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후앙의가르침'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9.01.14 돈후앙의 가르침
  2. 2018.06.21 '돈 후앙의 가르침' 중 배움에 있어서의 네 가지 적.

돈후앙의 가르침

2019. 1. 14. 17:08 from Lectura



- 2017.8.28, 2019.1.14, 카를로스 카스타네다 지음/김상훈 옮김

이 책은 두 번을 읽었다. 첫번째 읽은 것은 2017년, 그리고 나서 최근 다시 읽었다. 처음 읽고 나서는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들은듯 한데 감상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그 이후 몇 종류의 책을 더 읽었는데, 이 책들이 두 번째 독서를 정리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각각 ‘Acid Dreams: The Complete Social History of LSD’와 ‘How emotions are made: The Secret life of the Brain’, 그리고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이다. 

일반적인 상태에서 우리는 외부 세계와 뇌를 통해 경험되는 내부 세계를 각각 분리된 실체로 인식한다. 외부 세계는 나와 분리된 상태로 존재하며 나의 상태나 인식과는 전혀 관련이 없고, 내부 세계는 내가 온전하게 통제권을 가지고 있는 전혀 별개의 체계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원론은 서구 사상의 기반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를 의심하거나 다른 체계를 생각하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때문에 외부의 실체가 우리의 의지에 의해 변화하고, 우리 인식이 특별한 상태가 되면 외부 실체가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허황되거나 환각에 빠진 것으로 생각한다.

LSD를 섭취하고 주관적인 현실이 변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70년대에 많은 사람들이 증언을 하였다. 감각의 왜곡 및 변이, ‘나'라는 주체가 사라지고 무한한 사랑을 느끼는 등…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기고, 이런 변화가 삶의 나머지 과정에서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와 같은 이원론이 적용되기 힘든 경험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증언 하였지만, 이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70년대 이후 중단되었다. 새로운 해석은 뇌과학의 발달에서 비롯되었다. 새로운 이론에 따르면 외부 지각에 대응해서 세계에 대한 내부모델을 만들고 이를 지속적으로 갱신하는 것이 뇌의 주요 활동이다. 우리의 뇌는 지속적으로 외부 세계에 대한 예측을 수행하고, 이를 실제 지각자극과 비교한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에도 외부의 지각자극을  뇌가 ‘직접’ 경험하지 않는다. 뇌는 세계에 대한 내부모델을 통해서만 외부를 인식한다.  

  • -Simulations are your brain’s guesses of what’s happening in the world. In every waking moment, you’re faced with ambiguous, noisy information from your eyes, ears, nose, and other sensory organs. Your brain uses your past experiences to construct a hypothesis — the simulation — and compares it to the cacophony arriving from your senses. In this manner, simulation lets your brain impose meaning on the noise, selecting what’s relevant and ignoring the rest.   - How Emotions are Made

이런 경우 약물이나 훈련을 통해서 뇌의 ‘내부모델’을 수정하거나, 외부 자극을 해석없이 직접 접하게 되면 LSD를 통해서 겪는 많은 경험이 설명이 된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내부모델’이 유일한 모델이 아닌 가능한 모델 중 하나라고 가정해 보자. 사람은 까마귀가 될 수 없고, 하늘을 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이지만, 만일 이런 제약이 우리의 ‘내부모델’ 때문이라면? 다른 ‘내부모델’이나 혹은 ‘내부모델’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현실을 마주치면 이러한 제약이 없는 다른 ‘외부’가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어떨까?

이 책은 이와 같은 ‘대체현실’을 묘사하고, 저자는 이를 ‘비일상적 현실 상태’라고 명명한다. 

  • -'우리는 다른 세계들을 경험함으로써 스스로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게 되고, 그 결과 우리들 자신의 문화적 구조물과 다른 구조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진정한 세계가 실제로는 어떤 것인지를 불완전하게나마 언뜻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돈후앙의 가르침

‘비일상적 현실 상태’는 흔히 말하는 ‘향정신성 약물’의 섭취를 통해 가능해진다. 그것은 메스칼리토, 악마초, 특정한 종류의 버섯 등이다. 저자는 멕시코 야키 인디언을 만나 샤면이 경험하는 ‘비일상적 현실 상태'에 대해서 정리한 것이다. 이 세계에서는 식물이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등장하고, 사람이 하늘을 날며, 악의를 품은 주술사가 내가 아는 사람으로 변신을 해서 해꼬지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비일상적 현실 상태는 우리가 지각하는 현실과는 다르지만, 내재적인 완결성을 갖고 있다. 이것을 미개한 인디언 주술사들이 만든 체계라고 해서 단순한 환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근본주의 유대교에는 에루브(Eruv) 라는 개념이 있다. 성경에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율법이 있는 반면 현대 사회에서는 안식일엔도 집밖에 나가서 일을 봐야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선과 막대 등을 이용하여 가상의 벽과 문을 만들고 이를 실내로 간주하는 것이다. 에루브는 이를 위한 전반적인 체계를 의미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상의 집들은 끊임없이 관리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일만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도 있다.

샤머니즘은 단순히 과학이 발전하기 전 미개한 단계의 문명에만 나타나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현상일까? 주술사란 이상한 주문이나 외우고 춤을 추며 환각성 약초를 사용하는, 현실에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과거의 약물 중독자 같은 존재였을까?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에루브와 과거 문명의 샤머니즘은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

‘비일상적 현실 상태’의 진위 여부와는 관계없이 돈후앙이 전하는 삶의 지혜는 충분히 귀기울일 가치가 있다.

  • - 두려움은 전혀 나쁜게 아니라네. 두려우면 사물을 다른 방식으로 보게 되니까 말이야.
  • - 난 누구한테든 화를 내거나 하진 않나! 그 어떤 인간도 내 화를 돋울 만큼 중요한 일을 할 수는 없어. 누구한테 화를 낸다는 건 상대방의 행위가 중요하다고 느낄 때나 가능한 일이지. 난 더 이상 그런 식으로 느끼지 않아.
  • - 자, 그게 뭔지 얘기해주겠네. 그 길에는 마음이 깃들어 있는가? 이거야. 모든 길은 똑같다네. 어디로도 통해 있지 않지. 덤불을 헤치고 나아가는 길이든, 덤불로 들어가는 길이든 그게 그거야.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기나긴 길을 걸어왔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내가 지금 어디에 와 있는 건 아냐.


Posted by 중년하플링 :

“처음으로 배움을 시작할 때는 누구나 목적의식이 뚜렷하지 않다. 몇 가지 목적이 있다 해도 결점 투성이고 의지도 굳지 않다. 그는 배움의 고초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실현될 수 없는 보상들만을 꿈꾸고 있기 십상이다.
그는 천천히 배워 나가기 시작한다. 처음에 조금씩 조금씩, 그러다 큰 덩어리에 부딪힌다. 그때 그의 생각은 쉽게 분열을 일으킨다. 그가 배우는 것은 애초에 그가 머리 속으로 그리고 상상했던 것과는 딴판이다. 따라서 그는 겁을 먹기 시작한다. 배움이란 누구한테나 전혀 상상 밖의 것이다. 배움의 모든 단계들이 다 새롭기만 하다. 그러니 자연히 두려움이 산처럼 쌓여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다. 큰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마음 속에 있는 첫 번째 적과 마주치게 된다. 바로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이야말로 무시무시한 적이다. 뿌리칠래야 뿌리칠 수도 없고 싸워 이기기도 힘이 든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그 놈이 눈을 번뜩이며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두려움에 겁을 집어먹고 달아났다면 그것으로 문이 닫히고 만다.”

“겁을 먹고 도망가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다른 것은 둘째 치고 그런 사람은 절대 배울 수가 없다. 그는 절대 앎의 사람이 될 수 없다. 아마도 그는 약한 자를 못살게 구는 인물이나 아니면 악의는 없지만 겁에 질린 위인으로 전락해 버릴 것이다. 어쨌든 그는 패배자가 된 것이며, 첫 번째 적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바라던 것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두려움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달아나지 말아야 한다. 달아나지 말고 그 두려움에 도전해서 다음 단계, 그 다음 단계로 배움을 계속해야 한다. 두려움이 아무리 크게 밀려와도 멈추어선 안된다. 이것은 규칙이다! 그러다 보면 드디어 첫 번째 적이 물러가는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때 비로소 자신감이 생기고 의지가 더욱 강해진다. 그때는 배움이 더 이상 두려운 일이 아니다. 이 기쁜 순간이 찾아왔을 때 비로소 자기가 첫 번째 적을 물리쳤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순간이 한꺼번에 찾아옵니까, 아니면 서서히 찾아옵니까?
“서서히 찾아온다. 하지만 두려움은 일단 물러가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사라진다.”
“하지만 또 새로운 상황이 닥치면 다시 두려워지지 않을까요, 돈 후앙?”
“그렇지 않다. 일단 두려움을 정복하고 나면 평생동안 그것으로부터 해방이 된다. 왜냐하면 두려움 대신 명석한 정신이 두려움을 없애 준다. 이 때가 되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이고, 그 원하는 것들을 어떤 방법으로 성취해야 할지를 분명히 알게 된다. 따라서 새로운 단계의 배움을 스스로 기대하게 되고, 매사를 분명하게 이해한다. 그는 어느 것 하나도 비밀에 싸여 있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이렇게 해서 그는 두 번째 적과 만나게 된다. 바로 명석함이다! 명석한 정신은 얻기도 힘들고 일단 얻기만 하면 두려움을 물리쳐주긴 하지만 동시에 마음의 눈을 멀게 한다.
명석함 때문에 그는 자기 자신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분명히 바라볼 수 있기에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자신감을 얻는다. 분명하기 때문에 그는 용기도 생기고 어떤 장애물에도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하나의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아직 불완전한 상태에 불과하다.
만일 스스로에게 확신을 불어 넣는 이 명석한 정신에 자신을 송두리째 내맡긴다면 결국 두 번째 적에 굴복하는 셈이 되며, 거기서 배움이 중단되고 만다. 그는 인내를 갖고 참고 기다려야 할 때에 가서 마구 돌진해 들어갈 것이며, 돌진해 들어가야만 할 때에 마냥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꾸만 발을 헛디뎌 마침내 더 이상 배움을 지속해 나갈 수 없는 결말에 이를 것이다.”

“거기서 패배한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돈 후앙? 그는 죽게 됩니까?”
“아니다. 죽지는 않는다. 다만 더 이상 앎의 사람이 되려는 시도를 못하게 될 뿐이다. 앎의 사람이 되는 대신 그는 어릿광대나 떠돌아 다니는 싸움꾼으로 전락해 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값비싼 대가를 지불한 정신이 또 다시 어리석음이나 두려움으로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살아있는 한 그는 여전히 명석한 정신을 갖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무엇을 배우거나 갈망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에 패배 당하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두려움에 대해서 했던 것과 똑같이 해야 한다. 자신의 명석한 정신에 도전해서 그 명석한 정신을 오로지 보는 데에만 이용하고 새 배움의 단계로 나아가기 전에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고 깊이 심사숙고해야 한다. 그러면 자신의 명석함이 오히려 눈의 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할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이 상태가 바로 두 번째 적을 물리친 상태다. 이 위치에 서면 어떤 것도 그를 해칠 수가 없다. 하나의 오류나 눈의 티로서가 아니라 그는 진정한 힘을 지니게 된다.

이 단계에 도달하면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추구해온 힘이 드디어 자기 것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그는 그 힘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그의 협력자는 그의 명령에 따르고, 그가 원하는 것이 곧 법칙이 된다. 그는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본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그는 힘이라는 세 번째 적과 만나게 된다.
힘은 다른 적들 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하다. 따라서 당연히 거기에 굴복하기도 가장 쉽다. 어쨌든 그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누구도 그에게 대항할 수 없다. 그는 명령을 내리며 일부러 위험한 상황에 뛰어들어 주위 모두를 자기에게 복종하게 만든다. 그는 이미 대가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 있는 사람은 세 번째 적이 곁에 다가왔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다 돌연 눈치도 못 챈 사이에 싸움에 지고 만다. 이 세 번째 적은 그를 잔인하고 변덕많은 인간으로 바꿔 버린다.”

“그렇게 되면 그는 자신의 힘을 잃게 됩니까?”
“아니다. 명석함이나 힘은 잃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그를 앎의 사람과 구별할 수 있습니까?”
“힘과의 싸움에서 진 사람은 끝내 힘을 이용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 채 눈을 감는다. 그러니 힘은 오히려 그의 운명에 짐지워진 무거운 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는 명령을 내리지 못하며, 언제 어떻게 힘을 이용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어떤 싸움이든지 일단 지고 나면 그것으로 영원한 패배가 됩니까?”
“물론 그것으로 끝장이다. 어떤 적에게든지 일단 패배하고 나면 더 이상 아무 소용이 없다.”
“이를테면 힘과의 싸움에서 진 사람이 자기 실수를 알고 방향을 바꿀 수는 없습니까?”
“불가능하다. 일단 굴복하고 나면 그것으로 끝이다.”
“하지만 일시적인 힘에 눈이 멀었다가 다음 순간 정신을 차릴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아직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그가 여전히 앎의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뜻이다. 더 이상 노력하지 않을 때 자신을 포기할 때 사람은 패배하게 된다.”
“그렇다면 돈 후앙, 몇 년 동안 두려움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다가 마침내 그것을 극복하는 일도 가능합니까?”
“말은 쉽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하다. 일단 두려움에 굴복하고 나면 다시는 그것을 정복하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배우는 것을 겁내고 더 이상 시도하려 들지 않을 것이니까. 하지만 두려움 속에서도 몇 년 동안 굴하지 않고 계속 배우려고 시도한다면 마침내 두려움을 정복하고 말 것이다. 그 상태는 자신을 두려움에 내맡긴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이 세 번째 적을 물리칠 수 있습니까? 돈 후앙?”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진해서 힘에 도전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갖고 있는 힘이 실제로는 절대 자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항상 자기자신을 단속하고 자기가 터득한 모든 사실을 조심스럽고 신중히 다루어야 한다. 자신을 단속하지 못하는 명석함과 힘이 하나의 오류보다 더 나쁘다는 사실을 깨우치기만 하면 스스로 자기 속의 모든 것을 점검하는 단계에 이를 것이다. 이때 비로소 언제 어떻게 자신의 힘을 이용해야 할지를 알게 된다. 이 상태가 바로 세 번째 적을 물리친 상태다.

이리하여 그는 배움의 마지막 여행에 접어든다. 그리고 전혀 사전 경고도 없이 마지막 네 번째 적과 부딪히게 된다. 바로 늙음이라는 적이다! 이 적은 인정사정이 없다. 누구도 완벽히 이 적을 물리칠 수 없다. 다만 계속해서 싸워 나갈 수만 있을 뿐이다.
이 단계에선 두려움도, 서두는 명석함도 찾아볼 수 없으며, 자신의 모든 힘을 잘 통제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휴식을 취하고 싶은 끝없는 욕망이 일어나는 단계이기도 하다. 만일 이 욕망에 굴복해 쓰러져 눕거나 모든 걸 깨끗이 잊으려 한다면, 만일 피곤하다는 구실로 자신을 잊는다면 그는 결국 마지막 마당에서 패배하고 말 것이며, 그의 적은 그를 연약한 늙은이로 전락시키고 말 것이다. 그만 휴식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그는 모든 명석함과 지혜를 몽땅 공중에 날려 버릴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피곤함을 씻어내고 삶을 끝까지 철저히 산다면 그는 비로소 앎의 사람이라 불리워질 수 있다. 마지막 적, 늙음이라는 그 무적의 적과 싸워 이기는 순간 그는 앎의 사람이 된다. 그 순간 속엔 명석한 정신과 힘과 지혜가 다 녹아들어가 있는 것이다.”

Posted by 중년하플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