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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ey & Power/노무현과 한국사회의 변화

도덕적인, 너무나 도덕적인

by 중년하플링 2004. 10. 2.

도덕적인, 너무나 도덕적인

도덕과 정치 사이에서 근본주의자들에게


1

『인물과 사상31』에 실린 김진석의 “‘우충좌돌’하자! 우파 근본주의와 좌파 근본주의 사이로”를 읽었다. 난 그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아마 현정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처럼 김진석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리고 현정권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당연히 자신들의 당파성을 왕성하게 드러내며 비판의 칼날을 세울 것이다.


당파성에 따라서 어떤 사태가 해석되고 가치평가가 행해지는 모습은 자연스럽다. 또한 상대방의 주장은 오로지 당파적 해석에 지나지 않으며 나의 주장은 단순한 당파적 해석이 아니라 ‘객관적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럽다. 하지만 자연스럽다고 해서 올바른 태도가 되는 건 아니다. 만약에 ‘진리’라는 게 있다면, 모르긴 몰라도 그건 자연스러운 태도에 반(反)하지 않으면 찾아내기 힘든 혹은 만들어내기 힘든 어떤 것일 것이다.


약 한 달쯤 전에 난 이라크파병에 대한 생각을 글로 정리하다가 그만 둔 적이 있다. 현정권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이라크 파병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글이었는데, 쓰다 보니 글이 점점 자체의 관성을 띠고 과격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글이 공격적으로 나가면 나갈수록 공허함도 비례해서 커지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든지 상대방에게 결정적인 일격으로 작용할 독한 말을 찾아 머리를 굴리는 치졸한 내 모습에서 난 잠시 기가 막혔다. 도대체 뭘 위한 당파성인가? 당파성의 경계는 어디까진가?


난 지금 당파성을 지워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건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저 너무 굳건하게 당파성을 세워 놓고 모든 걸 거기에 맞춰 환원하는 ‘지독히도 오래된 버릇’의 폐해를 지적하는 것이다. 즉 환원만 하지 말고 사유하도록 노력해보자는 것이다. (자신도 못하는 걸 남에게 요구하다니 나도 참 대단하다) 그래서 당파성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자는 것이다.


당파성을 ‘풍요롭게’ 만든다? (너무 자유주의적인 표현인가?) 얼마 전 서프에서 ‘지하당’과 관련된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하지만, 내 눈에는, ‘서프가 뭐하는 곳이냐, 자위하는 곳이냐 아님 논쟁을 통해 사유를 훈련하는 곳이냐’ 로 읽혔다. 내 생각엔 둘 다 맞다. 서프는 자위하는 곳이다. 그리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프는 일차적으로 중도개혁노선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모여서 노는 공간이다. 그리고 그것이 개혁의 성공을 위해 지지세력을 확장시켜야 하는 정치 공간의 역할을 저해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노는 방식이다. 예전, ‘왕따 현상’이 일반화되기 이전, 아이들의 세계엔 ‘깍뚜기 문화’가 있었다. (언젠가, ‘깍뚜기’에 대해서 써 논 글을 보고, ‘맞아, 그 땐 깍뚜기가 있었어’ 하고 무릎을 친 기억이 있는데, 어디서 봤는지는 기억에 없다) 다방구나 술래잡기를 할 때 예전 아이들은 약하고 어린 아이들을 배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에게 ‘깍뚜기’라는 특권을 부여해서 놀이에 참여시켰다. 그리고 그들이 참여했다고 해서 놀이의 규칙이 흔들리거나 와해되는 일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건, 매번 놀이의 규칙을 창조적으로 변용해서 적용해서 적용할 수 있을 정도로 아이들의 놀이 문화가 성숙했기 때문이다.


풍부함 혹은 성숙함. 이런 모습이 가능하기 위해선 비정상적인 것, 혹은 이질적인 것들을 기꺼이 끌어안는 자신감이 내부에 깔려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기득권층을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을 한 번 보라. 물질적 풍요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의식의 천박함. 내면의 빈곤함. 그리고 개인주의적 여유 대신 또아리를 틀고 있는 조급증의 발작 증세. 여기서 어떤 ‘문화’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이 발붙일 수 있겠는가? 여기서 어떤 ‘스스로를 긍정하는 힘’을 발견할 수 있는가?


자신감은 우리 사회에서 구조적으로 양산되고 있는 피해의식과의 대면을 통해서, 끊임없이 그것과 대결하는 과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방법상 ‘주체’를 세울 필요가 있다. 하지만 ‘주체’를 세우는 것만 가지고는 충분치 않다. ‘주체’를 세우는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그렇게 세운 ‘주체’는 계속해서 흔들려야 한다. 그런데 어떤 ‘주체’는 흔들리지 않는 걸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한다. 자신을 ‘주체’로 형성해 준 외부의 조건과 단절하고 높은 차단막을 친 채 고고한 동어반복만을 되뇌이는 ‘주체’. 이런 모습은 사실 ‘주체’라는 말이 무색한 피해의식의 도덕적 편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피해의식과 자신감의 경계가 뚜렷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구분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그건 그 사람 혹은 집단이 노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요컨대, 자신을 긍정하는 자신감에 찬 집단은 뭔가 ‘문화적인 것’을 창출하는 힘이 있다. 반면에, 도덕적인 너무나 도덕적인 집단은 그야말로 ‘원한’에 찬 뒷다마를 까기에 바쁘다.


난 서프가 지금까지 그랬듯이, 앞으로도 충분히 ‘문화적인 것’을 창출할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서프는, 정치적인 정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파성이라고 다 같은 당파성이 아니다. 서프의 당파성은, 명실상부한 민주공화국을 만들어내야 하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자신의 입장을 정립한 당파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민주공화국을 만들어내는 방법으로 중도개혁노선을 선택한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중도개혁노선을 걷는다는 의미는, 국가와 자본주의체제, 그리고 시민사회를 비롯한 여타 공동체의 관계가 ‘안정되게(혹은 ‘무기력하게’)’ 돌아가는 소위 ‘선진국’에서의 그것과는 다르다. 누구 말대로, 발전된 자본주의체제 하에서는, 국가의 역할을 둘러싸고 사회민주주의 좌파와 우파가 있을 따름이다. (우리들 ‘꼴통 어르신내’들이 보면 거긴 죄다 빨갱이 들이다) 거기에서의 중도노선이란 그야말로 분배 대신 성장을 중심에 놓고 정책을 펴겠다는 의미밖에는 없는 것이다. 허나 우리의 경우에는, 극우 국가주의 세력으로부터 정치적 헤게모니를 빼앗아 국가 자체의 폭력으로 인해 자라지 못한 시민사회와 공동체를 키운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중도개혁노선이란 ‘시민혁명’과 겹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은 ‘문화혁명’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 홍위병? 그래, 홍위병) 앞에서 지적했듯, 사회 각 분야를 ‘꼴통’들이 지배하는 일극체제 하에서의 ‘문화’란 문화라고 부르기엔 너무 처참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대학을 보라. 우리의 인문학을 보라. 그리고 우리의 도서관을 좀 보라.


그런데, “왜 하필 중도개혁노선이냐. 좀 더 ‘래디컬’한 노선이면 더 빠르고 내실있게 ‘시민혁명’의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 아니냐”고 묻는 분들이 있다. 그런데 보통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사회의 청사진을 지극히 흐릿하다. 물론 그건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만 그런 것은 아니다.


김진석의 말을 빌면, “아직 한국사회는 정치경제적으로 어느 정도의 성장과 폭력을 감내해야 하는지 또 감내할 수 있는지, 사회적 정치경제적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또 어느 정도의 국제적 실력을 갖추고 있고 또 갖춰야 합당한지 사회적 정치경제적으로 합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진석을 곧바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이 질퍽한 혼돈 상태에서는 아무리 개혁적인 정당이더라도 제대로 개혁을 하기 힘들 것이다.”


사실 이런 식의 논의를 ‘유신체제’를 기준으로 삼고 국가 정체성을 들먹이는 ‘꼴통’들과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이런 논의는 최소한의 공공성, 최소한의 합리성을 갖춘 ‘좌파 진보세력’과 ‘개혁세력’이 서로 상대가 되서 얘기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우리 사회의 자칭 ‘좌파 진보세력’은 너무 관념적이다. 근본주의적이란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사안을 너무 도덕적으로 접근한다. 그러면서 당파성을 드러내는 데 어찌 그리 ‘철저한가.’


그야말로 우리사회의 ‘좌파 진보세력’의 변증법은 거꾸로 서있다. 밖으로는 정치적이고 안으로 도덕적이어야 하는데, 거꾸로다. 밖으로는 도덕적이고 안으로는 선명성 투쟁을 벌인다. 예컨대, 미 제국주의에 대해, 신자유주의에 대해, 전지구적 자본주의체제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는가? “그건 옳지 않다. 난 반대한다.” 끝, 아니 “그러니 너도 반대해라.”


한국의 ‘좌파 진보세력’이 정말 2012년 집권을 목표로 한다면, 내부에서 득세하는 근본주의적 경향을 걷어내야 한다. 사회주의가 아니라 사민주의를 철저히 해야 흐릿하나마 비전을 그려 보여줄 수 있다. 그렇지 않고 계속해서 근본주의적 경향을 가진 세력들이 상대적으로 온건한 세력을 향해 기회주의니, 수정주의니 하는 도덕적 비난이 행해지고 또 그것이 먹히는 분위기가 바뀌지 않으면, ‘수구 꼴통’들에게 미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래가 없다. 그게 그저 ‘좌파 진보세력’의 불행으로만 끝난다면 이런 말을 하지도 않는다. ‘좌파 진보세력’의 불행은 우리 사회 전체의 불행이기 때문이다. 연속되는 불행 속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소모전, 이젠 방향을 좀 바꿔봐야 하지 않겠는가.


2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김구 선생의 말씀 한 대목이다. 높은 문화적 힘을 가진 나라. 아마 당파를 떠나서 대부분 수긍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소위 ‘사회주의적 이상’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을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경제라는 둔탁한 압력’으로 벗어나 자신의 ‘창조적 충동’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사회〉라고 규정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문화적 힘을 가진 나라가 되기 위해선, “우리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한 부력과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한 강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물론 가난하고 힘 없어도 행복할 수 있지만, 국가 차원에서는 그렇게 될 수 없다. 최소한 수준 높은 문화를 구가할 수는 없다. 그리고 아직 우리 사회는 그럴만한 부력과 강력을 갖추지 못했다.


“그래서? 매번 지배세력들은 그랬지. 아직 분배할 때가 아니라고. 지금은, 그리고 앞으로도 쭉 파이를 키우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고. 현정권도 똑같은 소리를 하지. 몇 십 년 동안 들어 온 똑같은 레퍼토리. 지겹다. 지겨워”


맞다. 지겨운 소리다. 승질 같아서는 확! (그렇다고 ‘홧김에 서방질’을 해서야 되겠는가. 애정에 기초하지 않은 바람질은 볼 성 사납다. 쿨한 거 아니냐고? 그래, 그래 맘대로 생각해라)


분명한 것은, 현정권이 나름대로 사회적 약자를 위해 애를 쓰고 상대적으로 ‘분배’에 신경을 쓴다고 하더라도 뚜렷한 한계를 가지며, 강조점을 역시 ‘성장’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점을 현정권의 보수성 혹은 반동성의 논거로 삼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김진석이 말한 대로 “현 체제가 세계자본주의 체제라면, 더 강한 집단들이 게임의 규칙을 바꾸지 않는 한 주변부 국가들에게 선택의 폭은 좁아”질 수밖에 없으며, “주변 강대국이 많건 적건 모두 팽창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한, 한국사회도 좋건 싫건 일정하게 강자들 사이에서 게임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정권이 ‘성장’에 방점을 찍을 수밖에 없는 것은, 보수성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책임을 다하려는 모습으로 읽어야 한다. 아전인수식 해석의 정수라고? 불륜, 로맨스 논리의 진수라고?


한 번 김진석의 말을 인용하고 진행해 보자. “우리는 ‘세계체제’라는 말의 폭력성을 알 만큼 안다. 좌파근본주의에 가까운 사람들은 그 체제의 폭력성과 비정함을 강조한다. 나도 안다. 그러나 그 말이 무슨 말인가? 그 세계가 그렇게 폭력적이고 비정하다는 말은 거꾸로 거기서 빠져나오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닌가” 도대체 “그 불굴의 폭력성을 끝없이 과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완전히 거기에서 벗어나자는 어처구니없이 공허한 주장을 펼쳐서”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앞서 나는 중도개혁노선이 ‘시민혁명’과 겹쳐진다고 하면서 그 노선의 ‘진보성’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지금은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주변부에 끼인 ‘생존조건’을 부각시키며 ‘성장’에 중점을 둘 수밖에 없다고 강변하고 있다. 이건 모순인가? 좋다. 모순이라고 하자. 그럼 그 모순은 어디서부터 나오는가? 중도개혁세력이 개혁세력이 아니면서 개혁세력이라고 자신들을 오해하는 혹은 거짓말하는 지점에서 나오는가? 아니면 전 지구적 자본주의체제라는 ‘엄중한 상황’ 하에서 어떻게든 더 나은 입지를 구축해보려고 탐색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것인가?


내가 보기엔, 세계자본주의체제라는 조건 자체가 ‘반동적’이다. 물론 자본주의체제가 성립된 이래 그건 조건이 변한 적은 없었다. 아마 자본주의체제가 지속되는 한 세계적 차원에서의 남북문제는 해결이 요원할 것이고, 그것이 가진 근본적인 제국주의적 성격이 약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조건 하에서의 ‘진보성’은 오직 민족국가 내부에서만 담보될 수 있다. 만국의 노동자들이 단결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노동자들이 다 처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소위 ‘선진국’에 사는 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높은 생활수준을 누린다면, 그건 ‘계급투쟁’에 따른 결과보다는 제국주의적 착취의 결과다. 그 착취의 결과를 ‘계급투쟁’으로 나눈 것이다.


즉 어차피 민족국가 단위로 쪼개져 피터지게 경쟁해야 하는 세계자본주의체제에서는, 실질적인 생활의 향상, 혹은 발전을 위해선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도덕성이란 잣대를 괄호에 묶어 놓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조건이 이렇다면, 우리는 선택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다. 도덕성의 훼손을 감수하면서 실질적인 생활의 향상을 위해 나아가든지, 아니면 도덕성을 고수하고 우리끼리 ‘주체적으로’ 살던지. 하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선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지만, 사회적인 차원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선택을 먼저 해놓고 그 다음에 조그만한 여지를 디벼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얼마나 옹색하고 처량한가. (그래, 몇몇 도덕성의 화신들이여, 그렇게 발버둥치는 현정부의 모습이 그렇게 창피한가? 그래, 상황은 어려워도 다 잘 될 거라고 뻥 좀 쳤다. 호기도 부리고 객기도 부리고 하소연도 좀 했다. 그게 그렇게 꼴보기 싫은가?)


물론 그렇다고 현정부가 애쓰고 있으니 잠자코 지켜봐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현정부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내에서 가능성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진보’라는 것을 머리 속에서 체계화된 특정 이념에서 ‘해방시켜’ 노동자, 서민이 실제 생활을 하는 시장 바닥으로 내려놓는다면 그 가능성은 생각보다 넓어질 것이다.


현정권을 비판하는 말 중에, ‘선한 의지가 나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건 내가 보기엔 정확히 좌파근본주의자들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한국의 좌파들이여, 너무 선한 의지로만 무장하지 말아라. 도덕적으로 굳건한 ‘주체’는 자신에겐 약이 될지 모르지만 사회적으로는 독으로 변할 수도 있다. 〈내가 부정하는 ‘주체’란 그 주체 형성에 매개되어 있는 근원에 대해 묻는 일 없이 주체의 직접적 현전성 안에서 자족하는 주체일 뿐이다.〉 좌파의 기본 학문은 정치경제학이 아니던가.


3


중요한 것은 세계를 해석하는 게 아니라 바꾸는 거라고 했다. 이 말이 세계를 엉터리로 해석해도 된다고 한 말은 아닐 것이다. 난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희한한 결합’ 중에 기독교와 좌파의 잘 버무려진 조합을 목도할 때마다 고개가 기울어지곤 한다. 물론 이걸 ‘희한한 결합’이라고 조소하는 게 개운치는 않다. 진보 좌파가 ‘제 이름을 제 이름으로 부르지 못하는’ 시절에 대한 ‘기억의 카타콤’ 때문이다. (말을 너무 비튼 것 같다. 그러나 그냥 둔다. 왜냐하면 ‘친애하는’ 서프 새내개 여러분에게 이성복의 초기시집들을 추천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민주화에 많은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이 쬐금 변했다. 더 이상 우리사회의 좌파들이 비전이 아니라 믿음으로 자신의 신념을 유지해도 좋은 시절이 아니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싸가지 없게’ 지적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사회는 정부가, 기존의 국가주의체제에서 휘둘렀던 과도한 권력을 놓아야하고, 동시에 국가주의체제에 의해 소외되었던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권력을 발휘해야 하는, 일견 모순된 상황에 놓여 있다. 간단하게 말해, ‘통치’에서 ‘정치’로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화를 아주 단순하게, 국가에 모두 집중되어 있던 권력을 시민사회가 빼앗아오는 과정이라고 정의한다면, 시민사회에 권력이 있어야 비로소 ‘통치’가 아니라 ‘정치’라는 ‘합리적 배분’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오랫동안 국가주의체제가 지속되다보니, 시민사회를 구성해야하는 주요 집단들이 ‘꼴통화’ 되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그 체제에 의해 극심한 탄압을 받던 민주화집단은 ‘종교화’ 되었다. 한 쪽은 지독한 탐욕으로 '합리적 과정'을 거부하고 다른 한 쪽은 세속적이라는 이유로 (근본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그걸 무시한다. 즉 ‘정치’는 실종되고 (원래 없었으니까 실종이 아니지), 아니 ‘정치’는 창출되지 못하고 아전인수이전투구만 벌어지게 되어있는 상황인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세계자본주의체제에 끼어들어서 게임을 벌어야하는 조건인 만큼 현정부가 가지는 개혁의 한계는 분명 존재한다. 현정부는 이러한 한계 내에서 ‘진보적인’ 정책을 별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정부의 ‘개혁성’을 원천적으로 부정하진 말자. 비록 한계 내에서지만 개혁의 효과는 무시하지 못 할 것이다. 그러니 잠자코 두고 보자고? 아니다. 개혁의 효과가 확대될 수 있도록 방법을 좀 수정해보자는 것이다.


정부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만큼 정부에 대고 요구하는 목소리에 과부하를 거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문제는 과부하에서 오는 에너지의 소모다. 온통 대정부 정치투쟁이다. 그것보다는 ‘꼴통들’과 직접 대면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제도개혁은 그것대로 당연히 이루어져야겠지만 (열린우리당이 미적미적 댄다고? 내가 알기론 미적대는 열린우리당을 우리 ‘노빠’가 무조건 옹호하지는 않는다. ‘노빠’들은 생각만큼 노빠들이 아니다) 문화를 바꿔가는 투쟁도 병행해야 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김진석의 글에 나오는 우리나라의 ‘엽기적인’ 교회의 행태를 한 번 보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상한 일은 한국 교회가 표면적으로는 정교분리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면서도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선동을 일삼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정교분리 이데올로기는 사회로부터 비판이나 감시를 받지 않은 채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고 이익을 확장하는 데 기여한다.”


이런 현상은 교회가 대표하는 종교계 뿐만 아니라 무슨 무슨 ‘~계’라고 이름 붙여진 여타 집단들에게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대동소이하다. 교회는 자신의 존재이유와 그 행태 사이의 괴리가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얼굴에 깔린 철판 두께만큼이나 벌어져 있어 유독 돋보인다는 특징이 있을 뿐이다. (언론계? 찌라시 얘기는 오늘 안 한다) 한국의 대형 교회들, 이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제도적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답이 잘 안 나온다.


마르크스가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고 했을 때, 그 포인트는 어리석은 민중을 비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에 빨질 수밖에 없는 고통스런 현실 조건을 바꿔야 한다는 데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의 좌파 기독교인들이여, 그러니 열악한 현실 조건을 바꾸는 데 매진하면 교회 문제는 저절로 해소될 거라고 말 할 것인가? 나는 지금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모욕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모욕은 스스로가 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교회가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그저 단지 교회가 사회적으로 너무 많은 해악을 끼쳐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하는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의 대형교회가 높은 성전 짓고 전투적 해외 선교사업하는 돈의 백분의 일이라도 자신들의 형제자매를 위해서 쓴다면 어떨까, 하는 공상을 해본다.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신도들끼리라도, 우리 사회에서 붕괴되어 버린 ‘공동체’의 역할을 한다면 우리 사회가 훨씬 넉넉해 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아마 국가가 교회에 세금을 물리지 않는 것은 이런 ‘공동체’의 성격을 인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공동체의 물질적 교환 방식은 기본적으로 역사 이전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증여와 보답의 형식이다. 예전의 부족장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증여받은 물량의 몇 곱절을 되돌려주곤 했다. 이런 교환 형식은 국가가 세금이라는 이름으로 강제로 걷어서 재분배하는 방식이나,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화폐에 의한 표면적인 등가 교환과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바로 공동체를 구성하는 구성원들 간의 강한 유대와 결속이다.


그런데 우리사회의 교회는 안에서의 유대는 신경 안 쓰고 밖에 있는 국가와 시장과 너무 밀착된 유착관계를 유지하고 성장해서 그런지, 자신이 국가인지, 기업인지 헷갈려 한다. 현금인지, 세금인지 돈을 걷어서는 물질적 보답은 고사하고 재분배도 제대도 하지 않는다. 아마 교회건물을 사회간접자본으로 보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지역주민들이 문화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자리라도 내주던지. 그렇다고 서비스를 제대로 하는가? 그건 서비스를 받는 사람마다 다르게 말하겠지만, 내가 보기엔 ‘파리의 연인’을 보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정말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는 대형 교회 나빠요!”


교회가 공동체의 역할을 포기했다면 당연히 세금을 내야 한다. 그래야 눈꼽 만큼이라도 그 혜택이 사회적 약자에게 되돌려 질 것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세금을 내지 않으면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역할을 충실하게 할 수 있도록 바뀌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누가 바꿀까? 외부에서 손대기도 어렵고, 내부개혁도 어려워 보인다. 아까는 좌파 기독교인을 거론하며 그들이 내부에서 어떻게 싸움을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문화적 방법 운운했는데. 좀 오버한 것 같다. 따지고 보면 그들도 교회와는 직접적으로 관계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무엇보다도 교회의 힘이 너무 세다. 숨이 턱 막힌다. 어쩔 수 없이, 전반적인 사회 개혁을 통해서 우회적으로, 천천히 간헐적으로 압력을 행사하는 방법 외에 특별한 게 없을 것 같다.


애초에, 내가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진보좌파’를 포함해서 우리들이 좀 더 ‘세속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밥그릇을 더욱 챙겨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밥그릇 배분을 좀 더 ‘합리적인 방식’으로 논의해야 한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도덕과 정치의 괴리를 좀 좁혀보자는 말이다.


그 사이가 너무 넓으면 뭔 말인지 모를 주장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신자유주의를 거부하고 (도덕적 주장)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정치적 주장) 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건 사회주의혁명이 성공해도 마찬가지다) 이런 식으로 하면 오히려 노동자들이 손해다. 왜냐하면 사회적으로 ‘합리적인’ 대화의 장이 마련되지 않으면 아쉬울 게 없는 ‘꼴통들’만 좋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각 집단이 근본주의적 성향을 띠는 한 ‘문화’를 창출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문화의 일차적인 적은 교조화된 도덕이다. 주변에서, 경계에서 값어치 있는 문화가 나온다. 아까 잠시 피해의식 얘기도 했지만, 난 솔직히 진보좌파를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이 깨어있다는 착각 속에 편협한 의식을 적잖게 드러내는 것이, 단지 ‘거칠고 투박한 사고’가 정치적으로 요구되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본다. 비록 그들만은 아니겠지만, 전반적인 ‘인문학의 빈곤’이 시야를 가로막고 피해의식을 안으로 뭉치게 해서 배타성만 키운 결과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치고 피해의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일렬종대로 세워진 나라에서. 하지만 상황이 열악하더라도 ‘고귀한 생각’을 품은 사람이라면, 더구나 정치적인 변혁을 열망하는 사람이라면, 인문학 실력을 키워야 한다.


물론 “어느 누구든 불가능한 일을 해야 할 의무는 없다.” 하지만 높은 경지에서 사물을 바라보고자하는 노력이 성공하는 게 꼭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이건 정치혁명가에게도 꼭 필요한 것이다. 이 말을 누가 했을 것 같은가? 폴란드 출신의 ‘불세출의’ 여자 혁명가가 했다는 말이다.


끝으로 내가 자꾸 좌파진보세력에게 자꾸 딴지를 거는 것은 애정이 있기 때문이다. (몇몇 분들은 예외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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