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E. 메클렌란3세, 해럴드 도른 공저
2007.1.15
세계사 개론 정도의 책으로 생각했으나, 정작 책의 주요 주제는 과학과 기술의 관계를 세계사를 통해 살펴본 과학사에 대한 책이었다. 원제는 'Science and technology in world history'. 아마도 과학사에 관심을 가진 독자층이 얇은 한국 실정에서, 그나마 세계사책인양 위장해서 파는게 나으리라 생각한 출판사의 마케팅 담당자가 저지른 짓이 아닌가 싶은데.. 결과적으로 의외의 곳에서 의외로 읽을만한 책을 발견한 나같은 독자가 있는걸 보면 책의 내용과는 다르게 포장해서 파는 마케팅기법이 반드시 나쁜것만은 아닌듯 싶다.
이 책의 주제를 요약하기는 쉽다. '과학과 기술은 전 인류의 역사를 통해 봤을때 별개의 분야였고, 각각 다른 사회적, 정치적 맥락에서 발달해 왔다. 이런 별개의 분야가 밀접하게 엮인 것은 이데올로기적으로는 17c 이후였으며, 실질적으로는 19c 이후의 일이다' 라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이다. 이는 연구관리를 몇년간 했던 나에게도 상당히 새롭게 느껴지는 주장이자, 직관적으로 크게 틀리지 않는 말이라는 생각이 드는 주장이다.
우리들은 흔히 Research and Development라는 용어로 연구개발 분야를 지칭한다. 이와 같은 명칭 뒤에는 기본적으로 연구를 통해서 기반이 되는 기술을 만들고 이를 상용화하는 개발이라는 업무는 그 러한 기술이 만들어진 뒤에 이어지는 과정이다 라는 생각이 존재한다. 하지만, 연구현장에서 살펴보면 이와 같이 깔끔한 이상적인 형태의 연구개발 과제는 그리 많지 않다는 현실과 마주치게 된다. 대부분의 개발과제는 별다른 과학은 둘째치고, 높은 수준의 기술조차도 필요치 않은 경우가 다반사이다. 현실적인 응용가능성을 두고 추진되어야 할 연구과제들은 정작 연구과제라고 하기 어려운 주제들이거나, 좀 연구과제스럽다 싶으면, 현실적인 응용성이 제로인 경우가 태반이다. 이러니, 연구관리와 관련된 사람들은 늘.. 왜 연구에서 개발로 매끄럽게 이어지는 과제가 우리 회사에는 없는 것일까 고민하면서, 사업부서의 R&D에 대한 몰상식함과 사회의 무지함, 그리고 연구원들의 복지부동을 통탄하게 된다.
이 책을 읽고나서 그와 같은 현실이 결코 특수한 경우가 아니며, 과학에서 기술로 이어져 세상에 빛을 던지는 과학자, 기술자의 이미지는 말 그대로 이데올로기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원자폭탄의 개발과 같이 순수 과학이론에서 그 실질적인 응용까지 매끄럽게 이루어진 경우는 오히려 소수였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책의 초반부터 기술은 매일매일 살아가기 위해 유사한 일을 반복했던 장인들에 의해, 과학 및 과학 이론들은 이미 먹고사는 문제는 벗어난 특수한 계층에 의해 발전되어 왔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리고 19C 전까지 이러한 두 분야는 서로 교류하지 않으면서 발전해왔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의 과학, 이집트의 과학, 산업혁명 등에서.. 과학과 기술은 그 기여가 분명하게 구분되었고, 특히나 산업혁명의 경우에는 과학의 발달이라기 보다는 기술의 발달에 의해 촉발되었다는 시각을 견지한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된 것은 그 당시 영국이 가장 앞서나가는 과학선진국이어서가 아니라 넉넉한 기술인력과 큰 시장에 있다고 홉스봄이 '혁명의 시대'에서 이미 지적한걸 보면, 분명 이 책의 저자들만 주장하는 특수한 이론은 아닌 것같다.
또한, 꼭 과학과 기술에 관심이 없더라도 선사시대 인류의 정치/경제적인 발달 과정이나, 원초 문명이라고 하는 청동기 문명의 발생 과정에 대한 이야기들은, 그동안 사실의 나열에 불과했던 재미없는 역사를 훨씬 생동감 있게 만들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전체적으로 단순한 사실의 나열을 지양하고 항상 역사적인 발전의 배후에 작용하고 있는 힘에 대해서 분석하고 평가하려는 저자들의 자세는, 늘 퍽퍽한 역사만 나열하는 우리나라의 역사책들과는 다른 부분이라고 생각되면서, 이것이 단순한 학풍 내지는 저자들의 스타일 차이인지, 아니면 우리나라 역사가들이 지나치게 전문성에 매몰되어 대중들과의 소통을 등한시 하는 또하나의 사례인지, 혹은 쉽게 풀어내기 위한 전문성에조차 도달하지 못한 증거인지를 고민하게 한다. 원제에 포함된 'world history'라는 단어가 과하지 않게 느껴질 만큼 세계사 자체에 대한 이해도 높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별 기대없이 들어간 뷔폐집에서 다양한 요리를 부족하지 않게 푸짐하게 대접받은 느낌...
과학, 응용과학, 기술에 대한 용어정의가 명확치 않은 점이 다소 혼란스럽게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맞다' 라고 생각하는 관점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가치있는 책읽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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