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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야기들

[한겨레21] 다니엘 헤니의 인터뷰

by 중년하플링 2005. 12. 23.
전쟁은 ‘젠틀’하지 않아요

2005년 대한민국 남자와 여자들을 사로잡은 매력남 다니엘 헤니를 만나다
“올 한 해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 탱크에 쓸 돈 지진피해 복구에 썼으면”

<한겨레21>은 2005년을 보내며 ‘올해의 남자’로 배우 겸 모델 대니얼 헤니를 선정했다. 대중의 욕구에 부응하는 남성성은 미디어 속에서 끊임없이 만들어졌지만, 대중의 욕구를 일깨운 남성성의 등장은 주목할 만한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인기리에 방영됐던 문화방송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사려 깊고 다정한 헨리 킴 역을 맡으며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앞에 나타난 그는 대한민국 사회의 남성성, 혹은 남성적인 기존 질서를 순식간에 무장해제시켰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그에게 끌리는 이유는 잘생기고 영어 잘하는 백인 혼혈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능력 있되 전능하지 않고, 배려하되 지배하지 않고, 존중하되 의존하지 않는 남성성을 지녔다. 트렌드란 이름으로 건너뛰던 대한민국의 남성성은 그의 등장과 함께 ‘진화’했다. 그 결과 ‘내실 있는 경쟁 체제’를 갖추게 됐다. 남성성의 조건으로 꼽혀온 돈, 능력, 외모, 성격, 학벌, 집안 같은 ‘자원’에 안주했다가는 이제 어떤 남자도 온전하게 사랑받을 수 없게 됐다. 많은 여성들이 그 덕분에 행복했고, 적잖은 남성들이 편협한 성역할의 틀을 넘어서는 계기를 얻었다. 올 한 해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 이상을 행복하게 해준 남자, 대니얼 헤니를 만났다. 편집자

▣ 글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대니얼 헤니(26)를 만나기로 한 날인 12월12일 오전, 그의 매니저인 정원석씨가 시간과 장소를 정하느라 전화를 걸어왔다. 저녁에 서울 강남 청담동 쪽에서 보는 게 좋겠다고 했다. 무심코 “그 동네를 잘 모르니 편한 곳으로 정해보시라”고 했다. 그럼 언제 어디가 편하냐고 묻기에 “사실 오늘 부서 송년회가 있어서 너무 늦지는 않았으면 좋겠고, 평소에는 회사 근처 마포나 홍대 쪽이 편하긴 하다”고 했다. 매니저는 의논해보고 다시 연락하겠다고 하더니 2시간 뒤 “(대니얼이) 원래 메이크업은 안 하지만 하루 종일 모자를 쓰고 다녀 머리를 만질 시간이 없는데 (그런 몰골을) 양해해준다면 홍대 쪽으로 가겠다”고 전해왔다. ‘젠틀’하리라 짐작은 했지만 정녕 그가 <한겨레21> 송년회 장소인 홍대 근처 꼬불꼬불한 골목 안, 테이블 예닐곱 개의 작은 카페에 나타날 줄은 몰랐다. 베이지색 비니를 눌러쓴 대니얼은 청바지에 흰 면티를 받쳐입고, 평범한 검은 재킷 위에 목도리를 두른 채 들어섰다. 그는 카페라테를 주문했다. 한국말은 기본적인 것을 알아듣는 정도로만 늘었다고 했다. 기자의 짧은 영어에 그는 쉽고 반복적이고 큰 목소리의 영어로 답했다. 커피잔이 녹음기를 가리지 않게 위치를 바꿨고, 인터뷰 직후엔 직접 녹음기를 끄며 칭찬받고 싶은 아이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는 생각보다 ‘여성스럽지’는 않았고, 생각 밖으로 정치·사회·국제적 이슈에 민감했다. 덕분에 인터뷰는 꽤 ‘헤비’한 얘기로 시작했다.


미국은 정치적으로 매우 심란

올 한 해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였나?

=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이었다. 올 초 한국에 왔을 때에는 대단히 조심스러웠다. 말도 잘 안 통하고, 내가 혼혈인 것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염려되기도 했다. 심리적인 면을 말하자면, 사실 여전히 지금 내가 있는 자리가 실감이 안 난다. 언론이 인터뷰하는 사람이 됐다는 것도 낯설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세상에, 대체 내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한다. 정치적으로 볼 때 올 한 해는, 솔직히, 미국에서 일어난 일들이 걱정됐다. 루이지애나 대홍수는 충격이었고 미국 정부의 대처도 적절치 않았다. 이라크 전쟁의 경우… 나는 더 이상 전쟁을 믿지 않는다. 군인들의 노고는 존경하지만, 전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보지 않는다. 게다가 그 엄청난 달러라니. 탱크와 비행기와 미사일에 쓴 돈을 대홍수나 대지진 피해 복구 같은 데 썼다면 훨씬 유용했을 것이다. 나는 이라크 전쟁이 제2의 베트남전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자꾸 그렇게 되는 듯해 두렵다.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당신은 광고에서 0순위로 알고 있는데, 경제적으로는 어땠나?

=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은 아닐 거다. 솔직히 말해 뉴욕에서 지낼 때까지만 해도 나는 돈을 그리 잘 벌지는 못했다. 그래서 돈 없이 지내는 데 익숙하다. 내가 엄청난 부자라면 모르지만 막 얘기할 정도는 아니다. 어떤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지만, 큰돈을 버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돈을 갖고 올바른 일을 하는 것이다.

올 한 해 당신에게 개인적으로 가장 기뻤던 일과 끔찍했던 일은?

= 홍콩에 사는 친구가 암으로 오랫동안 투병했는데 지난 8월 세상을 떠났다. 모델로 활동하면서 만났던, 사람들에게 아주 친절하던 멋진 친구였다. 부음을 듣고 장례식을 도우러 갔는데 그 많던 친구들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죽음과 그 뒤의 일들이 안타까웠다. 기뻤던 것은… 한국에서 지낸 모든 경험이 좋았다. <내 이름은 김삼순> 이후 굉장히 많은 팬이 생겼다.

당신이 주목했던 올해의 이슈는?

= 문화방송 에서 파키스탄 대지진을 보고 많이 괴로웠다. 그 많은 사람들이, 여성들과 아이들이 죽어가는데 우리는 무력했다. 종교·인종 분쟁, 극단적인 폭력, 자연의 역습 같은 것들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한국 내의 이슈에 대해서는… 음, 난 솔직히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는 않다. (웃음) 최근에는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연구 논란이 아주 흥미로웠다. 여러 추측은 있지만, 진실을 좀더 많이 알고 싶다. 내가 아직 말이 짧아 한국 뉴스를 꼼꼼히 들여다보지 못한다. 미국 상황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올해 정치적으로 미국은 매우 심란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젊은이들이 투표를 많이 해서 상황을 바꿨으면 좋겠다.

어릴 땐 뚱보, 농구 잘해서 킹카

여성들이 당신을 좋아하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왜 남성들도 당신을 좋아할까?

= 안 그랬다면 여자친구들이 죽이려 들까봐? (웃음) 나는 남자다. 그것도 평범한 남자다. 얼굴은 알려졌지만, 차림새를 봐도 알 수 있듯이, 티셔츠와 청바지 입고 다니는 게 좋다. 머리를 만지고 옷을 잘 차려입고 사람들 접근이 막히는 스타처럼 지내지는 않는다. 나에게 익숙지 않은 일이다. 남자들은 내게 다가와 농구 얘기를 한다. 혹시 그들이 날 미워하지 않는다면 농구 때문이 아닐까? (옆에서 잠깐 그의 매니저가 “싫어하는 사람이 왜 없겠나. 하지만 대니얼은 누가 자기를 싫어한대도 안 믿는다. 대단히 낙천적인 성격이다”고 말했다.)


△그는 생각보다 여성스럽지 않았고 생각 밖으로 정치·사회·국제적 이슈에 민감했다.

그는 미국 미시간주 작은 시골마을에서 영국계 아버지와 한국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1958년 두 살 때 ‘황해즐’이라는 이름과 사진 한 장만 지닌 채 부산의 이사벨라 고아원에서 미국으로 입양됐다. 대니얼의 표현에 따르면 아버지는 “전형적인 블루칼라” 기계공으로 일했고, 어머니는 간호사다. 그의 어머니는 지난 여름 45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지만 간호사 일 때문에 보름 남짓만 머물렀다. 혹시나 한국의 가족을 수소문했지만 찾지 못했다. 그는 열두 살 전까지는 먹는 걸 밝히는 ‘뚱보’였고, 청소년기에 농구를 하며 친구들이 많이 생겼다고 한다. 백인들이 주로 거주했던 동네라 ‘다른 얼굴’ 때문에 놀림을 받고 상처가 될 만한 차별을 겪기도 했지만, 농구를 잘해 고교 시절에는 학교 ‘킹카’가 될 수 있었다. 시카고 일리노이대(경영학 전공, 연극 부전공) 시절 “가난했고, 공부를 마치기 위해 돈이 필요하던 차에” 우연히 모델 지망생인 친구를 에이전시에 데려다주고 주차장에서 기다리다가 더 큰 에이전시 관계자에게 발탁됐다. 2001년이다. 덕분에 학교를 마치고 뉴욕, 밀라노, 파리, 홍콩 등지에서 모델활동을 했다. 지금 그의 매니저가 속한 회사도 연예인 매니지먼트사가 아니라 모델 에이전시다. 대니얼의 성향도 “시시콜콜 관리되고 통제되고 만들어지는 매니지먼트 시스템에 맞지 않는다”고 한다.

뉴욕과 유럽, 홍콩 등지에서의 활동과 한국에서의 활동에서 큰 차이를 느끼는지.

= 아주 큰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는 엄청난 환대를 받았다. 한국은 다른 나라에 견줘 대중문화의 수준이 높다. 영화, 드라마, 광고 수준도 아주 높다. 또 아주 빠르다. 잡지 촬영을 하면 불과 이주일 뒤에 나오고 방송 인터뷰는 바로 그날 나오고. 광고 일도 그렇고. 그게 좀 스트레스를 주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에서는 일하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진짜로 친절했다. 드라마 할 때도, 광고 일 할 때도 모두들 어떻게든 나를 도와주려고 했다. 언어 문제 탓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인 것 같다. 내가 코리안이라서 그런 거 같다.

당신이 경험한 한국 사람들의 특징을 꼽자면?

= 음… 워커홀릭들이다. 일을 너무들 많이 한다. 전날 자정까지 일하고 다음날 또 일찍 일어나고. 잠도 거의 안 잔다. 또 다른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서로 존중한다는 걸 느꼈다. 논쟁하고 싸울 때에도 존중하는 것 같다. 존댓말 문화 덕분인가.

때론 존댓말 문화가 엉뚱한 위계를 만들기도 한다.

= 나이 든 사람이 무조건 옳다는 태도 같은 거. 나도 안다.

다르다는 것은 때로는 힘!

혼혈이라는 특징은 어떤 이익과 불편을 주나?

= 한국에서? (잠깐 자세를 고쳐 앉으며) 다르다는 것은 때론 힘이 된다. 다르다는 경험은 그것이 상처라 할지라도 큰 깨달음을 준다. 한국에도 혼혈인들이 많은데, 그건 잘못된 것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된 결과일 뿐이다. 내가 혼혈이라서 혼혈 어린이들에게 용기를 주는 역할을 할 수 있어 좋다. 꿈을 갖는다면 그걸 언젠가는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할 기회를 얻는 것도, 차별적인 시각과 태도도 깨뜨리는 데 일조할 수 있다는 것도 좋다. 내 성장기를 떠올리면 가장 큰 보람이다. 불편한 것은 아직 없다. 아직까지는.

당신을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것은?

= 엄마와 통화할 때. 일주일에 1∼2번 통화하는데 제일 행복하다. 그리고 음악 들을 때(그는 학창시절 록밴드 활동을 하기도 했다. 노래 실력은 “테러블하다”고 했다). 일을 잘 끝냈을 때도, 결과가 좋을 때에도 행복하다.

살면서 마음이 바닥을 쳤던 적이 있나? 깊은 절망이나 좌절 같은.

= 있다. 열아홉, 스무 살 무렵까지 내겐 농구가 세상의 전부였다. 매일 서너 시간 이상 미친 듯이 농구만 했다. 농구를 잘해 시골을 벗어나 도시의 대학에 가는 게 간절한 꿈이었다. 그런데 내 시골 마을 주변 사람들은 거의 모두 “넌 안 돼. 할 수 없어”라고 말했다. 용기를 준 분은 부모님밖에 없었다. 기회가 닿아 농구 장학생으로 대학에 가게 됐다. 그런데 잘 안 풀렸다. 첫 번째 코치는 나쁜 사람이었다. 그는 나를 혐오했고 나도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학교를 옮겨 만난 두 번째 코치는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썩 유능한 코치는 아니었다. 세 번째로 학교를 옮겨야 했다. 그곳에서, 딱 한 경기가 나를 바꿨다. 시즌의 마지막 경기였는데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 한 경기로 모든 게 끝났다. 농구도 끝났다. 나는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아니었다. 그리 잘하지 못했다. 마지막 경기에서도 불과 5분을 뛰었던 것 같다. 그나마도 잘하지 못했다. 당혹스러웠다. 어머니가 그 경기를 보셨는데, 내게 다가와 “얘야,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는구나” 하셨다. 나는 순간적으로 무너져내리듯 엉엉 울었다. 세상이 다 끝난 것 같았다. 농구를 더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모든 꿈과 희망이 부스러져 사라졌다. 막막했다. 학교를 마치기 위해 시카고(일리노이대)로 가야 했다. 농구를 계속할 실력이 안 됐던 것, 내가 겪은 가장 큰 좌절이었다.

어떻게 극복했나?

= 시간. (잠깐 호흡을 가다듬은 뒤) 난 더 이상 경기를 하지 않지만, 여전히 농구를 사랑한다. 시간은 이제 털고 일어날 때가 왔다는 것도,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도 알려준다.


△그는 "혼혈이라서 혼혈 어린이에게 용기를 줄 수 있어 좋다"고 말한다. 지난 7월26일 '혼혈아동 희망 나누기! 펄벅 여름 캠프'에 참여한 대니얼 헤니. (사진/ 한겨레 김진수 기자)

그는 미국 뉴욕의 디나극단에서 연기수업을 받았고, 오프 브로드웨이 무대에도 종종 섰다. 모델로 활동할 때 주 거처는 뉴욕이었다. 지난 가을 그는 뉴욕의 거처를 친구한테 넘기며 정리했다. 한국에서 오래 살 집을 구하고 있다. 지금 살고 있는 서울 삼성동 집은 “모든 게 구비된” 월셋집이라 전세를 얻더라도 자기만의 취향을 살린 공간을 안정적으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는 혼자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500㎖의 물을 마신다. 그러고는 적당히 진한 커피에 우유와 설탕을 약간씩 타서 마신다. 그런 다음 을 켜서 뉴스를 듣고, 책이나 잡지를 읽다가 스케줄이 없으면 운동을 하러 나간다. 동호대교 하단 한강둔치를 달리거나 헬스클럽에 간다. 식사는 직접 해먹는데, 산낙지처럼 “살아 꿈틀대는 것” 빼고 회를 포함해 아무거나 잘 먹는다. 요즘에는 설렁탕이 제일 맛있다고 했다. 밥과 빵 중 밥을 더 즐기고, 음식은 미국식과 한국식을 짬뽕으로 만들어 먹는다고 했다. 치킨 요리랑 감자 요리, 특히 스파게티에 자신 있다고 자랑했다.

터프하고 우아하고 지적인 캐릭터?

조깅을 하면 사람들이 알아볼 텐데, 변장하고 뛰어야겠다.

= 그냥 뛴다. 달리니까 쫓아오지 못한다. (웃음) 나는 사람들이 나를 아는 척해주는 게 즐겁다. 조깅을 할 때는 손 흔들고 그냥 막 달리면 된다. 공공장소에는 혼자 가기 어렵지만 운전은 즐긴다(매니저가 다시 거든다. “대니얼은 가끔 자기가 유명한 사람이라는 걸 잊는데, 네티즌이 뽑은 올해의 스타니, 청소년 스타 같은 데 선정됐다고 알려주면 ‘진짜? 진짜?’ 하고 캐묻는다. 어떤 행사 때 시간이 없는데 사람들이 자꾸 몰려오면 우리는 ‘죄송합니다’ 하고 막아서는데 이미 혼자 저쪽에 가서 일일이 사진 찍고 사인해주고 있다.”)

당신은 오만해지지 않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나?

=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냥 나 그대로 지낸다. 나는 두 얼굴을 한 사람이 가장 싫다. 굳이 애써 겸손하려 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힘든 사람도 만났고 좋은 사람들도 만났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여주는 사람들 덕분에 잘 지낼 수 있었다. 부모님은 경제적으로 풍족한 환경은 아니었으나 넘치는 사랑을 주셨다. 그게 내 밑천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연기 의지가 강하다고 들었다.

= 나는 연기자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 뭐가 되겠다는 말은 쉽게 못하겠다. 지나치게 멀리 내다보려 들면 정작 오늘을 못 볼수 있다. 원하는 것은 있지만 구체적인 계획이나 목표를 일년, 이년 단위로 세우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면 오늘에 충실해질 수 없으니까. 계획이나 목표만 위해서만 오늘이 존재한다는 건, 아까운 일 아닌가. 곧 발표하겠지만 새해에는 드라마를 할 거고 영화도 논의 중이다.

어떤 캐릭터를 맡는가?

= 글쎄, 깊이 있는 캐릭터? 약간 터프하기도 하고 우아하고 지적이고…. 하하, 내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