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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야기들

자주국방과 자주외교 (2차대전 당시 독일 주변국의 외교정책)

by 중년하플링 2004. 11. 18.


자주국방과 자주외교



I. 서론


이 두 단어가 주는 이미지가 사람들에 따라 그렇게 다른 줄 몰랐습니다. 이틀전 노통의 자주외교 선언 분석 글에 댓글을 달아주신 인천공항님과 대한민국님의 의견을 보고 글을 하나 더 써야 하겠구나 하는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비님의 경우


“미국에게 있어서 한국이 더 아쉬울까, 한국에게 있어서 미국이 더 아쉬울까. 만일에 전쟁나서 서울 불바다되면 노통을 비롯하여 이 사이트에 계신 분들 모두 자결하세요. ” 라고 상당히 격한 어조로 자주외교노선에 거부감을 표시하시기도 했습니다.


각설하고,


제법 오래전부터 구상해 오던 글인데 이차세계대전중의 독일과 소련의 주변부에 있던 약소국들의 외교, 군사 정책을 분석해 보려고요.



일 단 핀란드(Finland), 루마니아(Romania), 스페인(Spain)을 꼽아 보았습니다. 이 세 나라 모두 강대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상대적인 국력이 주변 강대국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와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II. 본론


차례대로 핀란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1) 핀란드


핀 란드는 독일의 소련 침공 2년전 (1939년) 소련으로부터 일부 영토의 할양을 요구 받습니다. 상식적으로 군사력의 차이가 너무 심해 소련의 요구를 들어주는 게 순리였겠지만 핀란드는 자주독립국임을 내세워 단호히 소련의 요구를 거부합니다. 이런 대담한 외교적 결단은 이 사건 직전에 있던 체코의 경우와 큰 대비를 이룹니다. 수데텐란트를 병합하겠다는 독일의 요구에 별다른 저항 없이 굴복한 체코의 경우, 어이없게 나라 전체를 싸움 한번 없이 독일에게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죠.


이 에 소련은 상투적인 조작극을 핑계 삼아 핀란드를 공격했지만 (1939년 11월) 핀란드 전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비록 장비와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만네르하임 장군의 영도하에 격렬한 저항을 펼쳐 겨울전쟁 기간 동안 소련군으로부터 세계 전사상 유래를 보기 드문 승리를 이끌어 내었습니다. 물론 날씨가 풀린 뒤 재개된 소련군의 공격으로 결국 1940년 3월 핀란드의 제 2 도시인 비이푸리(Viipuri), 항구도시 항코와 라도가호수 주변의 전지역 그리고 칼레리아(Karelia) 지협을 소련에 할양하는 조건으로 강화조약이 맺어지죠. 우리나라로 치면 부산과 평안도, 함경도 전 지역을 할양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부산분이나 실향민 자녀분들을 자극할 의도가 아닙니다. 좀더 실감나는 표현을 찾으려고...) 하지만 겨울전쟁기간 코가 석자가 되도록 혼쭐이 난 소련은 핀란드의 비무장화라든가 하는 후속조처는 생각도 못하게 됩니다.



이 때 소련의 침공에 이를 갈던 핀란드는 그 후 2년 뒤 독일의 소련 침공 시 (1941년) 유일하게 독일군측에 자발적으로 참전한 나라가 됩니다. 사실 웃긴 건 1939년 11월의 소련군의 핀란드 침공은 1939년 8월에 이루어진 독소비밀 조약(Molotov-Ribbentrop Pact)에서 핀란드를 소련의 영역으로 결정한 내용에 따른 결과인데 말이죠.


하여튼 핀란드군은 독소전의 개시 (1941년 6월)와 함께 지난 겨울전쟁 기간 중 빼앗겼던 자국의 영토를 탈환하기 위한 군사작전을 독일군과 함께 펼치게 됩니다.


다 만 여기서 눈여겨 볼 내용은, 정작 핀란드군은 독일측의 강권에도 불구하고 레닌그라드의 직접적인 봉쇄 작전에 참여하는 것은 거부합니다. 이유는 레닌그라드 전선의 본격적인 참가가 겨울전쟁의 원인 중 하나였던, 핀란드를 레닌그라드 방위의 불안요소로 간주하는 소련의 의구심을 실증해 보이는 결과가 될 것을 두려워한 핀란드 수뇌부의 판단이었죠.


간단히 말해 '실지회복을 위한 전쟁이지 영토적 야심을 채우기 위한 침략전쟁은 아니다' 이거죠.


이 와 같은 자주적 조처가 나중에 전쟁의 방향타가 독일군에서 소련군으로 넘어가는 1944년에 위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1944년 6월 소련군의 레닌그라드 전선군과 카렐리아 전선군의 압박으로 시작된 전선의 붕괴로부터 핀란드는 전쟁에서 빠져 나올 방법을 찾기 시작합니다 (핀란드에게는 독일과의 동맹이 혈맹이니 뭐니하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닌 자신의 이익에 바탕을 둔 계약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주변조건과 상황이 변하면 계약은 변경되거나 취소되는 거죠.). 결국 소련 지휘부는 다른 전선으로자원을 전용하기위해 핀란드가 독일과의 동맹파기를 하는 것을 허용하여 핀란드와 1944년 9월 16일 휴전을 체결하게 됩니다. 이것은 1940년의 국경선을 회복하고 소련기지로서 Hanko를 Porkhala로 대신하고 핀란드에 3억 달러에 달하는 배상금을 부과하는 조건이었습니다.


결 국 전쟁 초기에 독일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원래의 자국 영토 밖으로 진격을 삼간 핀란드의 자주적 결정은 독일의 동부 협력자 중 홀로 소련의 점령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어 독립국으로 전쟁에서 살아남아 서구 민주사회체제를 존속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것이 아니고 주관을 갖고 자국의 이익에 충실한 결과라고 봐야죠.



이제 루마니아를 한번 들여다보기로 하겠습니다.


(2) 루마니아


말 도 많고 문제도 많은 발칸반도의 거의 한가운데 있는 루마니아도 핀란드와 사정이 비슷한데, 핀란드보다는 좀더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었습니다. 1940년 6월에 들어 루마니아는 소련으로부터는 베살라비아(Bessarabia)지역과 북부 부코비나(northern Bukovina)를 점령당하고 8월 30일에는 헝가리에게 트란실바니아(Transylvania: 드라큐라로 유명한 동네죠)의 1/3을 강제로 양보하게 되고 9월 7일에는 불가리아에게 남부 도브루댜(southern Dobrudja)를 강제로 할양당합니다.


같 은 약소국 입장에서 보더라도 참 난감한 느낌이 들더군요. 이때 상실한 면적이 42,000 제곱킬로미터에 이 지역에 딸린 인구만 2백40만 명입니다. 우리 남한 면적이 98,000제곱킬로미터니까, 우리로 치면 거의 국토의 반을 2-3달 만에 주변국들에게 털린 셈입니다.


당연히 나라가 난리가 났고 이어진 군사 쿠데다로 이안 안토네스쿠 (Ion Antonescu) 장군이 권력을 잡게 됩니다. 그런데 핀란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대규모 영토의 상실이 사실은 독일의 중재와 강권에 의해 일어났는데도 불구하고 안토네스쿠 장군은 독일에게 자국의 영토를 보호해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이때부터 루마니아의 외교적 오바질이 시작됩니다. 1940년 8월에 독일에게 잘 보이려고 영국과의 관계를 단절하려는 시도가 루마니아 유전에 대한 영국군의 폭격을 우려한 독일의 설득으로 중단되었고요 (이런 식의 종주국에 대한 과도한 충성이 오히려 종주국의 국익과 배치되는 경우를 조중동과 럼스펠드로부터 우리는 종종 보게 되죠), 1940년 10월에는 루마니아의 요청으로 첫 독일군 부대가 루마니아에 주둔을 시작하게 됩니다.


1940 년 10월28일에 이탈리아가 그리스를 침공해 갑자기 발칸의 정세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하자 안토네스쿠는 또 다시 설레발을 시작해 히틀러에게 기갑사단을 자국내에 주둔시켜 줄 것을 요청하고 루마니아 자신도 39개 사단을 새로 편성 할 테니 도와달라고 부탁합니다.


주변국인 불가리아와 헝가리의 경우 독일의 군사적 위압에도 비교적 페이스를 잃지 않은 반면 루마니아의 경우 그 해 여름의 영토 상실을 감안한다 하더라고 독일에 대한 구애가 도를 넘어섰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루마니아의 지도자였던 안토네스쿠를 보며 625기간중의 이승만과 미국이 떠오르는 건 왠지 모르겠습니다.


결 국 이와 같은 루마니아의 자주외교와 자주국방에 대한 비전 상실은 이후 독소전 전 기간 중 독일 동맹국중 최다 병력을 투입하여 (독일을 제외한 전체 추축국 군대를 다 합친 것 보다 더 많은 군대를 동원했습니다) 독소전 내내 독일군과 함께 싸우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오데사(Odessa), 세바스토폴(Sevastopol), 스탈린그라드(Stalingrad)로 이어지는 루마니아군의 활약상은 과히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이 런 루마니아의 과도한 독일 지원은 군사부분을 넘어 경제적 무상 지원에 까지 이릅니다. 루마니아의 플로이에스티(Ploiesti) 유전에서 생산되는 석유는 물론, 곡물을 비롯한 각종 산업자원을 대가없이 독일에게 지원한 결과 루마니아 국내의 인플레이션은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이 후 공세의 주도권이 소련으로 넘어간 후 1944년 루마니아는 소련의 침공을 받게 됩니다. 물론 1944년 8월 루마니아의 왕 미하이 (King Mihai) 가 주도한 쿠테다에 의해 안토네스쿠장군은 실각하게 되고 이어 루마니아는 연합국측에 가담해 거꾸로 독일군과 싸우게 됩니다.


하지만 1947년의 파리조약에서 연합국은 루마니아를 승전국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려 결국 소련과 불가리아에게 영토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독 일측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루마니아는 자국군만 50만명의 희생을 치루었고 민간인 사망자도 50만 명을 헤아리게 됩니다. (전사자와 민간인 희생자수는 자료 마다 차이가 심하지만 대충 이정도 됩니다). 물론 연합국의 표적이 되어 국내자원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플로이에스티 유전도 폭격으로 파괴되는 등 국내 산업기반도 크게 파괴되었고요. 그리고 2차세계대전 이후에는 소련의 위성국으로 주권을 잃은 채 혹독한 압제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뭐 별도로 부가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자주적 결정이 없는 외교적 군사적 정책이 어떤 재앙을 불러 들였는지는 불을 보듯이 분명하네요. 하지만,


이 와중에도, 즉 자국의 영토가 대량으로 상실되어 국가의 존립마저 위험해 독일에 달라붙은 루마니아조차 대전기간 내내 자국군의 지휘권만은 독일군에 넘기지 않았습니다. 이는 핀란드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직도 국군의 전시작전권이 미군에 속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역사 공부를 더 하기를 권해 드립니다.



다음은 스페인으로 가볼까요?


(3) 스페인


2 차세계대전 직전의 스페인도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스페인 내전 기간(1936-1939)중 국내의 산업기반이 모조리 파괴된 건 말할 것도 없고 양측의 인명 피해도 극심해 (50만 -100만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국력의 후퇴가 막심했습니다. 내전은 프랑코 장군 (Francisco Franco)이 이끄는 파시스트 독재정권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General Franco프랑코 할아버지


내 전 기간중 이탈리아와 독일은 프랑코 장군측에 병력파견 (콘돌여단) 과 무기제공을 비롯한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소련도 공화국군측에 1000대의 항공기, 900대의 탱크, 1500문의 대포과 3만톤 규모의 탄약 등을 제공했습니다. 물론 소련의 경우 이 모든 군사적 지원에 5억 달러어치의 금괴를 대가로 받아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국제적으로 논란도 많습니다).


625와 월남전 그리고 최근의 두 차례의 이라크전에서와 마찬가지로 내전중의 스페인은 각국의 무기 경연장이 되었고 각 강대국은 자국이 새로 개발한 무기의 성능을 시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죠.


내전 기간 중의 내용은 본 글과 상관이 많지 않으니 이정도로 언급을 마치고 이후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스페인의 외교적 군사적 노선을 살펴보겠습니다.


1940 년 어찌 보면 싱거우리만큼 허무한 프랑스의 패배이후 (4월 9일에 폴란드가 최종적으로 항복하고 5월 10일에 서부전선에서 총공격이 시작된 지 한 달 만인 6월 22일에 프랑스가 항복을 했으니 정말이지 대단하긴 대단한 전격전이죠.) 히틀러는 이미 7월에 프랑코의 스페인이 독일군의 스페인 영내 통과를 허락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영국군의 지배하에 있는 지브랄터(Gibraltar) 점령계획을 세울 것을 지시합니다. 지중해로 들어가는 길목인 지브랄터가 독일의 수중에 들어오면 영국의 북아프리카와 발칸에서의 힘은 급격히 상실될 테니까요. 히틀러로서는 프랑코의 집권에 결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후원자이자 그 당시 유럽 대륙의 절대적인 패권을 쥐고 있는 자신의 요구를 프랑코가 당연히 받아 드리리라고 추호의 의심도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죠.


그 런데 1940년 12월 프랑코는 히틀러의 스페인 영내 통과를 통한 지브랄터 공략 계획을 공식적으로 거부해 버립니다. 사실 이 거부선언 두달 전 (1940년 10월 23일) 프랑코와 히틀러는 프랑스의 스페인 인접 남부해안도시인 헨다예(Hendaye)에서 만나 스페인의 추축국 참가에 관한 회담을 가졌습니다. 나중에 히틀러의 회고담에도 나오지만 이때 히틀러는 프랑코를 설득해 스페인이 추축국의 일원이 되도록 설득하느니 차라리 자기 이빨을 2-3개 뽑아 버리는 게 차라리 낫겠다고 할 정도로 프랑코는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는데 있어, 지금의 부시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절대적인 파워를 갖고 있던 당시의 유럽의 지배자에 맞서 한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당당한 자세를 견지합니다. 정말이지 대단한 배짱이었습니다. 그의 진보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독재자로서의 악행을 희석할 의도는 전혀 없지만 어쨌든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자질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 국의 석유와 각종 곡물 산업자원을 무상으로 퍼준 루마니아의 안토네스쿠 장군과는 달리 스페인의 프랑코는 독일의 스페인내의 광산 채굴권 요구까지 거부해 버립니다. 하지만 전쟁기간중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표명하긴 했어도 독소전중 자발적인 전투병력(Blue Division: 청색사단)을 파병하기도 하고 독일 선박에 각종 시설 사용을 허용하기도 하는 등 친독일적인 중립을 지킵니다.


물 론 전쟁이 끝나고 얼마동안은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했지만 냉전 기간 중 스페인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곧 스페인은 통상부분은 물론이고 군사부분에 있어서도 미국과 동맹관계를 체결하게 됩니다. 1953년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의 스페인 방문과 1955년 유엔 가입으로 전후 재편된 국제사회의 완벽한 일원이 되죠.


1940 년 가을과 겨울에 보인 스페인의 자주적 외교 군사 정책은 지금의 노통의 자주외교 선언 환경과 비교했을 때, 100배는 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한국과 미국의 국력차나 주변 외교환경은 1940년의 프랑코 스페인과 히틀러 독일과의 관계에 비하면 양반중의 상 양반인 셈이죠.


어 째든 스페인은 프랑코의 자주적인 결정 덕에 대전기간중 중립국으로서의 수많은 경제적 혜택, 즉 독일이 해외로부터 수입할 수 없는 많은 전략 물자들을 중계무역 형태로 외국으로부터 수입해 독일에 재수출하는 과정에서 많은 국부를 쌓을 수 있었고 내전 기간 중 피폐해진 국내 경제 재건에 국력을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참 고로 미 국무성에서 지원한 연구 중에 "Preliminary Study on U.S. and Allied Efforts To Recover and Restore Gold and Other Assets Stolen or Hidden by Germany During World War II"라는 것이 있습니다. 2차대전 중에 독일이 점령국에서 약탈하고 빼돌린 금을 회수하려는 연합국의 노력에 대한 보고서지요. 이 보고서 보조자료 중에 당시 독일이 중립국에게 지불한 금 처리 부분에 대한 "U.S. and Allied Wartime and Postwar Relations and Negotiations With Argentina, Portugal, Spain, Sweden, and Turkey on Looted Gold and German External Assets and U.S. Concerns About the Fate of the Wartime Ustasha Treasury"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글에서 스페인이 얼마나 많은 이익을 중립국의 지위를 통해 독일로부터 얻었는가에 대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III. 결론


이제 결론을 내려 볼까합니다.


세계 역사상 자국의 이익을 등한시한 사대외교로 자국민과 자국의 이익을 지킨 나라는 아무데도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의 경우 나라 전체가 쪽박을 차는 경우를 루마니아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부 비님의 경우처럼 자주외교에 대해 뭐라고 저주의 말씀을 하셔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주외교는 우리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주외교를 펼친다고 해서 전쟁가능성이 늘어나기는커녕 오히려 줄어들 겁니다.


혼 자 무거운 짐을 지고 고군분투하는 노통을 보면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열린우리당 소속 의원들 중 반만이라도 노통의 자주외교, 군사 노선을 이해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으면 현재 대미 협상력이 훨씬 탄탄해 질 텐데요. 국익을 위한 전략적 사고를 가진 집단이 정치권의 주류가 되는 그날을 꿈꿔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