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 범위 내에서 나름대로의 영향권을 사수·확장하려는 포석
한국으로선 미국의 대북 도발을 방지하고 ‘균형자론’을 실천할 기회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2005년 8월 산둥반도에서 진행된 중-러 합동 군사훈련은 한국의 친미적 보수 세력들에게 새로운 ‘위협론’을 거론할 자료를 제공했다. ‘북한의 적화전략’은 더 이상 먹혀들기 어렵지만 서방쪽 언론들이 느슨한 반미 동맹으로까지 부르는 중-러의 새로운 군사 협력 관계를 100년 전의 동북아 패권 각축전의 재판이라고 홍보하면 ‘안보 태세, 한-미 동맹 강화’를 주장하기 쉽기에 보수 매체에서 대서특필됐다. ‘동북아에서의 새로운 중화 체제 부상’을 미국의 헤게모니에 대한 도전으로 보는 미국의 매파들도 100년 전의 ‘황화론’을 연상케 하는 ‘중국 때리기’에 나섰다. 중·소의 지원 때문에 미 제국이 상처받았던 북한·베트남과의 전쟁의 기억이 지금까지 아물지 않은 탓인가?
두나라가 미국에 도전할 확률은 적어
‘위협론’들이 신문 팔아주기·안보예산 따먹기에는 좋지만 중-러 반미 동맹이 이루어진다 해도 중-러가 가까운 미래에 적극적으로 대미 도전에 나설 가능성은 없다. 중국이 경제 규모로 30년 이후에 미국을 능가할 개연성은 있지만 과거 한국의 고속 성장 이상으로 외자 도입·수출에 의존하는 중국의 성장은 박정희 시대의 한국이 지녔던 한계를 그대로 지니고 있다. 외자 기업들이 중국 수출량의 48%를 담당하고 있고 세계 체제 핵심부 국가들의 시장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수출 부문이 전체 경제의 35%에 달하는 상황에서 중국이 자본을 대주고 물건을 사주는 선진권에 대한 도발을 할 수 있겠는가?
만에 하나 미 달러의 값이 갑자기 폭락해 미 시장에서 중국 상품의 경쟁력이 떨어진다면 그나마 10%에 가까운 성장률로 서민들을 달랬던 중국 정권은 사회적 ‘폭발’에 직면할 수도 있다. 국영기업들이 1년간 서방 금융시장에서 150억달러 정도를 차용하는 등 핵심부에 대한 금융 종속이 강화돼가는 러시아도 ‘위협’이 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이라크 침공을 반대해도 석유 판매로 벌어들인 돈을 모아낸 경제 안정화 기금을 주로 미국 금융시장에 투자한 관계로 역시 미국의 완패를 바랄 수 없다”는 이라크 침략 초기 푸틴 정권 관계자의 발언은 오늘날 세계 체제에서 러시아의 행동 양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지난 8월의 중-러 합동 훈련에 동원된 중국 병사들. 이번 군사훈련은 11년 전 미국이 옌볜 핵시설을 폭격하려 했던 대북 도발에 러시아가 보인 무기력한 반응과는 너무도 달랐다. (사진/ 연합)
그러나 중-러가 가까운 시일 내에 적극적 도전세력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최근의 행보가 과거와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번 군사훈련은 북한에 대한 미국의 침략을 중-러 군사 협력 과시를 통해 경계하려는 뜻도 내보인다. 옌볜 핵시설의 폭격에 이를 뻔한 11년 전 미국의 대북 도발에 러시아가 보인 무기력한 반응과는 천양지차다. 거기다 미국의 폭격 목표물이 될지 모를 이란과 러시아의 지속적 핵개발 협력과 이란 유전에의 중국의 수백억달러의 투자, 반미 노선의 상징인 베네수엘라에의 러시아 무기 판매와 중국의 유전개발 투자 등 일련의 행동을 본다면 과거에 비해 훨씬 더 독립적인 대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것을 장기적 차원에서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중-러 블록과 미-일 블록 사이의 균형 외교를 통해 실리를 취해야 할 한국으로서는 보통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거시적으로 본다면 자본주의 세계의 후발주자가 세계 체제 속에서 신분 상승을 도모하는 방도는 두 가지다. 하나는 과거 중-소가 대표했던 국가 관료 자본주의라는 세계 체제에서의 ‘조건부 탈주’와 자력 개발의 시도이고, 또 하나는 남한이나 1930년대 초기까지와 패전 이후의 일본이 대표했던 세계 체제 내에서의 ‘줄서기’, 즉 패권국가를 ‘후견인’으로 삼아 그 자본·시장에 편승하는 길이다. 우리는 전자를 ‘사회주의’라고 배웠지만 실제로 그 허구성에서 스탈린식 군사주의·관료주의적 국민국가의 ‘사회주의’는 독재정권하의 남한이나 1945년 이전 일본의 ‘민주주의’와 매한가지였다.
다만 ‘사회주의’를 간판으로 내건 지배계급은 일정 수준의 복지정책을 펴서 대중의 혁명적 에너지를 체제 순응적 방향으로 순치할 수 있었고, 성장해가는 경제에서 피지배민들에게 신분 상승의 기회를 줄 수 있었다. 사이비 ‘사회주의’ 동원 체제의 상징적 인물들인 스탈린과 마오쩌둥이 각각 러시아와 중국의 상당수 피지배민들에게 향수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 맥락에서다. 왜냐하면 1980년대 후반 이루어진 국가 관료 자본주의 모델의 포기와 개방형 ‘줄서기’ 모델의 채택은 국제 갑부 대열에 합류한 지배자들에게 덕이 되어도 대다수의 피지배민들에게 독이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행동능력이 약해진 틈을 타…
냉전 시절에 자본주의 체제 외곽을 지키는 ‘번견’(番犬)을 자처한 한국과 일본에 국내 시장 개방 압박의 유예와 같은 미국쪽의 특혜들이 주어진 것과는 달리, 세계 체제가 중심부 재벌들의 자원·시장 독식의 체제인 신자유주의로 재편되는 시절에 합류한 중-러는 별다른 혜택을 받지 못했다. 미국은 자원 공급자로서의 러시아, 저가 소비재의 공급자로서의 중국을 받아들일 수 있다 해도 경쟁자로서의 중-러 대기업의 국제적 활약이나 미국 재벌의 유라시아 자원 이용에 방해물이 되는 중-러의 독립적인 지역적 세력권 형성을 용납하지 않았다. 중국 대사관까지 폐허로 만든 1999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세르비아 폭격부터의 미국쪽의 일련의 행동, 특히 중앙아시아에 미군 기지 설치, 우크라이나와 그루지야 친미 정권의 집권 추진, 미-일 안보동맹 강화, 일본의 군사대국화 방조 등은 중-러를 포위·고립시키려는 정책적 성격이 강했다. 거기에다 중-러 지배자들에게는 피지배민들에 대한 국가 관료 자본주의 시절의 복지정책이 거의 철회된 상태에서 대외위기론에 입각한 애국주의 이외에 사회통합 이데올로기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2003년 이후 이라크 독립운동과의 전망 없는 싸움에 빠진 미국이 다른 방면에서 행동 능력이 약해진 점을 이용해 중-러가 획기적인 행동에 나섰다.
△지난 2004년 6월 산둥반도 칭다오 앞바다에서 진행된 중-영 공동 통신·구호 해군 훈련. 중국은 영국과의 관계 강화에도 노력하고 있다. (사진/ AP연합)
그들의 궁극적 목표는 신자유주의적 범위 내에서 중-러 지배층의 독식이 가능한 나름의 영향권을 편성·사수·확장하는 것이다. 예컨대 우크라이나·그루지야를 잃은 러시아는 벨로루시·투르크메니스탄과 같은 위성 정권을 사수하면서, 안디잔의 민중을 학살한 우즈베키스탄의 지배세력에게 전반적 지지를 보낸 결과 우즈베키스탄에서 미국 기지 철수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중국은 북한·버마·라오스 등 서방쪽과 관계가 불편한 주변 국가들의 경제권을 석권하는 동시에 칠레의 대중 수출이 대미 수출을 능가하게 하는 등 미 영향력이 약화돼가는 남미의 ‘공백’ 상황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독자적 영향권 형성 과정에서 중-러 둘 다 미국의 포위 정책에 맞서고 있기에 대미 방어적 의미의 군사 동반자 관계를 구축해나간다. 이와 같은 느슨한 형태의 반미 방어 동맹은 미국의 대북 도발 가능성을 방지하는 측면이 있기에 한국으로서는 ‘위협’이기보다는 오히려 ‘균형자론’을 잘 실천할 수 있는 ‘기회’에 가깝다.
중국과 러시아에 혁명이 벌어진다면…
그런데 독자적 영향권 형성과 미국과의 제한적 대결 과정에서 분출될 수밖에 없는 애국주의적 에너지가 과연 지난 15년 동안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버린 중-러 피지배층의 불만을 흡수해 체제 옹립적인 방향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까? 대독 전쟁(러시아)과 항일 전쟁(중국)에 대한 대중적 기억을 재생시켜 그 동력을 관제 애국주의의 뒷받침으로 삼는 중-러의 지배 이념구조는 취약한 것은 아니지만, 무상 의료와 교육의 혜택이 계속 박탈돼가고 무자비한 경쟁의 논리에 노출되는 현실에서, 중-러 민중의 계급의식의 형성을 애국주의적 세뇌로 다 봉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일쪽의 대대적 도발로 중-러가 강도 높은 동원 체제로 재편된다면 모를까, ‘평화로운’ 성장이 앞으로 10~15년 동안 지속된다면 중-러의 지배층은 당연히 피지배민의 재분배 요구에 직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이 1987~88년의 한국 지배자들이 그러했듯이 ‘제도적 민주화’와 일부 숙련 남성 노동자에 대한 포섭 정책으로 그 요구를 부분적으로 무마해 체제를 안정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만일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혁명의 화염이 중-러를 다시 덮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두 나라가 세계 체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한다면 그 혁명은 커다란 세계사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참고 사이트
1. 중국 군사력에 대한 종합 분석: http://www.comw.org/cmp/index.html
2. 제임스톤 재단·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이 대개 참고자료로 삼는 중-러에 대한 분석적 글들의 모음: http://www.jamestown.org/publications.php
3. ‘초점: 대외정책’ - 대중, 대러 분석으로 유명한 민주당쪽에 가까운 미국의 정책 연구소: http://www.fpif.org/index.htm
4. 중국의 핵무기, 북핵 문제에 대한 차분하고 알찬 글들을 싣는 ‘핵 과학자 소식지’: http://www.thebulletin.org/index.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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