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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ctura

캔 윌버의 '신' : A Sociable God

by 중년하플링 2025. 4. 5.

- 2025.4, 캔 윌버/조옥경, 김철수 옮김

 

 

이 책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 '합리주의를 넘어선 자아발달의 이론'? 

삶에는 내재하는 목적이 없으며, 절대적인 진리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기 어렵다는 실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은 목적과 의미를 상실한 오늘날의 삶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논리와 합리성만으로 세상을 보는 관점의 끝은 최대의 생산성과 최대의 소비로 만족을 추구하는 삭막한 삶이다. 모두들 과거의 교조적인 종교를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물신적인 삶을 새로운 종교처럼 따른다. 이런 삶을 벗어날 수 있는 다른 길이 있을까? 

60년대 히피 운동이 추구했던 영성은 마약과 프리섹스로 끝나는 철부지들의 어설픈 반항일까? 종교는 과학적 합리주의가 없었던 과거 세대의 미성숙했던 관념으로 현대인은 돌아볼 필요가 없는 유물에 지나지 않을까? 우리에게 남은 길은 현세에서 최대한의 괘락을 이끌어내는 삶이거나, 미심쩍긴 하지만 영적인 깨달음을 준다는 여러 대안적인 수행을 하거나, 시대에 뒤쳐졌다는 사실이 분명하지만 전통적인 종교에 매달리는 것 뿐인가?  

켄 윌버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합리성을 넘어서는 단계의 발달 단계가 있고, 과거 진정한 종교들이 보여준 그 너머의 길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와 같은 단계에 이르기 위해 합리성을 포기하고 무조건 믿는 자세가 필요한 것도 아니며, 단지 합리성이 세상을 보는 시각의 전부라는 '믿음'을 의심해볼 용기만 있으면 된다. 종교는 합리성에 반한다라는  관점은 우리가 전합리성과 초합리성을 혼돈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라고 주장한다.  

   - 전前합리적인 영적 경험과 후後합리적인 영적 경험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으나, 그럼에도 사람들은 언제나 그 둘을 혼동한다는 것이다.
   - 영적 집단에서 가장 결핍된 필수품은 건강한 회의주의인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아마도 회의주의를 신앙의 결핍과 혼동하기 때문일 테지만, 이는 이해할 수는 있어도 매우 잘못된 자세이다.
 
단순화 시켜 말하자면 합리성을 넘어서는 단계는 보다 큰 실체와의 통합을 통해 자아를 확장시키면서 우주와의 합일을 통해 궁긍적인 존재에 다가서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 종교 안에서도 일부만이 성취했던 단계이며 각각 요기, 성자, 현자들이 성취했던 자아발달의 경지이다. 

  - 상위 구조 체계와 통합의 단계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실로 가능하며, 영적이라거나 초월적이라는 어감으로만 불릴 수 있는 것들을 이런 상위 단계들이 점점 더 많이 보여준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상위 구조 단계들을 주로 베단타를 따라서 심령psychic, 정묘subtle, 원인causal, 궁극ultimate 수준으로 불렀다.
 - 원인/궁극 수준은 어떤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 경험하는 자 자체의 해체이거나 초월, 관찰자 원리watcher principle의 죽음이다. 즉 주체와 객체의 이원성을 근본적으로 초월함으로써 혼은 더 이상 신성에 대해 묵상하지 않고 스스로 신성이 되고, 수피가 최상의 정체성Supreme Identity으로 부른 해방이 찾아온다

다른 저자들이 비슷한 개념을 이야기하는 것을 찾는 것도 재미가 있다. 켄 윌버가 말한 아래의 문장은 정확하게 니체의 사막을 건너는 짐승의 우화와 대응되는 개념을 표현하면서, 그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게 만들어 준다. 니체가 이야기한 낙타, 사자, 어린이의 비유에서 일반적으로 어린이는 창조적인 자아를 의미한다고 하는데, 캔 윌버에 따르면 이 단계는 자발적으로 보다 큰 실체에 복종하는 surrender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돈 후앙의 가르침'에서 이야기한 controlled folly, 혹은 바가바드기타에서 이야기하는 카르마 요가(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무아행)와 거의 동일한 개념으로 보인다.  

 - 유아기의 하의식, 청년기의 자기의식, 성숙한 초의식이라는 인간 발달의 세 가지 광대한 영역은 각각 지배적인 심리적 태도, 즉 수동적 의존성, 능동적 독립성, 적극적인 수동적 순복surrender이라는 특징이 있다(이들은 정반합正反合의 관계에 있다). 이 절의 핵심은 학자들이 처음과 마지막 태도를 종종 혼동하는데, 이는 영적 공동체가 갖는 성질에 관해 잘못된 결론을 낳는 혼동이라는 것이다.

켄 위버슨 또한 왜 이와 같은 초개인적인 경지가 왜 합리적인 이성으로 파악하기 어려운지 설명해준다. 자아발달의 단계에서 후행하는 단계를 전단계의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더 상위의 단계는 전단계가 완성되어야 나타날 수 있지만, 전단계를 뛰어넘는 창발적인 특징을 나타낸다. 현재단계에 머무르지 않고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해서는 전단계 자아의 죽음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의 자아는 늘 제한된 삶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기 때문에 방어기제를 만들고, 이를 포기하기 어려워 한다. 

 - 발달이란 불멸 프로젝트가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자기의 층을 점진적으로 벗어버리고 이와 동시에 새로운 수준의 단계 특유한 음식, 진리, 마나로 솟아오름으로써 점차 불멸 프로젝트를 벗어버리는 일련의 과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초개인 단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을 경험할 것인가? 이는 일반적으로 새로운 것에 접근할 때 우리가 취하는 태도와 다를게 없다. 우선 그 영역을 거쳐간 사람들이 남긴 지도를 따라가보고, 이를 통해 직접적인 경험을 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는 유사한 경험을 한 사람들과 비교를 통해 검증을 받아야 한다. 이런 방식을 따라서 우리는 합리성을 포기하지 않고도, 초합리적인 단계를 검증할 수 있다. 

 - 당신이 초월 영역 자체에 대해 실제로 알고 싶다면, 초개인심리학이 사회학에 기여할 수 있는 마지막 부분을 위해서는 관조적 및 명상 수행을 택한 후(지시) 스스로 발견하라(계발). 그 지점에서 일체를 포함하는 초월계가 당신에게 스스로를 드러낼 것이며, 유사한 기질을 띤 사람들의 열정 속에서 검증받을 것이다(확증). 이 시점에서, 신은 당신의 의식 속에 들어 있는 단지 하나의 상징이기를 멈추고, 당신 자신의 복합적 개체성과 구조적 적응의 최정상 수준이자 또한 있을 수 있는 모든 사회의 통합체가 되며, 당신은 이제 그것을 자신의 진정한 자기로 인식한다.

쉽지 않은 책이며 합리성과 영성을 포괄하는 관점을 제시하는 아주 독창적인 주장이다. 다만, 저자가 사용하는 용어가  일반적이지 않아 새로운 단어가 나타날때마다 이 단어가 저자에 의해 사용되는 맥락을 파악해야 한다. 현대인들이  상실한 영성을 되찾을 방법에 대한 지도와도 같은 책. 무조건 아니라고 부정하기에는 대안이 없기도 하거니와, 합리성을 넘어선 직관은 이 방향이 맞다고 말한다. 

 - 개인은 사실상 자신이 “옳은”(종교를 갖는) 이유를 종종 정확하게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당신이 그가 제시하는 이유를 비판하는 경우, 일반적으로 그는 그것을 매우 철학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내 생각에 그 이유는 이 경우에 믿음이 종교적 관여의 실제 원천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오히려 이 세계와 이 삶에 내재하고 있는(뿐만 아니라 이들을 초월하고 있는) 신을 어떻게든 직관하고 있다.

종교란 신이라 부르는 실체에 기대어 우리의 소망을 충족하려는 유아적인 기복이라는 관점을 넘어서고자하는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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