된다. 위계에 대한 인식이나 성인이 되면서 부모로부터 독립을 하는 단계를 거치는 것등을 그와 같은 상위 본능의 예로 들 수 있다. 내가 임의적으로 지칭한 상위 본능은 상징적 이미지의 형태로 꿈이나 환상을 통해 나타나는데, 이렇게 발현된 상징을 융은 원형(archetype)이라고 부른다. 어떤 상징들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다수의 사람에 의해 공유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상징들은 차츰 종교의 상징체계 안으로 편입된다. 
 
종교와 신화는 과거로부터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역할을 했다. 내 존재를 정당화할 수 있는 의미가 부여될때 인간은 동물을 넘어서서 인간이 된다. 종교와 신화는 삶의 많은 면을 포괄하지만, 특히나 원형과 집단 무의식의 체계화라는 측면에서 중요성을 가진다. 이런 측면의 종교 혹은 신화는 어찌보면 과거를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삶의 단계에서 만났던 문제들의 모범 답안지라고 볼 수 있다. 이 부분은 조던 B 페터슨 교수와 조셉 캠벨이 무척이나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꿈은 개인적인 차원의 신화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듯 싶다. 신화를 통해서 인류 공통의 문제와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면, 꿈은 원형을 통해 개인의 무의식이 의식에 건네는 조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대인들은 종교를 미신으로 치부하고 합리성을 추구하지만 이로 인해 삶을 지탱해주는 의미를 잃어 버리게 되었다. 하지만 예전의 신들은 다른 이름으로 인간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의지에 의해 불가능한 것이 가능해지는 세상을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라는 말은 또 하나의 미신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삶은 해결 불가능한 난제를 제시한다. 본질적으로 해결불가능한 문제를 안고 있는 삶에서 ‘도피’하기 위해 현대인들은 약물, 알코올, 담배, 음식, 그리고 결국은 신경증에 의존하게 된다. 이것은 겸손, 인내, 절약과 같이 과거에 미덕으로 여겨졌던 덕목들을 잊어버린 현대인들이 치러야 하는 대가이다. 
 
종교와 신화를 거부하면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현대인에게 꿈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융이 직접 쓴 글은 책의 1/5정도이고 나머지는 그의 제자로 보이는 다른 저자들이 쓴 글이다. 
  • Part 1 Approaching the Unconscious: Carl G. Jung
  • Part 2 Ancient Myths and Modern Man: Joseph L. Henderson
  • Part 3 The Process of Individuation: M.-L. von Franz
  • Part 4 Symbolism in the Visual Arts: Aniela Jaffé
  • Part 5 Symbols in an Individual Analysis: Jolande Jacobi
  • Conclusion: Science and the Unconscious: M.-L. von Franz
 
의식하지는 않았는데, 다 읽고 보니 융의 글에서 밑줄 친 문장이 가장 많았다. 영웅신화와 입문의식(Initiation)에 대해서 쓴 두번째 글도 재미있었고, 개인화(Individuation)에 대한 세번째 글도 흥미로웠다. 네번째 파트는 주로 현대 미술과 무의식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는데, 현대 미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나에게는 다소 억지스러운 주장처럼 들렸다. 마지막 파트는 사례를 통해 상징과 무의식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Posted by 중년하플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