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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2017. 10. 22. 20:03 from Lectura



- 2017.10.9, 유발 하라리/김명주 옮김


과학기술을 통해 힘을 가진 인간은 신이 되려고 할 것이다. 먼저 죽음을 극복할 것이고,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뇌의 쾌락기제를 변경할 것이다. 그리고는 신과 같은 힘을 소유한 새로운 종으로 진화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예언이 아니다. 현재의 추세를 미래로 확장하면 얻을 수 있는 예상이다. 이런 예상을 하는 것 자체가 미래를 바꿀 수도 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미래를 예측하기 위함이 아닌, 미래를 변화시키기 위함이다. 만일 예상되는 미래의 모습이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미래를 바꾸기 위해 역사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고, 이 책은 하나의 그러한 시도이다. 


희생이라는 관념은 현재 이익을 포기함으로써 미래의 (확대된) 이익을 기대하는 전략적인 행동이다. 즉, 인간이 미래를 바꿀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현재의 편익을 포기한다는 ‘희생’이 따른다. 이것은 생산력이 제약된 사회에서는 피할 수 없는 결론이다. 하지만, 인류는 과학을 통해서 희생없는 생산력의 증대를 추구하게 되었고, 이와 같은 희생없는 힘의 추구가 근대의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이 되었다.

 

- 140page, 2. 인류세, 원시시대 사냥꾼은 사바나에 나가면 야생 황소의 도움을 구했고, 황소는 사냥꾼에게 뭔가를 요구했다. 고대의 농부는 자신이 키우는 젖소들이 젖을 많이 생산하기를 바라며 하늘에 계신 위대한 신에게 도움을 청했고, 신은 조건을 제시했다. 하지만 현재 네슬레 사 연구개발부서에서 일하는 흰 실험용 가운을 입은 직원들은 유제품 생산량을 늘리리 위해 유전학을 연구한다. 그리고 유전자들은 그 대가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 접할 수 있는 충격적인 주장은 ‘인본주의’가 유신론을 대체한 새로운 신앙이라는 주장이다. 인본주의는 가치의 중심이 인간이며, 가치의 근원을 개인의 내적 성찰에서 찾는다. 신 중심의 중세사회로부터 인간 중심의 근대사회로 변화한 세계의 중심에는 과학적 세계관이 있다. 과학적 세계관과 원대한 형이상학적 세계관은 양립할 수가 없는 것이며, 세계의 의미를 제공해주던 신을 포기했기 때문에 인류는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얻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 306page, 근대 계약은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장대한 우주적 계획에 대한 믿음을 포기한다는 조건으로 우리에게 힘을 제공한다. 하지만 이 계약을 자세히 살펴보면 교묘한 면책조항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이 어떻게든 그 우주적 계획에 바탕을 두지 않고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계약위반으로 간주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 307page, 인본주의는 역할을 뒤집어 인간의 경험이 우주에 의미를 부여하도록 한다. 인본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내적 경험에서 인생의 의미뿐 아니라 우주 전체의 의미를 끌어내야 한다. 무의미한 세계를 위해 의미를 창조해라. 이것이 인본주의가 우리에게 내린 제1계명이다. 


때문에 우리가 삶을 대하는 모든 태도의 바탕에는 ‘나’라는 자아가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삶의 의미를 끌어내는 것이 내면의 목소리이다. 너무나 성공한 인본주의는 세개의 분파로 나뉘게 되었다. 


 - 343page, 19세기와 20세기에 이르러 인본주의가 사회적 신망과 정치적 힘을 얻으면서 서로 매우 다른 두 분파가 생겨났다. 바로 수많은 사회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을 아우르는 사회주의적 인본주의와 나치를 가장 유명한 신봉자로 둔 진화론적 인본주의이다.  


이러한 인본주의 분파간의 갈등을 20세기 역사의 가장 큰 이야기로 간주할 수 있다. 인본주의를 하나의 종교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척이나 새롭지만, 읽다보면 무신론 전체를 인본주의로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만일 그렇다면, 인본주의가 종교라는 주장은 단지 무신론을 인본주의로 지칭하는 것이다. 


저자가 주장한대로 인본주의는 우주적 계획에 바탕을 두지 않고 의미를 찾았는가? 이제는 아무도 우주적 계획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무의미한 세계를 위해 의미를 창조하였는가? 오히려 21세기의 위기는 개인들이 긍정할 만한 삶의 의미를 찾고 있지 못해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저자의 미래예측은 충분히 설득력있다. 어쩌면 내면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개인들은 약물이나 다른 과학적 수단에 의한 끝나지 않는 만족의 추구와 질병없는 영원한 삶을 추구할 것이다. 이것은 또다른 바벨탑이 될 것인가?   


재미있고 접해보지 않은 새로운 사례들을 풍부하게 나열하고 있어서, 두껍지만 읽기가 어렵지 않다. 아울러, 거시적인 관점에서 인류의 미래를 예상한다는 점에서 전작인 ‘사피엔스’의 확장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책 제목과는 달리 우리가 추구할 미래의 방향 보다는 여기까지 오게 된 역사적 사실들을 검토하는데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인류가 추구할 신과 같은 능력이 어떤 것일지, 지금 어떤 연구들이 진행되는지가 궁금하다면 관련 내용은 짧은 것이 아쉬울 수도 있다.  


전작인 ‘사피엔스’를 재미있게 읽었다면 다시 한번 유발 하라리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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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중년하플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