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

약 4년 전, 고이즈미는 소속당인 자민당을 깨는 한이 있더라도 일본을 '개혁'하겠다는 약속으로 총리에 당선됐다. 4년 가까이 지난 지금 고이즈미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해냈다. 지난 4년간 수치스러울 정도로 개혁은 거의 진전시키지 못했으면서도 또 다시 개혁의 약속만으로 이전보다 더 많은 의석을 차지한 것이다. 그 자신이 정부의 수반이면서도 스스로를 정부에 대한 개혁세력의 지도자로 부각시킴으로써 인상적인 승리를 거둔 셈이다.

지난 8월 8일, (상원인) 참의원에서 우정공사민영화법안이 17표 차로 부결되자 고이즈미는 (하원인) 중의원을 해산함으로써 9.11 총선이 치러지게 됐다. 당시 자민당 소속 의원 중 37명이 이 법안에 대해 반대 또는 기권을 하자 고이즈미는 조기 총선이라는 전례 없는 조치를 취하면서 일본 국민들에게 자신의 우정민영화 계획에 대해 '찬성'인지 '반대'인지 분명한 입장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우정공사 민영화야말로 개혁의 성패를 가를 중요한 시금석이라는 주장과 함께. 그는 총선기간 내내 집요하게 한 가지 주장만을 되풀이했다. 이번 총선은 개혁에 관한 것이며, 개혁의 핵심은 우정공사 민영화라는 것이었다. 참의원의 법안 부결에 대한 대응으로 중의원을 해산한 것은 사실 적법성이 의심스러운 조치였다(이에 앞서 중의원에서는 근소한 차이로 가결됐음: 역자). 일본 헌법 59조 2항에 따르면, 동일한 법안에 대해 양원의 표결 결과가 다를 경우, 이 법안은 다시 중의원에 회부돼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통과시키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고이즈미는 이 방법에 의한 법안 통과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이즈미는 법안에 반대한 자민당 의원들을 배신자라고 비난했을 뿐만 아니라 당에서 축출하는 한편 총선에는 이들을 꺾을 '자객'후보들을 내보냈다. 이들 중에는 명망 있고 매력적이지만 정치경력은 전혀 없는 여성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고이즈미는 스스로를 16세기 전국시대의 무장 오다 노부나가에 비유하면서 총선기간 내내 노부나가처럼 행동했다. 또 어떤 때는 자신을 갈릴레오에 빗대면서 우정공사 민영화는 지동설의 제기에 맞먹는 혁명적 발상이라는 인상을 풍겼다. 나아가 갈릴레오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신념을 위해 죽을 각오가 돼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일본의 유권자들은 자객 후보들에, 정치적 신념을 위해 목숨을 내놓겠다는 고이즈미의 결의에, 그리고 '개혁'의 약속에 열광했다. 이번 총선의 투표율은 67.5%였는데 이는 1990년 이후 치러진 어떤 선거보다도 높은 것이었다.

과거 중대선거구제였던 일본의 선거제도는 1994년 이후 소선거구제에 의한 지역대표 300석과 비례대표 180석으로 바뀌었다. 고이즈미의 자민당은 이번 총선에서 2580만 표(비례대표)를 얻었다(이는 득표율로 38.18%이며 몇 달 전 토니 블레어가 얻은 득표율보다 3%포인트 가량 높다). 그런데도 38%의 득표율로 전체 의석의 61%인 296석을 차지했으며, 연정파트너인 공명당의 31석(890만 표, 득표율 13.25%)과 함께 전체 의석의 3분의 2가 넘는 327석을 확보했다. 전국적으로 자민당에 표가 쏠린 것은 사실이지만, 불교계인 공명당의 종교성향 유권자들의 가세가 없었다면 자민당 후보들이 도시지역에서 승리하기는 대단히 어려웠을 것이다. 반면 제1야당인 일본민주당(이하 민주당)은 (비례대표에서) 2100만 표, 31%의 득표율을 올렸지만 의석은 177석에서 113석으로 대푹 줄어들었다. 특히 지역대표 소선거구에서 민주당의 득표율은 이전 총선에 비해 1%포인트가 줄었을 뿐이지만 의석은 35석에서 17석으로 반감됐다.

일본공산당은 7.25%의 득표율로 의석의 1.9%만을 차지했다. 이 중 지역대표는 단 한 명도 없지만 의석 수는 종전의 9석을 유지했다. 사회민주당(이전의 사회당)은 5.5% 득표로 의석이 6석에서 7석(1.5%)으로 늘었다. 자민당의 '배신자' 중 17명, 그리고 무소속 후보 1명이 의원직 유지에 성공했으며, 이들은 무소속 또는 신생 군소정당의 깃발 아래 국회의 가장 외진 구석에 자리를 차지했다.

이번 총선 결과는 일본의 현대정치 역사상 여당이 거둔 가장 위대한 승리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는 상당 부분 선거제도의 특이함에 기인한 것이었다. 자민당은 결코 유권자 과반수의 지지를 얻은 것이 아니며, 사실 1963년 이래 과반수 확보에 성공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다음 표는 1994년 선거구제 개혁으로 자민당이 얼마나 정치적 이득을 누렸는가를 보여준다.
<96년 이후 자민당 총선 성적>
년도
득표율
의석 비율
1996년
39%
56%
2000년
41%
59%
2003년
44%
56%
2005년
48%
73%

민의를 심각하게 왜곡하는 선거구제도가 민주주의의 실현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득표율에 의해서만 의석을 배분한다면 이번 총선에서 자민당은 183석, 민주당 149석, 공산당 35석, 사회민주당 27석을 갖게 된다. 아사히신문이 이번 총선의 지역대표 소선거구의 득표상황을 분석한 결과 연립정부(자민당과 공명당)의 득표는 3350만 표로 반대표 전체를 합친 것보다 100만 표 가량 적은 것으로 드러났다. 9.11 총선이 자민당에게 압승을 안겨준 것은 사실이지만, 유권자들이 고이즈미와 그의 정책에 결정적으로 손을 들어줬다는 일본 언론의 해석은 환상에 불과할 뿐이다.

지난 반세기의 대부분을 자민당이 집권해 오는 동안 야당 진영은 상당한 변화를 겪어 왔다. 현재의 제1야당인 민주당은 기존 정당(자민당과 사회당)의 구 '좌익' 및 '우익' 세력이 1990년대 중반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한데 뭉침으로써 1998년에 현재의 형태를 갖게 된 잡종의 불안정한 연합체다. 민주당은 이번 총선에서 명목상 야당으로 나서기는 했지만 우정개혁이라든가(세부사항에서는 고이즈미와 이견을 보였지만) 신자유주의적 개혁 아젠다에서는 기본적으로 자민당과 입장을 같이하고 있다. 심지어 2003년 총선에서는 '개혁' 과정에서 발언권을 확대하려는 일본 재계의 총본산인 게이단렌의 자금지원을 받기도 했다.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은 고이즈미가 선거를 단 하나의 주제, 즉 우정개혁에 대한 국민투표로 몰아간다는 사실을 간과했으며 톡톡히 그 대가를 치렀다. 민주당은 복잡한 문제들과 여러 정책대안들만 제시했을 뿐 고이즈미가 만들어내려고 하는 사회가 어떤 사회인가에 대한 비판적 통찰이라든가 확실한 대안적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민주당 외에 야당 진영에는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이 있다. 공산당은 2차대전 후 득표율이 2~8%를 꾸준히 맴돌고 있으며 사회민주당은 1990년대 초까지는 꾸준히 15%대의 득표율을 유지해 왔지만 자위대의 합헌을 인정하고, 미일안보조약을 받아들이며, 히노마루와 기미가요를 국가와 국기로 인정한 전 지도자 무라야마 도미이치의 치명적 결정 이후 서서히 쪼그라들고 있다. 이밖에 이번 총선과정에서 자민당에서 튕겨져 나와 무소속으로 남게 된 우정개혁의 '배신자들', 그리고 몇몇 신생 군소정당들이 있다. 사회민주당은 1990년대의 정체성 혼란에도 불구하고 고이즈미 태풍을 견뎌내고 있으며, 이번 총선에서는 평화와 현법 수호라는 원칙을 지킴으로써 비록 1석이지만 의석을 늘렸다.

최근 일본의 어떤 총선에서도, 나아가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이번 총선만큼 이미지가 좌우한 선거는 없었다. 고이즈미의 노타이 옷차림, 불룩한 머리모양, 도전적인 자세, 그리고 열정적이며 간단명료한 연설 등이 전국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여름에서 총선일에 이르는 동안 고이즈미는 잘 짜여진 여당 선거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선거운동 전략의 핵심은 정장을 벗어던지고 노타이에 줄무늬 혹은 꽃무늬의 셔츠를 입는 것을 통해 보수적인 자민당 이미지와 차별화를 시도하면서 개인적인 친근감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야당 지도자 오카다 가츠야는 짙은 색 정장에 넥타이 차림으로 전형적 샐러리맨처럼 보였으며, 연설 내용도 성실하기는 했으나 지루했다. 심지어 가라오케 애창곡이 뭐냐는 질문에 가라오케를 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는데, 이는 스스로를 외계인이라고 고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반면 고이즈미는 2001년 총선 당시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부른 CD를 발표함으로써 총리직을 거머쥔 데 이어 2003년 영화배우 톰 크루즈를 만날 때는 'I Want You, I Need You, I Love You'를 즉석에서 부르는 순발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오카다와 민주당은 고이즈미의 선거전략을 오판했으며, 그의 영리한 이미지와 말솜씨의 파도에 멍청하게 휩쓸려 들어가고 말았다.

자민당으로의 표 쏠림은 도쿄, 오사카와 같은 대도시 지역, 그리고 청년층과 여성 유권자에서 특히 심했는데 이들 지역과 유권자 계층은 최근 선거에서 민주당이 약진하는 기반이었으며, 2003년 11월 총선의 경우 민주당은 이들 지역및 유권자 계층에서 자민당보다 200만 표(비례대표)를 더 얻었다. 하지만 이번 총선에서 자민당 지도자 고이즈미는 야당 지도자 오카다보다도 '더 반(反)자민당적'인 이미지를 유권자들에게 심어주었다.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 일본 국민들은 지난 50년의 기간 중 49년 동안 부동의 권력을 누려온 정당, 4년간 권좌에 앉아 있으면서 실제로 이룬 건 없지만 여전히 단호해 보이며 자신에 찬 말을 뱉어내고 있는 지도자에게 다시 한번 변화에의 기대를 건 것이다.

우정공사

이번 총선은 우정공사를 반드시 민영화해야 한다는 고이즈미의 고집 때문에 치러졌다. 그렇지만 일본의 어느 누구도 우정공사의 서비스가 불만족스럽다고 말하지 않았고, 고이즈미 자신도 '관에서 민으로'라는 구호 외에는 우정공사 민영화의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우정공사는 독특한 기관이다. 전국에 2만5000여 우체국을 거느리고 우편배달 업무를 할 뿐만 아니라 저축 및 생명보험 업무도 하고 있다. 특히 저축 및 생명보험 업무를 통해 우정공사는 세계 최대의 현금자산을 보유하고 있는데, 그 액수는 자그마치 350조 엔(3조 달러 이상)으로 230조 엔의 우편저축과 120조 엔의 생명보험 쳥약금(일본 생명보험 시장의 30%)으로 이루어져 있다. 규모로만 보면 미국 시티그룹의 2.5배, 독일 폴크스방크(도이체 방크의 자회사)의 20배쯤 된다. 일본의 외딴 마을에서 우체국은 중심적 사회기관의 역할을 한다. 사람들은 낮은 이자(1%가 채 안 된다)에도 불구하고 민간은행보다는 우체국에 저금을 한다. 우체국의 안정성, 수수료가 싸다는 점, 그리고 우체국에 저금한 돈이 일종의 국가기금이 되어 국가개발 프로젝트에 쓰인다는 생각에서다. 고이즈미의 민영화 계획은 기존 우정공사를 4개의 기관으로 나눠, 2017년까지 10년에 걸쳐 완전히 민영화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2017년에도 일본 정부는 지주회사를 통해 전체 주식의 3분의 1 이상을 보유하도록 돼 있다.

일본 우정공사는, 특히 그 막대한 저금 및 생명보험 기금 때문에 1970년대에 다나카 가쿠에이가 완성한 이른바 '토건국가' 시스템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일본 국민들의 저금 및 생명보험 기금은 대장성에 의해 고속도로 건설, 공항, 교량, 댐 등을 담당하는 다양한 준 공공기관들에 보내진다. 그리하여 사회적 부가 지역간, 사회계층간에 재분배되는 것이다. 다나카와 그 후계자들에 의해 '토건국가'는 권력과 부패의 망을 전국에 확산시켰으며, 정치를 이익 나눠먹기로 변질시켰고, 이에 의한 단기적 이익과 경제성장 촉진으로 정권의 정통성을 유지하게 했다. 자민당의 정치기제가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일본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졌던 것은 이러한 시스템이 지역간 부의 불균형을 시정하고 일종의 복지제도, 즉 사회적 안전망으로서 기능했기 때문이다.

우정공사는 일본의 관료적 개발주의 국가의 핵심요소가 돼, 한편으로는 투자자금이 개발프로젝트에 흘러갈 수 있도록 보장함으로써 '개발'이 계속되도록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민당, 특히 다나카파의 득표 및 영향력 행사의 수단으로 작용했다. 이 시스템은 또한 각종 공사 등에 아주 실속 있는 일자리들을 갖고 있어, 그런 일자리를 정치파벌 소속원들에게 은퇴 후에 제공했다. 공직에서 우정자금을 주무르던 이들은 은퇴 후에도 이 자금의 혜택을 입게 되는 것이다. 이 시스템은 한마디로 대단히 포괄적이고 효율적인 케인즈주의의 변종이다. 이 시스템 덕택에 일본은 종신고용, 보편교육 및 보건, 기업복지, 회사에 대한 충성 등을 실현시키며 경제적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그 당시 많은 일본인들이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시스템은 경제성장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또한 공적 이익의 추구와 함께 사적 이익을 위한 조작이 끊임없이 행해졌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부패할 수밖에 없었다. 1990년대 들어 성장이 둔화되고 급기야 멈춰버리자 천문학적 액수의 국가부채가 쌓이고 각종 부패사건이 만연하게 된다.

한 비평가가 지적했듯이 이러한 토건국가 시스템은 많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목가적 자본주의(pastoral capitalism)'라고 할 만했다. 노력과 규율, 기술과 정성이 보상을 받고 사회적 연대가 고취된다는 점에서, 이는 노력과 보상이 서로 무관한 채 오로지 투기만이 판 치는 앵글로색슨계의'야수적 자본주의(wild capitalism)'와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그러나 이 시스템이 점차 신뢰를 잃어가고 있는 가운데 자민당 내부의 반대파들은 점차 스스로의 확신을 강화시켜 가고 있었다. 2001년 총리직에 오른 고이즈미는 우정공사 문제를 주요 쟁점으로 부각시킴으로써 1972년의 '잘못'(고이즈미의 생각에 따르면)을 바로 잡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1972년의 잘못이란 그의 정치적 스승인 대장성 관료 출신의 후쿠다 다케오와 다나카 가쿠에이 간의 권력투쟁, 이른바 '가쿠-후쿠 전쟁'에서 후쿠다가 패배한 것을 말한다. 2005년은 다나카 시스템 추종자들에 대한 고이즈미의 복수의 해였던 것이다.

반(反)관료적 정치의 승리라고 이야기되고 있는 이번 총선결과는 사실은 관료적 지배를 굳게 신봉하는 대장성의 승리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대장성은 고이즈미의 개혁과제에 포함되지 않은 정부부서일 뿐만 아니라 낙하산 인사와 이권개입의 핵심이기도 하다. 이번 총선에서 고이즈미의 압승은 일본 내 권력투쟁에서 그의 정치적 스승인 대장성 파벌의 권력회복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다나카적 국가가 내세웠던 분배 위주, 평등지향적인 원칙을 지지했던 이단자들을 자민당에서 축출함을 의미한다. 심지어 고이즈미는 무심코 스스로 일본 개혁의 필수과제라고 주장해 왔던 우정공사 민영화 법안을 읽어본 적조차 없다고 인정했다.

고 이즈미와 자민당이 우정공사 개혁에 모든 것을 건 데에 비하면 이번 총선에서는 우정공사 민영화에 대한 진지한 검증은 말할 것도 없고 이렇다 할 토론조차 없었다. 예컨대 벽지나 오지에 대한 우편배달의 질은 어떻게 될 것인가, 우편요금이 크게 오르거나 다른 문제점은 없을 것인가, 전 국민의 수십 년에 걸친 저축을 국제금융시장에 노출시켰을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한 토론이나 검증이 없었다. 물론 몇몇 사람들은 앞으로 우편배달이 계속 국영으로 남을 것인지, 민간기업이 담당할 것인지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일본 국민들의 피땀이 어린 우정공사 보유 현금자산의 안전성은 이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선거 기간 동안 고이즈미는 의도적으로 이 문제를 회피했고, 야당과 언론도 이 문제를 이슈화하지 못했다. 우정공사 민영화가 일본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라는 주장은 거의 현실성이 없는 것이다. 일본의 민간은행들은 현재 기업의 자금수요보다 훨씬 많은 자금을 보유하고 있으며, 기업의 자금수요도 사실상 미약하고, 주요 대기업들은 충분히 많은 현금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민영화된 금융기관이 무슨 이유로 이자가 0%에 가까운 국공채에 자신의 자금을 투자하겠는가(더욱이 이미 105조 엔 가량의 국공채를 보유하고 있는 마당에)? 하지만 우정공사가 국공채를 더 이상 사주지 않는다면 채권 가격이 급락하든가 아니면 이자율이 급등해 엄청난 피해를 초래할 것이다. 1987년 일본국철 민영화의 사례, 즉 모든 부실자산을 털어버리고도 민영화 이후 엄청난 규모의 부채가 계속 늘어가고 있는 사태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관련 링크(http://www.zmag.org/content/showarticle.cfm?ItemID=8958)
개번 매코맥/호주 국립대 교수

왕국

고이즈미의 연극무대를 떠나서 일반 시민들의 삶을 살펴보자. 신자유주의적 장밋빛 대본이 공연돼야 할 이곳에서도 모든 것이 결코 잘 굴러가고 있지는 않다. 고이즈미가 권좌에 앉아 있던 지난 4년 동안 경제는 위축됐으며(GDP가 2000년 510조 엔에서 2004년 506조 엔으로 감소), 국가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2001년 3월 540조 엔에서 2005년 3월 780조 엔으로. 기타 공공부채까지 합치면 1000조 엔이 넘는다), 노동자의 임금은 꾸준히 떨어지고 있다(봉급생활자의 소득이 2005년까지 7년째 계속 감소).

고이즈미는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작은 정부를 얘기하고, 공공부문의 과업을 민간부문으로 옮기며, 규제완화를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민간금융부문을 살리기 위해 엄청난 공적 자금을 쏟아붓고 있으며,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 고속철도, 댐, 공항,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공공투자사업을 계속하고 있다(도쿄-나고야 간의 새 고속도로를 만드는 데만도 5조 엔 이상이 투입되고 있다).

고이즈미가 열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구조조정'이란 실상은 많은 사람들에게 실직, 이미 취약해진 일본의 전통적 고용시스템의 형해화, 임금삭감, 사회복지 비용의 상승 및 복지혜택의 감소를 의미한다. 불안이 만연해 있으며 국민연금 시스템이 붕괴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젊은 여성들은 결혼을 회피하고, 이에 따라 출산율도 심각하게 감소하고 있다. 100만 가구 이상이 복지연금에 의존해 생존하고 있으며, 200만~300만 가구는 수입 또는 저축이 없는 채 살아가고 있다.

종신고용제는 사실상 사라졌다. 1995년부터 2004년에 이르는 10년 동안 제조업에서 40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이들 중 일부는 중국 등 외국으로 옮겨가 버렸고, 일부는 파견직과 시간제 등 비정규직으로 전환됐으며, 일부는 로봇에 의해 대체됐다. 이 10년 동안 비정규직(freeter)은 400만 명으로 2배가 늘었는데 10년 뒤인 2014년에는 1000만 명이 될 것으로 보이며, 특히 35세 이상의 노동인구 5명 중 1명이 비정규직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들은 사실상 일종의 '산업예비군'이다. 고용주는 이들의 건강이나 복지에 대해 아무런 신경도 쓸 필요가 없으며,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이들을 마음대로 이동시키고, 착취하고, 관계를 끊어버리고, 해고해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정규직에 비해 대략 절반의 임금을 받는데 일생 전체로 따지면 4분의 1에 불과하다. 새로운 빈곤층인 셈이다.

또다른 그룹으로 NEET(Not in Employment, Education, or Training)족이 있다. 이들은 15~34세의 인구 중 고용돼 있지 않고, 학교에 다니지도 않으며, 훈련도 받지 않고 있는 사람들로, 그 숫자가 무려 213만 명이나 된다. 일자리를 갖고 있는 사람들도 스트레스와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직업의 안정성이 떨어진 것은 물론 임금도 삭감되고 있으며 장래 연금을 제대로 받을 수 있을지, 세금 부담은 늘어나는 것은 아닌지 등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다. 공식적인 실업자 수는 313만 명으로 비교적 적은 편이나 이는 수치심 또는 절망감 때문에 실업자 등록을 하지 않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남성이 맡았던 전일제 정규직이 값싸고 불안정한 여성의 시간제 비정규직으로 대체되고 있으며 불완전한 고용형태가 늘어나고 있다. 반면 1주일 내내 하루 24시간 일하면서 불평하거나 힘들어 하지 않고, 졸거나 아프다고 하지도 않는 로봇의 사용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캐논사의 경우 오는 2007년까지 국내 생산라인의 4분의 1을 로봇으로 대체할 계획이다.

연간 2만2000명이던 자살자의 숫자가 1997년부터 3만 명 이상으로 급증하더니 그 뒤 이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2004년에는 자살자 수가 3만2000명(하루 90명)으로 미국의 2배였는데, 특히 중년 이상 남성의 경제적 이유에 의한 자살이 늘었다.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성공한' 자살 1건당 '실패한' 자살 5건이 있다는 사실이다. 자살미수까지 합치면 연간 2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자살을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최근 일본에서 지내다 보면 기차역이나 지하철역에서 너무도 자주 '인명 사고'에 관한 끔찍한 방송을 듣게 된다. 지난 1970~80년대에 회사에 대한 근로자들의 충성과 일체감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던 일본, 산업전사의 나라 일본이 이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가운데 회사에 대한 충성도가 가장 낮은 나라, 소득격차가 가장 큰 나라 중의 하나로 전락했다.

이번 총선에서 일본 유권자들이 가장 관심을 기울였던 문제는 우정공사 민영화가 아니었다. 유권자들의 관심사는 연금과 복지제도(52%), 경제와 고용(28%), 대외문제 및 국방(9%) 등의 순이었고 우정공사 민영화에 대한 관심은 단지 2%에 불과했다. 총선이 공고되기 전인 7월 6일 요미우리신문은 우정공사 민영화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 비율은 7%로 연금 및 복지에 대한 관심 비율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은 물론 17개의 국민적 관심사 중 16위에 랭크됐다고 보도했다. 우정민영화를 둘러싼 의회의 위기가 총선 소집으로 치닫고 고이즈미가 자신의 민영화 캠페인을 강화할 때쯤 돼서야 과반수를 약간 넘는 유권자들이 민영화를 지지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민영화 법안이 부결될 경우 조기총선을 실시하겠다는 그의 대담한 결정이 나오면서 고이즈미의 인기는 치솟았다.

일본의 복지예산은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에 속한다(GDP의 14.7%. 미국은 14.6%이며 OECD 평균은 24.2%). 더욱이 급속한 고령화와 출산율 저하의 상황에서 2007년경 베이비붐 세대의 대거 은퇴가 예상되고 있어 앞으로 복지예산은 현기증 나는 수준으로 팽창될 게 분명하다. 2004년 현재 평균 연령(median age)이 42.6세이고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19.5%에 달하는 일본은 OECD 국가들 가운데 이제껏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한 '초고령사회'로의 진입을 선도하는 국가다. 2004년의 복지예산 32조 엔은 이미 연간 조세수입(42조 엔)의 76%에 이르는데 이 예산이 2025년에는 2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앞으로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쳐 공적 서비스와 사회적 보호의 질을 떨어뜨림으로써 "국민들로 하여금 사회적 보호를 민간 금융기관이나 보험회사로부터 구매하도록 강요하게" 될 것이다. 이번 총선이 치러지기 1년 전에 자민당의 핵심 멤버를 비롯한 다수의 정치가들이 국민연금을 납부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났다. 따라서 이번 총선에서 고이즈미가 국민연금의 위기상황이 선거이슈화 되는 것을 애써 회피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할 것이다. 더구나 그 자신도 정체불명의 정치적 후원자가 그의 국민연금을 대납한(1970년 그가 의원에 당선되기 전의 일로, 고이즈미는 이 후원자에게 고용된 적이 전혀 없다) 사실에 대해 의회의 추궁을 받은 바가 있지 않은가. 당시 그는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사람이 있다. 온갖 종류의 회사도 있고, 온갖 종류의 피고용인도 있는 법"이라는 호탕한 말로 위기를 모면했다.

최근 일본에서는 1억 중산층의 소멸, 갈수록 심화되는 빈부의 양극화 등 일본사회의 변화를 분석하는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 2005년의 정치적 사변은 바로 이 뿌리 깊은 사회적 질병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제국

고이즈미의 왕국 너머에는 미국이라는 제국이 버티고 있다. 미국은 지난 수십 년간 일본에 대해 우정사업을 민영화하라고 압력을 넣어 왔으며, 이는 오랫동안 일본의 정책변경에 관한 미국의 최우선 과제 중 하나였다.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일본 엔화의 대규모 평가절상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대일 무역수지 적자가 줄기는커녕 계속 늘어가자 미국은 일본이 사회경제 체제의 '차이' 또는 폐쇄성에 의해 '불공정한' 이득을 얻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양국 간의 경쟁조건을 공평하게 만들기 위한 이른바 '구조적 장애 개선(Structural Impediment Initiative: SII)' 협상이 1989년에 시작됐다. 당시 일본정부는 이 용어가 일본 내의 문제에 미국이 일방적으로 간섭한다는 인상을 줄까 우려해 '장애(Impediment)'라는 말을 빼고 '구조협의(structural negotiation)'라고 번역했다. 두 번째 협상에서 미국은 자그마치 200개 이상의 개혁요구를 내놨다. 예산, 조세시스템, 기업의 출자에서 토요일에는 일하지 말라는 요구까지 그야말로 오만가지 요구였다. 이에 대해 당시 일본의 한 고위관리는 "(2차대전 후 맥아더의 점령에 이은) 미국의 제2 일본점령에 다름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미국의 일본시장 진입을 가로막는 '장애'를 제거하기 위한 협상은 이후에도 다양한 명칭 아래 여러 차례 시도됐다. 1993년 클린턴 대통령과 미야자와 총리 정부의 협상에 고이즈미는 우정통신상의 자격으로 적극 참여했다. 우정공사, 그리고 관료에 의해 규제되는 일본의 은행 및 금융 시스템은 일종의 무역장벽, 즉 '장애'이며 마땅히 해체돼야 한다는 미국정부의 견해는 당내 반대파를 공격해야 하는 고이즈미 개인의 정치적 목표와 맞아떨어졌다.

2001 년 6월 총리가 된 고이즈미는 부시 대통령과 함께 '미일 규제개혁 및 경쟁정책 개선'이라는 이름 하에 협상을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협상 대상분야는 숨이 막힐 정도로 광범위한 것이었다. "정보통신, IT, 에너지, 의료기기 및 제약, 금융서비스, 경쟁정책, 투명성, 법제개혁, 상법 개정 및 분배" 등 한마디로 거의 모든 분야가 망라돼 있었다. 고이즈미의 인기가 워싱턴에서 그토록 높은 것은 기꺼이, 모든 힘을 다해 일본을 아메리칸 스탠더드에 맞도록 변화시키겠다는 그의 열성을 미국측이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이즈미의 우정공사 민영화 법안은 미일 양국 정부 사이에 상당히 여러 번 논의됐다. 미국 무역대표부는 일본우정공사가 "오로지 시장원칙에 따라" 민영화돼야 하며, 일본 정부는 우정공사의 예금 및 생명보험에 일체 손을 대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고이즈미의 정책은 그러한 방향으로의 "중요한 일보"라는 평가를 받았다.

2004 년 2월 미 무역대표 로버트 죌릭(당시 국무부 부장관으로 내정된 상태였다)은 다케나카 일본 대장상에게 편지를 보내 미국은 8월 2일 일본 의회에 제출된 우정공사 민영화가 성사될 수 있도록 열과 성을 다해 돕겠다고 선언했다. 이 편지 중에는 죌릭이 자필로 쓴 쪽지도 포함돼 있었는데, 여기서 죌릭은 다케나카의 뛰어난 업무추진을 칭찬하면서 필요하다면 도움을 제공하겠노라고 밝혔다. 민감하고도 논쟁적인 일본 내부의 문제에 미국정부가 사실상 내정간섭이나 다름없는 태도로 관여하는 데 대해 비판 여론이 일자 고이즈미는 다케나카 대장상이 그토록 중요한 인물과 가까워졌으니 얼마나 좋은 일이냐고 답했다. 2004년 9월 뉴욕에서 부시가 이 문제를 거론하자 고이즈미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절대적 이행을 다짐한 것이나 다름없었고, 당연히 부시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고이즈미는 이미 막대한 액수의 미 국채를 사들임으로써 미국경제를 안정화시키는 데 엄청나게 기여했다. 우정공사 민영화는 이라크 침공을 비롯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들을 뒷받침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할 것이 분명하다. 부시 행정부로서는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개번 매코맥/호주 국립대 교수

개혁! 개혁!

이번 총선으로 고이즈미는 2차대전 때의 대정익찬회 이후로는 전례가 없는 의회 장악력을 갖게 됐다. 총선 참패 후 민주당의 새 지도자로 선출된 마에하라 세이지는 43세의 전직 변호사이자 이른바 안보전문가로, 위기에 빠진 당에 보다 인간적이고 '개혁적'인 모습을 덧씌우기 위해 애쓰고 있다. 예컨대 그는 안보와 개헌 문제에 관해서는 자민당 쪽 입장으로 기울고 있는 반면 조직노동세력과의 연계는 끊었다. 현재의 추세대로만 본다면 일본 의회는 앞으로 '고이즈미정권익찬회'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고이즈미 승리의 역설은, 그 승리가 진정한 정치사회개혁에 대한 지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 하락, 절망에 가까운 불안과 두려움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고이즈미는 단호한 지도자, 구원자의 이미지로써 대중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그는 문제의 해결사라기보다는 문제 그 자체의 중요한 일부이다. 그에 대한 지지는 무직 또는 반(半)실직 상태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특히 높은 것으로 보인다. 이들 젊은이들의 황량하고 쓸쓸한 세계에서 고이즈미는 '정말로 쌈빡한' 인물로 비쳐지고 있다. 그의 "개혁! 개혁!" 외침에 도취된 이들은 바로 그가 위기를 몰고 왔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으며, 개혁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이들은 고이즈미가 요술지팡이를 휘둘러 70년대의 그 안정적인 세계를 되돌려줄 것을 열망하고 있다. 고이즈미가 파괴해버리겠다고 다짐했던 것이 바로 그 세계와 그 세계의 확실함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말이다.

고이 즈미의 연극무대는 다층적인 환영(幻影)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그가 공천한 후보 중 30%가 2대, 3대째 세습정치인이고(고이즈미 자신이 3대째 세습정치인이다), 6명 중 1명은 전직 관료이며, 종교정당의 도움을 받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자민당은 개혁적이고 능동적이며 우상파괴적인 지도자가 이끄는 '새로운' 정치세력임을 자임하면서 자신들이 뿌리 깊은 '보수세력' 및 관료세력에 맞서 힘차게 싸우고 있다는 인상을 연출하고 있다. 한 비평가는 고이즈미의 '개혁'을 1930년대 관료와 정치가, 군부지도자들이 추구했던 '혁신'에 비유하면서, 당시 그들은 근본적인 변화를 약속했으나 그 결과는 파시즘과 전쟁이었다고 지적했다.

지난 1980년대 나카소네 총리는 자신의 야스쿠니 참배가 이웃나라들의 반발을 초래하고 일본 국익에 해가 될 것이 분명해지자 참배를 중단했다. 반면 고이즈미는 이같은 나카소네의 결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중국과 동아시아 지역에 대해 명확히 "노"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번 총선에서 100명 이상의 의원들이 낙선이라는 정치적 희생을 무릅쓰고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참배를 지지했다. 새 의회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화될 것 같다.

이번 선거에서 고이즈미가 참신함과 매력을 발휘한 것은 그가 여성 정치인을 중시한다는 인상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총선 이전 일본 의회에서 여성 의원의 비율은 7%에 불과했으며 이는 세계 101위 수준이다. 자민당 정치인들은 망언을 밥 먹듯이 하는데, 예컨대 집단강간은 남성의 정력이 좋아서 일어난다거나 "정상에 가까운 행위"라고 두둔한다. 하지만 이러한 발언을 고이즈미가 문제 삼았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자민당은 이번 총선에서 야당인 민주당보다도 훨씬 적은 여성 후보를 냈으며(346명 중 26명), 여성 지위향상에 대한 아무런 정책도 없고, 오히려 양성 평등을 규정한 헌법 24조의 개정을 다짐하고 있다. 이번 총선을 통해 의회에 진출한 여성자객("립스틱을 바른 닌자")들이 이같은 자민당의 남성지배적 구조를 변화시킬 것 같지는 않다.

사실 일본에 가장 중요한 이슈들은 이번 총선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생태 위기, 외교적 고립, 만성적 부채, 인구 감소 및 노령화, '일본적' 고용시스템의 포기, 늘어나는 소년 범죄, 늘어나는 자살, 심각한 사회적 비관주의가 그것들이다. 고이즈미의 '개혁' 처방은 민영화, 탈규제, 미국에의 의존 심화(자위대의 이라크 파견 등), 애국심 및 국가적 자존심의 강조, 헌법 개정, 교육기본법 제정, 케인즈주의적인 토건국가와 소득재분배적이며 평등지향적인 사회 대신 하이예크적이며 신자유주의적인 미국적 사회의 도입을 꿈꾼다.

한때 폭 넓은 합의기반을 가졌던 자민당은 이제 고이즈미 지도 하에 탈규제와 합리화, 구조조정의 도그마에 빠진, 일체의 이견이나 비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종의 근본주의적 도당으로 변질됐다. 고이즈미는 부자와 기업에 대한 세금을 감면하고 (복지, 교육 등) 공공부문에 대한 투자를 삭감했지만,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국가재정의 위기 상황을 감안하면 그가 총리직을 내놓는 순간 (일반 서민들의) 소비세가 상당히 늘어날 것은 불가피하다.

고이즈미는 새로움과 개혁을 얘기하면서 자민당을 당내의 반동적 극우파가 오랫동안 꿈꿔 왔던 지경으로까지 몰고 왔다. "당내 파벌을 없애겠다"든가 "자민당을 깨버리겠다"는 고이즈미의 발언이 의미하는 바는 다른 파벌들을 제거하겠다는 것, 자민당의 정치기제에서 다나카 가쿠에이의 망령을 추방하겠다는 것이다. 그가 '조쿠(族)', 즉 특정 산업(예컨대 농업, 통신, 건설 등)과 유착한 정치인들의 영향력을 제거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성과라는 것도 자민당 전체를 일본 재계의 사상 유례 없는 영향력 아래 굴복시키는 희생을 치르고서 얻은 것이다. 그리고 일본 재계는 한 목소리로 고이즈미의 신자유주의적 '개혁' 아젠다를 지지하고 있다. 과거의 자민당 지도자들이 의회정치의 현실, 또는 당내 파벌 간의 세력균형 때문에 감히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고이즈미는 아무 거침없이 밀어붙이고 있다. 고이즈미야말로 가장 '자민당적인' 총리인지도 모른다.

고이즈미의 신자유주의적 열정이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고 있는 동안 자민당 내의 '배신자들', <이코노미스트>가 총선 직전 "당내의 막가파식 반(反)개혁파"에 속하는 "이단자들"이라고 지칭했던 정치인들은 사회 및 정치에 대한 '감상적인' 견해를 고집하고 있으며, "복지국가 건설이 성공적으로 완수되도록" 노력하겠다는 1955년 자민당 창당 강령을 아직도 신봉하고 있다. 사실 1973년 노인에 대한 무료건강보험과 은퇴자에 대한 60% 연금 지급(이 비율은 2004년의 '연금혁명'에 의해 처음 50%로 삭감됐다)을 도입한 것은 다나카였다. 가메이 시즈카 전 자민당 정조회장 등 이른바 '이단자들'은 정치란 약자를 돌보는 것이며, 부의 창조 못지않게 재분배도 중요하고, 고이즈미의 "무자비한(그 자신의 표현이다)" 근대화와 함께 사회적 안전망도 제공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이들 '이단자들'은 또한 평화와 안보 문제와 관련해 기존 평화헌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입장이며, 고이즈미의 자위대 이라크 파병을 절대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자신에게 보내진 자객 후보, 인터넷 백만장자인 호리에 다카후미를 물리친 후 가메이는 고이즈미의 승리는 거품에 불과하며 이번 선거로 일본은 파멸의 길에 들어섰다고 주장하면서 이번 선거에서의 고이즈미에 대한 찬반은 일본의 대미 예속, 그리고 일본 내 소외계층의 방치에 대한 찬반투표였다고 지적했다. 이번 총선에서 고이즈미의 선거운동은 가메이와 같은 우정공사 민영화 반대론자들을 썩어빠진 이익단체들을 두둔하는 반동적 정치인, 사실상의 배신자로 낙인찍는 데 기가 막힐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냉전기간 내내 미국의 지원과 사주에 의해 일본의 시민사회, 즉 노동조합, 시민운동, 학생운동 등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무력화된 것도 고이즈미의 성공을 도왔다. 언론에 대해서 말하자면, 인쇄매체가 고이즈미에 대해 회의적 내지는 노골적인 반감을 표시한 반면 방송 등 전자매체는 고이즈미의 연극에 철저히 놀아났다.

아마도 고이즈미의 정치적 입장 중 그의 민족주의적 자세와 워싱턴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종처럼 모순적인 것도 없을 것이다. 그는 일본을 '극동의 영국'으로 만들기를 열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을 신자유주의의 전범으로 재창조하려는 미국의 의도에 열성적으로 협조하고 있다. 후자의 사명은 2차대전 직후 일본을 평화애호적 민주국가로 재창조하려는 맥아더 장군의 야망만큼이나 원대한 것이다.

예전에 미국 관리들이 뻔질나게 도쿄를 들락거리면서 제국주의적 정책을 강요했을 때는 관료, 나아가 일부 야당 정치인들까지 민족주의적 이유로 이에 저항했지만, 고이즈미 정권에서는 이라크 파병과 개헌, 우정공사 민영화와 미국 쇠고기 수입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사람들이 '국익을 아는' 사람들로 대접받고 있다.

고이즈미 자신은 이러한 친미적 행동에 대해 대가를 요구한 적이 거의 없다. 부시 대통령에게 북한 지도자 김정일을 만나보라고 권고한 것과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한 미국의 도움을 요청한 것 등 2차례 대가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전자의 경우 고이즈미는 부시의 '싸늘한 침묵'에 부딪혔고, 후자의 경우에는 미국 쇠고기에 대한 수입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지겨운 강의를 들어야 했다.

최근 일본의 정치에서 '개혁'이 좌절되고, 조작되고, 거부되면 될수록 '개혁'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1980년대 말에 시작된 '개혁'의 물결은 리크루트 사건을 비롯한 자민당의 잇단 스캔들에 의해 유권자들에게 분노와 역겨움만을 안겨주었으며, 1994년의 선거제도 개혁이라는 결코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만을 낳았을 뿐이다. '개혁'은 이제 부패는 전혀 없애지 못하면서, 사회민주당 및 공산당 등 야당 진영을 소외시키고, 마치 단일한 보수 정당의 양대 파벌로 이루어진 것과 같은 양당 시스템의 환영을 만들어냄으로써, 나아가 두 파벌(또는 정당) 모두 미국의 안보협력 '요구'를 받아들여야 하고, 개헌을 통해 자위대를 정규군화 해야 하며, 신자유주의적인 사회경제정책을 시행해야 한다는 데 완벽한 의견 일치를 봄으로써 개혁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좌절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0월 14일 일본 참의원은 지난 8월 8일 125 대 108으로 부결시켰던 우정공사민영화법안을 134대 100으로 통과시켰다. 8월 당시 법안에 반대했던 의원들 중, 목숨을 걸고 반대하겠다고 다짐했던 일부 의원들을 포함하여, 단 한 의원을 빼놓고는 모두가 찬성으로 돌아섰다. 이들은 이제 당 지도부 앞에 자신의 목을 내밀고 그저 관대한 처분만을, 가능한 한 이른 시일 내의 복권을 간청하고 있다. 이처럼 참의원이 유순해지면서 이제 고이즈미의 개혁드라이브에 대한 참의원의 저항은 기대할 수 없게 됐다. 앞으로 일본에서는 일본의 재계 엘리트와 미국 정부가 그토록 오랫동안 요구해 왔던 대규모의 제도적 '개혁'이 거침없이 시도될 것이다.

' 고이즈미의 아이들'이 한데 모여 3기 고이즈미 정부의 출범을 축하하던 날, 자민당의 원로 정치인 고토다 마사하루가 9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970-80년대 일본 정부의 핵심인물이었던 고토다는 그 뒤 원로 정치인으로 추앙을 받았고, 오랫동안 고이즈미와는 거리를 두어 왔으며, 자위대의 이라크 파견이나 개헌, 우정공사 민영화 등에 반대했다. 1994년 그는 일본을 미국의 '속국(vassal state)'이라고 지칭했으며 죽기 수 개월 전에는 일본이 '지옥'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고 개탄했다. 실제로 그러한 상황이 벌어진 다음에야 일본 국민들의 눈이 뜨여질 것이라는 슬픈 예언을 한 것이다.

<번역: 박인규>
개번 매코맥/호주 국립대 교수

Posted by 중년하플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