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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5.01.02 '상실의 시대' - 아니마와의 로맨스

 


 - 2025.1.2 무라카미 하루키/유유정 옮김

어떤 이야기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그것이 원형(archetype)적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다. 확실히 어떤 이야기가 왜 원형적인가하는 설명을 듣다 보면 무척이나 그럴듯하게 느껴지는데, 사실은 훌륭한 이야기를 사후적으로 짜맞춘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늘 마음 한구석에 가졌더랬다.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는 지금까지 세번쯤 읽었던듯 싶다. 처음 읽었던 것은 대학교 1학년때의 일로 기억하는데, 읽을 때마다 어쨌든 재미는 있었고,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해도 뭔가가 더 있다는 생각을 했던것 같다. 이제 오십이 되어서 읽은 이 소설은 최근 알게 된 융심리학에 비추어 봤을때 원형적인 구조가 너무나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는 이야기였다.  

융은 아니마(anima)와 투사(projection)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모든 남자의 무의식에는 인류가 집단적으로 만들어낸 이상적인 여성의 원형이 존재한다. 이를 아니마라고 부르는데, 아니마는 한 남자의 내적 성장에서 무척이나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남자의 무의식과 의식을 연결하는 다리와 같은 것으로, 의식에 존재하는 남성적인  자아(ego)를 깊고, 광활한 무의식의 세계와 연결하여 삶의 의미를 만들어낸다. 남자들의 의식 세계는 어디까지나 남성적인 원리에 기반하여 돌아간다. 일상적인 삶에서 생존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남성성의 원리를 바탕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 세계에서는 부드럽다던지 친절하다던지 동정심을 가진다는 것은 있으면 좋은 부차적인 역할에 그친다. 하지만, 한 남자가 일상 세계에서 성장하고 자리를 잡기 위해 남성성에만 의존해서 살아가게 되면 세상은 의미를 상실한 잿빛이 되어간다. 세상에서 자리잡기 위해 추구한 그것으로 인해 의미가 살아져버린 세상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때 다시 한번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마이다. 아니마는 지나친 남성성 추구로 인해 잃어버린, 살아가야 하는 의미를 다시 한번 삶으로 되돌릴 수 있는 무의식이 선물이다. 

하지만, 아니마는 무의식에 영역에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인식할 수가 없다. 의식화를 위해 아니마가 사용하는 전략은 투사이다. 즉, 실제세계에 존재하는 다른 이성에게 무의식의 아니마가 겹쳐지면서 그 여자는 세상에는 존재할 수 없는 여신의 역할을 하게된다. 이때 그 남자는 특정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 내면의 아니마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이것이 로맨스의 경험으로 나타난다. 이 로맨스는 지상의 세계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원형적인 여성과의 사랑이다. 결국은 로맨스에서 깨어나 현실의 여자와 마주하거나, 다른 여자에게 투사를 옮겨여 또 다른 로맨스에 빠지는 형태로 일이 진행된다. 내적 성장을 위해서는 아니마에 의한 투사는 내적 성찰을 위해 활용하고, 현실의 여자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분리가 필요하다. 현실의 여자와의 사랑은 로맨스처럼 광휘에 휩쌓여있지도 않고 천상적이지도 드라마틱하지 않다. 그것은 찬밥에 물을 말아 김치를 먹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일들로 이루어진다. 애정의 대상을 여신으로 만들지 않고, 그/그녀의 인간적인 단점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관계이다. 내면의 아니마는 그대로 여성적인 원리로 존중하며, 자신의 무의식과 대화를 계속 해나가면서 여성적인 원리들을 자신의 자아에 통합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큰 틀에서 상실의 시대는 성장 소설이다. 주인공 와타나베는 나오코와 미도리 사이에서 갈등한다. 만일 와타나베가 나오코의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고, 성장하지 못했다면, 그는 죽음의 세계에 홀리게 되었을 것이다. 대신 그는 삶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성장하는 편을 선택했다. 나오코는 아니마이고 미도리는 현실의 여자이다. 아니마는 원형이기 때문에 삶의 세계가 아닌 죽음의 세계(무의식)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와타나베는 나오코와는 섹스를 할 수가 없다. 

와타나베는 나가사와 선배와 함께 하면서 많은 여자와 잠을 잘 수 있지만, 그 무의미함에 권태를 느낀다. 남성적인 자아는 더 많은 여자와의 섹스가 더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이때 중요한 것은 얼마나 효율적으로 원하는 바를 얻을 것인가이다. 나가사와는 이 같은 남성적인 원리에 극단으로 치우친 인간이다. 그는 나름 친절하고, 남에게 상처를 입히고 싶어하지는 않지만, 옆에서 보기에 비뚤어진 인간이다. 그는 누구와도 진정으로 연결될 수 없다. 내면적인 여성성의 원리에서 너무나 멀어져버린 극단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비록 멋진 여자친구가 있지만, 의미를 찾지 못하면서도 계속해서 많은 여자들과의 섹스를 '해치워나간다'. 외부의 사물/사람은 그 자체로 내재적인 가치를 갖고 있지 않다. 우리가 내부에서 가치를 부여했을때만 외부의 사물과 인간은 가치를 갖게 된다. 나가사와는 함께 잠을 자는 여자들과 내면적으로 연결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그녀들과의 섹스에 아무런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그가 여자들과 잠을 자는 이유는 단순하게도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황량한 세상은 오로지 남성적인 원리로만 이루어진 세상이다. 와타나베는 나가사와 보다는 '성숙'하다. 하지만, 그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아니마 투사. 즉, 나오코를 극복해야 한다. 이는 나오코의 죽음과 상실감으로 방황하는 와타나베를 통해 표현된다. 이때 도움이 된 것은 의외로 나가사와가 해준 이야기이다. '자기 자신을 동정하지 말것'. 그리도 나오코와의 또 다른 연결고리인 레이코 여사와의 섹스를 통해서 일상적인 인간 여자와의 친숙함을 되찾는다. 레이코 여사는 어떤면에서 성숙한 아니마이다. 나오코가 자신의 아픔을 극복했으면 될 수도 있었을, 성숙하고 사려깊은 여성성을 표현한다. 이는 나오코가 죽으면서 그녀의 옷을 레이코 여사에게 전달하는 것을 통해 상징된다. 즉, 레이코는 또다른 나오코인 것이다. 그녀와의 관계를 통해 와타나베는 미숙한 아니마 투사를 멈출 수 있게 되었고, 미도리에게 돌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이런 면에서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표면적인 인상과는 다르게 희망적이다. 우리는 아무리 성장하더라도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단지, 조금 더 나아지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할 뿐이다. 그 노력이 결국 성장의 핵심이다. 계속 상처를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것. 상처 받을 것을 받아들이면서 좌절하지 않는 것. 

 'Sing like no one is listening, love like you've never been hurt, dance like no one is watching, and live like it is heaven on earth'.   - Mark Tw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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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중년하플링 :